SUV 시장 평정했던 비운의 기업,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시장점유율 상승세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쌍용차의 부활…코란도는 멈추지 않는다
“코란도C는 쌍용자동차 부활의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2010년 4월 부산 모터쇼가 열린 부산시 해운대구 벡스코. 이유일·박영태 쌍용자동차 공동관리인과 김규한 노조위원장이 콤팩트스포츠유틸리티차량(CUV) ‘코란도C’ 콘셉트 카를 소개했다. 수십 명의 기자들 앞에 선 그들의 표정은 긴장감으로 가득했지만 차량을 소개하는 말투는 단호했다.

코란도C는 쌍용차 매각과 구조조정, 노조 옥쇄 파업 등 극심한 내홍을 겪는 과정에서 개발된 ‘최후의 희망’이었다. 이 차량 역시 부품 공급 차질로 당초 예정된 출시일보다 6개월 이상 늦은 2011년 3월부터 판매가 시작됐다. 우여곡절의 연속, 고난의 행군이었지만 쌍용차는 멈추지 않았다. 쌍용차는 이미 자동차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무쏘와 ‘대한민국 1%’를 표방한 고급 SUV 렉스턴으로 국내 자동차 시장을 평정했던 경험이 있었다. 쌍용차엔 ‘SUV 명가’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었고, 이는 곧 회사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코란도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모델명이기도 하다. 그렇게 출시된 코란도C는 성공했고 회사는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다시 일어섰다.

쌍용차의 시작은 하동환자동차제작소다. 자동차 수리 공장에서 일하던 청년 하동환이 6·25전쟁 후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1954년 초 서울 마포구 창천동 집 앞마당에 천막 공장을 지었다. 미군이 쓰던 트럭을 불하받아 엔진과 변속기 차축을 떼어내고 기차 레일을 잘라 프레임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차체에 망치로 편 드럼통 철판을 입혀 버스를 만들었다. ‘드럼통 버스’는 이렇게 등장했다. 이 회사는 1967년 8월 국내 최초로 대형 버스를 베트남과 브루나이에 수출하기도 했다. 1972년 2월 상호를 동아자동차로 변경한 뒤 경기도 평택에 99만㎡(30만 평) 규모의 부지에 1, 2공장 건설을 착수했다. 이곳이 오늘날의 쌍용차 생산 공장이다.

코란도의 전신은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신진자동차공업은 미국 카이저사와 기술제휴를 통해 국산 지프 ‘CJ-5’를 생산했다. CJ는 ‘민간용 지프(Civillian Jeep)’의 약자다. 1974년 4월 신진자동차공업은 미국 AMC(America Motor Company)와 50 대 50 합작 제휴로 지프 생산 전문 업체인 신진지프자동차공업을 설립하고 AMC의 CJ 모델 4종을 조립 생산(CKD)했다. 하지만 AMC는 신진지프차가 미국과 적대국인 리비아에 차를 수출한다는 이유로 기술제휴를 중단했다. 이에 따라 신진지프차는 1981년 ‘거화(巨和)’로 사명을 바꾼 후 독자적으로 CJ를 생산했다. 1983년 차명도 ‘코란도’로 바꿨다. 코란도(Korando)는 ‘코리안 두 잇(Korean do it)’, ‘코리안 랜드 오버(Korean land over)’, ‘코리안 랜드 도미네이터(Korean land dominator)’라는 뜻이다.


망치로 두드려 차를 만들다
버스와 코란도, 서로 다른 길을 걷던 동아자동차와 거화는 1984년 한 지붕 아래로 모였다. 11월 20일 동아차가 거화를 인수한 것이다. 장두섭 동아차 사장과 거화의 김기섭 사장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동아차는 1985년 2월 기존 모델을 개선한 코란도85를 개발, 출시했다. 코란도 훼미리9, 밴, 앰뷸런스 등 총 6개 차종의 코란도 85 시리즈는 전복 위험을 최소화한 설계와 일반 승용차와 같은 중앙집중식 계기판, 냉난방 시스템, 배기량 2238cc짜리 일본 이스즈의 디젤엔진 등을 갖췄다.

