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 부양 카드로 부상한 리디노미네이션…디플레 대응 차원서도 검토할 만

돈이미지
/허문찬기자  sweat@  20100826
돈이미지 /허문찬기자 sweat@ 20100826
2003년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을 추진했던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지금이 리디노미네이션의 가장 적절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물가 상승률이 낮아 인플레이션 우려도 없고 화폐 교체 비용이 오히려 경기 부양에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지금이 적기이고 그 편익과 비용은 얼마일까.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가치 변동 없이 화폐 액면 단위만 바꾸는 것을 말한다. 한국에서 이미 두 차례 실시한 적이 있었다. 1차는 1953년 2월 15일 ‘대통령긴급명령 제13호’였다. 당시 전쟁으로 생산 활동이 크게 위축된 반면 거액의 군사비 지출로 인플레이션 압력과 함께 통화의 대외 가치가 폭락했다.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변경하고 화폐 액면 금액을 100 대 1로 절하했다. 2차 리디노미네이션은 1962년 6월 10일 ‘긴급통화조치법’에 의해 단행됐고 화폐의 액면을 10분의 1로 조정하면서 새로운 ‘원’으로 표시했다. 퇴장 자??쓰지 않고 묵혀 둔 자금)을 양성화해 경제개발 계획에 필요한 투자 자금으로 활용하는 것을 그 이유로 내세웠다.

이번에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면 3차에 해당되는데, 논의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우선 대내적으로 한국 경제 규모가 크게 확대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전체 금융자산이 2010년부터 1경(10,000,000,000,000,000)을 넘어 지난해에는 1경2630조 원에 이르렀다. 규모가 이처럼 크다 보니 조 단위로 발표하고 있다. 거래 단위의 편리성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세 자릿수 환율 국가 거의 없어
대외적으로는 리디노미네이션을 통해 한국의 대외 위상을 제고할 수 있다. 2013년 한국의 교역 규모는 1조 달러를 넘어 세계 9위인데, 달러당 1000원대의 환율은 너무 높다.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작은 대만 통화는 2014년 6월 11일 현재 달러당 30.0대만달러, 싱가포르는 1.25싱가포르 달러, 말레이시아는 3.21링깃 등으로 단위가 낮다. 중국 위안도 달러당 6.23위안 정도다. 한국의 원화 환율도 두 자릿수 이하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 당국자가 리디노미네이션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행할 때 여러 가지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장점은 앞서 살펴본 논의 배경과 같다. 무엇보다 먼저 대외 위상을 제고할 수 있다. 외국인은 달러당 1000원보다 10원일 때 한국의 원화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할 것이다.

다음으로 화폐단위 축소로 거래가 쉬워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수를 부양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한국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35%(GDP 기준)에서 2012년에는 56%(2013년 54%)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54%에서 51%로 하락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현금 지급기 등 다양한 기기와 금융거래 관련 소프트웨어가 변경돼야 한다. 지금 단계에서 그 규모를 쉽게 추정할 수 없지만 상당한 투자와 고용 창출이 있을 것이다.

또한 리디노미네이션으로 어느 정도 지하경제를 양성화할 수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3년 연차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9조 원 정도의 화폐가 발행됐는데, 이 가운데 5만 원권이 7조9000억 원으로 67%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5만 원권의 환수율(한국은행으로 돌아오는 돈의 비율)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5만 원권의 환수율은 49%로 2011년 60%, 2012년 62%보다 훨씬 낮아졌다. 5만 원권 2장 중 1장은 어디엔가 잠적해 있는 셈이다. 물론 이 돈 전부가 지하경제에서 거래되지는 않을 것이다. 개인들이 일상적인 거래를 위??지갑에 넣어 둔 돈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폐단위를 변경해 새로운 통화를 발행하면 사장된 돈이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이런 장점과 달리 리디노미네이션을 했을 때 단점도 있다. 무엇보다 경제 주체가 불안해 할 수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으로 표시되는 재화와 서비스 가격의 단위만 바뀔 뿐이지 재화와 서비스들의 상대가격에 변화가 없다. 이에 따라 각 경제 주체의 소득이나 물가·환율 등 거시 변수에도 실질적 변화는 없다. 그러나 일부 경제 주체가 심리적으로 불안을 느껴 자금을 부동산 등 실물 자산에 투자하면서 이들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오를 수 있다.

또한 화폐단위를 변경하면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한국은행은 새로운 돈을 찍어내기 위해 값비싼 종이를 수입해야 한다. 은행 등 금융회사들은 기존의 기기를 교체해야 하고 여기에 맞은 소프트웨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기업도 생산하는 물건의 가격표를 모두 바꿔야 한다. 단순하게 생각해 중국 음식을 파는 음식점도 메뉴에 적힌 가격을 전부 바꿔야 하기 때문에 일종의 메뉴 코스트를 부담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비용과 편익 중 어느 것이 더 클 것인가에 있다. 그래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3월 인사 청문회에서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시행 시 부작용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라며 “지금 상황에서 상당한 논란과 비용이 불가피한 화폐단위 변경을 추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반대 의견을 표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국내 경제 환경을 고려하면 한국은행 등 정책 당국에서 편익과 비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등 공개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는 리디노미네이션의 편익과 비용을 구체적으로 계산할 능력은 없다. 그러나 거시적 측면에서 볼 때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을 했던 나라들을 보면 대체로 인플레이션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을 더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시작됐던 2008년부터 한국 경제에는 디플레이션 압력이 존재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총생산(GDP)이 잠재 GDP 이하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물가가 매우 낮은 수준에서 안정되고 있다. 2013년 소비자물가가 1.3% 상승하는데 그쳤고 올 들어 5월까지도 1.3%에서 안정되고 있다. 한국은행이 목표로 내세운 2.5~3.5%의 하한선을 벗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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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최근 들어 원화 가치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가 GDP의 6.1%였는데 올해도 4월까지 흑자 규모가 222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150억 달러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 같은 대폭의 경상수지 흑자가 지속되는 한 원화 가치는 더 오를 수밖에 없다.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는 만큼 수입 물가 하락을 통해 소비자 물가는 안정될 가능성이 높다.


주식·부동산 거래 활성화 효과도
이런 상황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은 내수를 부양해 수출 중심의 불균형 성장을 어느 정도 해소해 줄 수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다면 금융거래와 관련된 전산 기기 교체가 필요하고 소프트웨어 수요도 증가해 내수 부양 효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리디노미네이션은 자산 가격을 단기에 높일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삼성전자 주식은 최근 주당 140만 원 안팎에서 거래되고 있다. 만약 화폐단위가 100분의 1로 변경되면 삼성전자 주가는 1만4000원 정도가 된다. 실질적 가격 변화는 없지만 투자자에게는 일단 싸게 보인다. 그래서 삼성전자 주식을 살 수 있다. 또한 9500만 원의 가치가 나가는 부동산이 있다고 하자. 리디노미네이션되면 이 부동산 가격은 95만 원이지만 부동산 거래 관행상 100만 원에 매매가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단기적으로 이러한 자산 가격 상승이 부의 효과를 통해 소비를 증가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산 거래가 활성화하면 여기서 부차적으로 세수 증대도 노려볼 수 있다. 투자와 소비가 늘면 경상수지 흑자도 자동적으로 줄어든다. 그러면 시장에서 원화 가치 상승 압력이 줄고 더 크게는 한국 경제가 디플레이션 압력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정책 당국이 리디노미네이션을 적극 검토할 시기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