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바흐 폐지하고 39세 디자이너 파격 발탁, F1 무대에도 화려한 복귀

[역사를 이끈 자동차 M&A 명장면] ‘젊은 벤츠’…삼각별의 부활 이끈 디터 제체
“올해 말, 회사를 떠나고자 합니다.”

2005년 6월 28일 위르겐 슈렘프 다임러크라이슬러 회장이 퇴진 의사를 밝혔다. 임기를 2년 남긴 상황에서 이뤄진 깜짝 발표였다. 미디어들은 바쁘게 이 소식을 전 세계로 전했다. 당시 세계에서 셋째로 큰 자동차 그룹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10년간 군림하던 황제의 하야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날 회사의 주가는 9%나 뛰었다. 시장은 그의 퇴진을 반긴 셈이다. 수습사원이 회장에까지 승진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의 결말은 씁쓸했다. 크라이슬러와의 합병, 미쓰비시와의 자본 제휴 등 어마어마한 실책을 거듭하던 슈렘프의 마지막 선택은 탁월했다. 그는 사임과 함께 미국에서 크라이슬러를 이끌고 있는 디터 제체를 후임자로 지명했다. 제체 회장은 수세에 몰리던 그룹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댔다. 크라이슬러를 떼어낸 제체 회장은 이후에도 마이바흐의 생산을 종료하는 등 그룹 내에서 제 기능을 상실한 부분을 과감하게 도려냈다. 제체 회장의 극약 처방은 효과를 봤다. 다임러그룹은 건강을 회복했고 메르세데스-벤츠는 강해졌다. ‘황제의 귀환’이었다.


바이올린 켜고 맥주 서빙하는 스타 CEO
슈렘프 회장은 1961년 다임러 벤츠에서 수습 기계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6세였다. 34년 뒤인 1995년, 슈렘프는 회장에 임명됐다. 밑바닥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3년 뒤인 1998년 슈렘프 회장은 미국 3위의 자동차 회사인 크라이슬러를 인수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당시 경영난에 허덕이던 크라이슬러를 400억 달러란 높은 값에 사들였기 때문이다. 다임러와 크라이슬러의 합병 이후 주가는 계속 떨어졌다. 최고 1153억 달러에 달했던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시가는 이후 절반 이하인 449억 달러까지 급락했다. 투자자들은 떨어진 주가를 가리켜 ‘슈렘프 디스카운트’라고 비꼬았다.

이후 그는 다시 한 번 흐름을 자신에게 돌리려고 했다. 일본 기업 미쓰비시에 거액을 투자한 것이다.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 현대차와의 상용차 부문 합작도 성공하지 못했다. 슈렘프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최대 주주이자 슈렘프 회장의 든든한 방패막이었던 도이체방크가 지분을 10.4%에서 6.9%로 낮춘다고 발표했다. 80년 넘게 이어 온 두 회사가 이별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파이낸셜타임스는 다임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슈렘프는 남은 임기 내에 계획을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이 회사를 떠날 적기라고 생각했다.”

큰 키와 하얀 콧수염, 푸근한 미소. 디터 제체 다임러그룹 회장의 겉모습은 영락없는 ‘친절한 독일 할아버지’다. 실제로 그는 2001년 크라이슬러 최고경영자(CEO) 시절 제품 홍보를 위해 멜빵바지를 입고 콩트를 선보였다. 2005년 도쿄 모터쇼에선 신형 S클래스를 소개하며 유명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2012년 A클래스 출시 행사 때는 직접 맥주를 서빙한 적도 있다. 각종 시승 행사나 신차 출시 행사에 등장해 참석자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다임러그룹의 선장을 맡아 거친 파도를 극복해 낸 냉철한 CEO였다. 2005년 회장 자리에 오른 그는 크라이슬러의 10억 달러에 달하는 적자를 채우기 위해 직원 2만6000명을 해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2년 후인 2007년에는 크라이슬러를 매각(매각가 74억5000만 달러)한 후 다임러AG로 사명을 바꿨다. 미쓰비시와의 자본 제휴도 청산했다.

그의 아버지는 엔지니어였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제체 회장은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1976년 다임러벤츠에 입사해 연구개발센터에서 일했다. 1982년에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 전자장치와 상품 개발 전문가로 일했다. 해외 지사에선 영업과 마케팅도 거쳤다. 그 덕분에 제체 회장은 독일어·영어·프랑스어 등 총 6개 언어를 별 어려움 없이 구사한다.

다임러AG의 체질을 성공적으로 바꾼 제체 회장에게 다음 과제는 벤츠의 경쟁력 제고였다. 벤츠는 2011년 영업이익률 순위에서 BMW와 아우디에 뒤졌다. 경쟁자들보다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2013년 세계 판매 대수도 BMW와 아우디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제체 회장은 또다시 두 가지 과감한 조치를 취하기로 한다. ‘늙은’ 마이바흐 브랜드를 폐지하고 ‘젊은’ 디자이너에게 벤츠의 미래를 맡기기로 한 것이다.


마이바흐 대신 벤츠 S클래스에 역량 집중
“마이바흐보다 S클래스에 투자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체 회장이 2011년 11월 27일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말을 이었다. “다임러는 2013년부터 마이바흐 생산을 중단할 겁니다.”