‘이제부터 쌍용자동차입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 일간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힌 전면 광고가 게재됐다. 동아차가 쌍용차로 사명을 변경한 것이다. 이에 앞서 2년 전인 1986년 11월 쌍용그룹이 동아차를 인수했다. 당시 동아차의 자본금은 279억 원, 총자산은 1350억 원이었고 2325명의 임직원을 두고 있었다. 쌍용그룹은 동아차 인수를 통해 자동차 산업에 진입했고 김석원 회장의 지시에 따라 신차 개발에 나서면서 시장점유율을 확대해 나갔다. 대표 차종은 1988년 11월 21일 출시된 ‘코란도훼미리’다. 이 차량은 국내 최초로 독자 기술이 적용된 4WD 스테이션 왜건(뒷문으로 짐을 실을 수 있는 자동차)이다. 기존의 코란도와 차별화된 디자인과 주행 성능, 승차감 개선으로 출시 첫날 278대가 계약되고 2년 동안 2만 대가 넘게 팔리는 등 판매 호조를 보였다.

쌍용차는 코란도와 함께 다른 차종을 확대하면서 현대차와 기아차 등에 위협적인 회사로 성장했다. 1993년 등장한 무쏘는 디자인과 성능 면에서 경쟁 우위를 점하며 SUV 시장을 장악했다.

무쏘가 등장한 시기에 쌍용차는 메르세데스-벤츠와 기술제휴를 맺었다. 무쏘는 1995년 출시된 뉴훼미리 9인승에도 최고 출력 79마력짜리 2300cc 벤츠 엔진을 탑재했다. 이듬해인 1996년에는 경남 창원에 엔진 공장을 세우고 가동에 들어갔다. 이 공장에선 연간 1만 대 규모의 대형 디젤엔진을 만들었다.

벤츠와의 협업은 대형 고급 세단에까지 이어졌다. 1993년부터 총 4500억 원을 들여 연구·개발을 진행한 결과 4년 후인 1997년 10월 발표한 ‘체어맨’이 그것이다. 체어맨은 벤츠의 E클래스와 플랫폼을 공유하되 S클래스에 적용된 기술 노하우를 결합해 만들었다.

하지만 쌍용차의 이 같은 과감한 투자와 신차 개발은 오히려 회사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대규모 투자금 집행과 1997년 발생한 외환위기, 국제통화기금(IMF)의 강한 구조조정 요구 등으로 쌍용그룹이 버텨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재계 5위였던 쌍용그룹은 경영난에 빠졌고 쌍용차는 11년 만에 대우자동차로 넘어갔다.


모그룹 쌍용·대우 연이은 몰락
대우그룹은 1997년 12월 8일 서울 남대문로 힐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쌍용차 인수를 발표했다. 본계약은 한 달 뒤인 1998년 1월 9일 체결했다. 대우그룹은 쌍용차 발행 주식 중 쌍용그룹이 보유한 51.98%를 인수하고 3조4000억 원의 부채 중 절반인 1조7000억 원을 떠안는 조건으로 쌍용그룹과 최종 합의했다. 주식의 48.01%를 대우차가, 3.97%를 대우중공업이 인수하기로 했고 인수 가격은 총 642억 원이었다.

대우자동차를 이끌던 김우중 대우 회장은 코란도의 글로벌화를 추진했다. 유럽에 코란도 생산 공장 설립을 검토했고 북미 진출도 준비하고 있었다. 프로젝트명은 ‘K115’. 북미 진출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1999년 하반기 출시 일정을 최종 조율하는 단계까지 갔다. 하지만 쌍용차를 포함한 대우그룹의 12개 계열사에 대한 워크아웃(기업 개선 작업)이 시작되면서 이 프로젝트는 멈춰 섰다. 대우차도 2000년 그룹에서 떨어져 나와 주채권은행인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으로 넘어갔다. 대우차가 쌍용차를 인수한 지 3년 만의 일이다.

조흥은행은 쌍용차의 매각을 추진했다. 하지만 제너럴모터스(GM), 푸조-시트로엥(PSA)그룹과의 작업이 여의치 않자 중국 국영 석유화학그룹 란싱과도 협상을 추진했다. 결국 쌍용차는 2004년 상하이자동차에 팔렸다.

