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터 출신 콘텐츠 전문가…성실함과 아이디어로 시장 뚫어

[주부, CEO가 되다] 영어 교과서 ‘이러닝’ 꽉 잡은 숨은 강자
김인숙
젤리피쉬월드 대표

그녀의 성공 비결
1. 결혼·출산으로 직장을 떠나더라도 손에서 일을 완전히 놓지 마라
2.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3. 평소 최신 트렌드를 익혀 둬야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다
4. 나와 관계없는 사소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


2008년 당시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는 영어 사교육비를 절감하기 위해 교육과정 개정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 바로 검정교과서다.

민간 출판사가 자체 제작한 영어 교과서는 2009년부터 제작에 들어가 2011년에 첫선을 보였다. 기존 국정교과서와 검정교과서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특히 애니메이션·게임·노래 등을 활용한 ‘이러닝’ 분야에서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재미와 교육 효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특히 교육 출판 기업인 천재교육에서 출간한 3~4학년용 교과서가 인기였는데, 2011년 출시 첫해에 34%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했다. 이후 선보인 5~6학년용 교과서는 점유율이 47%에 달했다. 재미있는 애니메이션·게임·노래·율동·문제풀이 등 경쟁 업체와 비교가 힘든 ‘퀄리티’ 덕분이었다.


디지털 애니메이터로 변신하다
이러닝 교과가 담긴 시디롬을 받아 본 학생이나 학부모는 출판사 이름만 보았겠지만 사실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이끌어 낸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이러닝 전반을 기획·제작한 애니메이션·콘텐츠 전문 기업 젤리피쉬월드가 그 주인공이다.

젤리피쉬월드를 이끌고 있는 이는 김인숙(49) 대표다. 김 대표는 한국이 전 세계 애니메이션의 하청 공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1980년대부터 업계에 발을 디딘 전문 애니메이터 출신이다. 1985년부터 애니메이션 산업에 몸담았으니 올해로 경력 30년에 가까운 최고참급 애니메이터인 셈이다.

“처음 일을 시작한 1985년만 해도 대부분이 외국 만화를 주문 받아 그렸어요. 일일이 수작업으로 작품을 그렸죠. 엄청 호황일 때라 첫 월급이 웬만한 대학 졸업자 월급의 4~5배 수준이었죠.”

학창 시절 ‘미화부장’을 도맡았고 교육감이라도 방문하는 날이면 차트를 쓰느라 수업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던 김 대표에게 애니메이터란 일은 천직이었다. 2000년 들어 결혼과 출산으로 회사를 그만뒀지만 프리랜서로 일하며 완전히 일을 놓지는 않았다.

“경제적인 이유로 2006년부터 다시 직장에 나갔어요. 예전처럼 애니메이터가 각광 받던 시절은 아니었죠. 취업한 회사도 3D 콘텐츠나 플래시 애니메이션 같이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곳이었어요. 하지만 그 덕분에 수작업 위주에서 디지털 애니메이터로 변신할 수 있었죠.”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도 그 사이 큰 변화를 맞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론 중국·인도·베트남 같은 후발 주자에게 하청 시장을 빼앗기며 무너지는 기업이 속출했다. 하지만 산업구조의 변화와 자체 경쟁력을 갖춰 가기 시작된 것도 그즈음이다. 질 높은 국산 창작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디지털화가 이뤄졌다.

“오랫동안 업계에 몸담았고 디지털 환경에도 적응했던 터라 주위에서 창업 권유를 많이 받았어요. 플래시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 5명과 함께 의기투합하게 됐죠.”

2008년 드디어 꿈에 그리던 창업에 나섰다. 첫째 일감부터 창작 애니메이션이 들어왔는데, 기회는 우연히 시작됐다.

“애니메이션 제작 의뢰가 들어왔어요. 좋은 퀄리티를 원하면 어떤 업체가 좋고 제작비는 어느 정도이며 시간과 비용은 어떻게 줄이는지 같은 내용을 정말 자세하게 알려드렸어요. 그런데 얼마 후 그 업체에서 ‘너희가 직접 만들 수 있겠느냐’는 연락이 온 거예요. 신생 업체라 우리에 대해 잘 몰랐을 텐데 말이죠.”

기회를 잡은 비결은 성실함과 꼼꼼함이었다. 애초 의뢰를 받을 때부터 제작을 맡겨올 거란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성의 없는 답변은 성격상 맞지 않았다. 비록 여전히 ‘하청’에 의한 주문 제작이었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캐릭터와 디자인을 독자적으로 수행한 첫 사례가 됐다.
[주부, CEO가 되다] 영어 교과서 ‘이러닝’ 꽉 잡은 숨은 강자
사업을 안정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인 이러닝도 작은 것 하나 흘리지 않는 꼼꼼함에서 시작됐다.

“우린 이러닝 전문 업체가 아니라 주문이 들어오면 재하청을 줬어요. 몇십 만 원짜리 소규모 주문도 많았는데, 우리 쪽에서 비용상 해결이 안 되는 일감이 이러닝 전문 업체에선 며칠 만에 뚝딱 나오는 거예요. ‘애니메이션과 이러닝은 완전히 다른 분야’라는 걸 비로소 알게 됐죠.”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그림의 퀄리티가 최우선 조건이다. 하지만 이러닝은 구조 자체가 달랐다. 그림보다 메시지와 활용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었다. 이러닝 제작을 맡은 하청 업체로선 돈을 버니 좋았고 김 대표는 이러닝 제작 노하우와 시스템을 배울 수 있어 좋았다. 훌륭한 윈-윈 전략이었다.


평소 관심 분야 꾸준히 준비해야
“‘누구에게나 기회는 오지만 준비된 사람만 잡을 수 있다’는 말을 그때 비로소 실감했어요. 지금까지는 하청 업체였지만 이 일을 통해 원청 업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천운이었죠.”

선례가 없는 작업이어서 더 힘들었다. 젤리피쉬월드를 포함해 난다 긴다 하는 메이저 업체까지 총 4곳이 최종 심사에 올랐다. 쟁쟁한 업체를 제치고 결국 살아남은 건 젤리피쉬월드였다. 경쟁사들보다 몇 배는 많은 샘플과 아이디어를 선보인 끝에 얻은 결과였다.

“‘이러닝에 대한 이해는 조금 부족해도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경쟁사보다 훨씬 더 많은 샘플 덕이라는 게 심사 담당자의 말이었어요. 물론 애니메이션의 퀄리티도 한몫했죠.”

젤리피쉬월드의 이러닝 영어 교과서는 업계에서도 단연 화제였다. 출판사 이곳저곳에서 연락이 왔지만 ‘의리’상 배를 갈아타지 않았다. 그 대신 두산동아·미래엔 같은 유명 교과서 출판사와 손잡고 중·고등학생용 교과서를 제작했다.

주요 수익원은 이러닝이지만 애니메이션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다. 2010년에는 서울산업진흥원(SBA)과 카툰네트워크가 주최한 창작 애니메이션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콘텐츠진흥원 공모전에서도 입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KBS에서 방송된 창작 애니메이션 시리즈 ‘키오카’의 2D 버전 제작을 함께하기도 했다. 현재는 2016년 방송 예정인 동물원 소재의 그림자 애니메이션 제작에 열중하고 있다. 그림자를 활용한 본격적인 시리즈로는 국내 최초다.

장기적으로는 애니메이션 학습 애플리케이션 개발에도 나설 계획이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그림과 배경 등을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 진입 자체가 쉽지 않은 분야다. 하지만 이를 애플리케이션으로 제작해 교육적 효과와 산업적 효과를 동시에 잡는다는 콘셉트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