벤츠가 오늘날 명차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도록 한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빌헬름 마이바흐’였다. 그는 다임러벤츠의 창업자 중 한 사람이었던 고틀립 다임러와 함께 일했다. 마이바흐가 없었다면 다임러 역시 역사 속의 작은 회사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마이바흐 자동차의 기초가 된 마이바흐 DS8, 일명 ‘제플린(Zepplin)’을 완성한 사람도 빌헬름 마이바흐와 아들인 칼 마이바흐였다. 빌헬름 마이바흐가 세상을 떠난 후 칼 마이바흐가 완성한 제플린은 5.5m의 길이로 당시 독일 내 최고급차의 명성을 얻기에 충분했다. 메르세데스-벤츠를 가다듬었던 마이바흐의 손길이 제플린에 녹아들면서 단숨에 최고의 명차 회사로 합류하게 됐던 셈이다.

다임러AG는 마이바흐가 1930년대의 그 찬사를 얻길 바라며 1조3000억 원을 투자했다. 대규모 공장과 비스포크 시스템을 갖췄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연간 1000~1500대 판매를 목표로 잡았지만 실제 판매량은 연평균 200대에 그쳤다. 2011년 애스턴 마틴과 함께 마이바흐를 개발해 보려고 했다. 마지막 시도였다. 하지만 이 역시 무산되면서 폐지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역사를 이끈 자동차 M&A 명장면] ‘젊은 벤츠’…삼각별의 부활 이끈 디터 제체
다임러는 마이바흐 대신 벤츠 S클래스에 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 S클래스의 경쟁력을 키워 BMW부터 롤스로이스까지 대응하겠다는 전략이다. 제체 회장이 이 어려운 임무를 맡긴 사람은 30대의 젊은 디자이너, 고든 바그너였다.

고든 바그너는 1968년 독일 에센에서 태어났고 에센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했다. 이후 영국왕립예술대(RCA)에서 운송 디자인을 전공했다. 1997년 벤츠에 입사해 11년 만인 2008년 벤츠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 올랐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제체 회장의 파격 인사였고 결과는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 세대에서 아들 세대로 고객층이 이동함에 따라 디자인도 20년 젊게 만들어야 했다. 바그너에게 임무를 맡긴 이유다. 그는 수석 디자이너로 부임해 5년 동안 소형 해치백인 A클래스부터 대형 세단 S클래스까지 전 차종에 새 옷을 갈아입혔다. 소비자들은 벤츠의 새로운 모습을 반겼다. 고성능 브랜드인 AMG의 판매량도 함께 늘었다. 벤츠의 판매량은 2012년 220만 대, 2013년 235만 대로 7.1% 늘었다. 2014년은 상반기까지 전년 대비 7.9% 증가세를 기록했다.

벤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폭발적인 성능이다. 대표적으로 AMG와 포뮬러1을 말할 수 있다. 튜닝 업체로 시작한 AMG는 올해 설립 47주년을 맞았다. 1967년 다임러벤츠연구소에서 일하던 한스 베르너 아우프레흐트(A)가 메르세데스-벤츠의 고성능 엔진 개발을 위해 동업자 에버하드 멜커(M)와 함께 그로사스파크(G)에서 회사를 만들며 시작됐다. AMG는 두 창업자의 이름과 지명의 머리글자를 땄다.

AMG는 1971년 300 SEL 6.8 AMG를 내놓았다. 1987년에는 벤츠 300 E 5.6 AMG를 출시했다. 1993년에는 다임러가 AMG 지분의 50% 이상을 사들이며 AMG와의 첫 공동 개발 작품인 C63 AMG를 시장에 출시했다. 같은 해 AMG를 상표로 등록하게 된다. 이후 2005년에 창업자 아우프레흐트가 남은 지분을 모두 다임러에 매각해 AMG는 다임러그룹의 일원이 됐다.


1955년 대참사 악몽을 털어내다
AMG는 품질관리를 위해 ‘1인 1엔진’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한 사람이 하나의 엔진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한다는 것이다. 엔진에는 조립한 장인의 이름과 사인이 들어간다. AMG는 ‘퍼포먼스 50’이라는 미래 성장 전략을 갖고 있다. AMG의 50주년을 맞아 신차 출시와 함께 AMG 퍼포먼스 센터 확대, 경량화를 위한 디자인 전략 등이 포함돼 있다. 이 전략에 따라 중국·러시아·한국·브라질 등 수요가 크게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지역에 AMG퍼포먼스센터도 확충해 나갈 계획이다. 2008년부터 전 세계 24개국에 AMG퍼포먼스센터가 설립됐고 2017년까지 약 350개의 퍼포먼스센터가 완비될 예정이다.

포뮬러 원(F1)을 비롯한 모터스포츠 무대에도 복귀했다. 1955년 6월 11일의 악몽을 잊기까지 40년이라는 긴 기간이 필요했다. 당시 프랑스의 소도시 르망에서 제23회 르망 24시 레이스가 열렸다. 이날 벤츠의 레이싱카 300SLR가 관중석에서 폭발해 드라이버와 관객 80여 명이 사망한 사상 최악의 사고였다.

벤츠는 대참사의 책임을 지고 모든 모터스포츠에서 전면 철수했다.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93년 F1에 엔진 공급사로 다시 모습을 보였다. 2009년 말 챔피언 팀인 브라운 GP를 사들여 워크스팀 메르세데스 GP를 창설했다. 메르세데스 GP팀은 몇 년의 담금질을 거친 뒤 2014년부터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다. 초창기 모터스포츠계에선 은색의 유선형 차체로 서킷을 내달리는 벤츠의 레이싱카를 ‘실버 애로’라고 불렀다. 실버 애로는 벤츠의 전성기의 또 다른 말과 같다. 고든 바그너의 말처럼 “20년은 젊어진” 실버 애로가 다시 질주를 시작하고 있다.


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