쌍용차가 대우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후 상하이차에 팔리기 전까지 회사 경영진과 임직원들은 경영 정상화에 전력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1999년 6월 2300cc와 2900cc 터보 인터쿨러 디젤엔진을 장착한 ‘무쏘 7인승’이 출시되면서 판매량이 상승했다. 2001년 8월 30일에는 서울 힐튼호텔에서 고급 대형 SUV ‘렉스턴’을 출시했고 이 시장을 장악했다. 오늘날도 많은 쌍용차 직원들은 공장 생산 라인이 가장 바쁘게 돌아갔던 시기로 렉스턴 출시 직후를 꼽을 정도다. 이듬해인 2002년 출시된 첫 한국형 픽업트럭인 ‘무쏘 스포츠’까지 가세하면서 회사는 경영 정상화에 한걸음 다가갔다.

하지만 2004년 상하이차로 넘어간 쌍용차는 다시 내리막길을 걷는다. 경영진이 전통의 강자인 코란도를 단종시키고 후속 차량으로 ‘액티언’을 내놓은 것이다. 액티언 프로젝트는 패착이었다. 소비자들이 쉽게 다가가기 힘든 디자인과 ‘중국 차’라는 인식이 가져온 ‘차이나 디스카운트(China discount)’는 실적 부진으로 이어졌다. 2007년 정부가 시행한 ‘수송 에너지 세제 조정 방안’도 디젤 차량인 액티언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줬다. 당시 이 정책으로 가솔린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던 디젤 가격이 85% 수준까지 치솟았다.

액티언과 액티언 스포츠, 로디우스 등 신차 모두가 판매 부진을 겪은 쌍용차는 2006년 코란도를 부활시키기로 결정했다. 2009년 4세대 풀 체인지(완전 변경) 모델을 내놓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 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자 상하이차는 2009년 초 서울중앙지법 파산4부에 법정관리(기업 회생 절차)를 신청했다. 인수 5년 만에 쌍용차를 포기한 것이다. 당시 업계 안팎에선 ‘상하이차가 쌍용의 기술만 빼가고 회사를 버렸다’는 ‘먹튀’ 논란도 불거졌다.

쌍용차의 공동관리인으로 쌍용차 상무인 박영태 씨와 현대차 사장 출신인 이유일 씨가 선정됐다. 이들은 기업 가치 산정 및 구조조정안을 마련했다. 이에 대한 노동조합의 반발이 거셌다. 구조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노조 측이 공장을 점거하면서 갈등이 격화됐다. 공권력까지 투입되는 등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총 77일간 공장이 멈춰 섰다. 파업은 총 3000억 원 이상의 손실을 내고 8월 6일 끝났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쌍용차의 부활…코란도는 멈추지 않는다
인도 마힌드라 인수 후 신차 개발 가속
파업 기간에도 연구진에 의해 차세대 코란도 개발이 계속 됐다. 2010년 처음 소개된 뒤 이듬해인 2011년 3월부터 판매된 코란도C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2010년에는 쌍용차의 새 주인으로 인도의 마힌드라&마힌드라가 선정되기도 했다. 중국에서 인도로 국적이 바뀐 셈이다.

이후 쌍용차는 신차 개발 및 판매에 속도를 냈다. 코란도C의 판매 호조에 이어 체어맨의 부분 변경 모델인 체어맨 W, 픽업트럭인 코란도 스포츠, 렉스턴 W, 미니밴 코란도 투리스모까지 전 차종이 상품성을 개선한 부분 변경 모델로 출시되면서 판매량이 회복세로 돌아섰다. 매출액도 2005년 3조4255억 원으로 고점을 찍은 뒤 2009년 3분의 1 수준인 1조668억 원으로 떨어졌고 2013년 3조4849억 원으로 올라섰다. 수치상으로는 정상 궤도에 복귀했다.

하지만 국내 SUV 시장점유율은 아직 상하이차 인수 전 수치를 회복하지 못했다. 1999년 59%에 달했던 점유율은 2003년 40%, 2004년 27%를 기록했다. 이후 2008년 15%, 2009년 7%까지 내려간 후 지난해 17.3%까지 상승했다. 이유일 사장은 회사의 미래 비전을 밝히며 2016년 판매량 30만 대, 매출 7조 원을 제시했다. 판매량 30만 대 체제를 갖추기 위한 핵심 차종은 코란도C보다 한 체급 작은 소형 SUV인 ‘X100(프로젝트명)’이다. 이 회사는 내년 초 X100 출시를 통해 내수 판매량을 끌어올리는 것은 물론 북미 시장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1954년 하동환자동차제작소를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진 쌍용차의 역사는 수없는 담금질의 과정이었다. 한층 더 단단해진 쌍용차의 성장세는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코란도는 달린다.


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