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유치 때부터 투자하는 싱가포르, 정부·기업·대학 유기적 연계 나서

[한국은 인재 전쟁 무방비] 낮아진 인재 국경…국가 차원 유치 총력전
현재 독일의 폭스바겐 본사에는 4명의 한국인 클레이 모델러가 있다. 클레이 모델러는 자동차 디자인 스케치를 바탕으로 입체적인 자동차 모형을 형상화하는 일이다. 독일에는 200~250명의 모델러가 활동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극소수의 한국인이 활동하고 있는 직업이다.

독일에서 외국인 모델러는 5년 차 이상 경력자를 고용하는 시스템이지만 황정수 씨는 파격적으로 경력 1년 차임에도 폭스바겐에 영입됐다. 황 씨는 한국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다가 군대 제대 후 자동차 디자인에 꿈을 품고 미국 디트로이트에 있는 예술학교에 편입했다. 그곳에서도 자신만의 특별한 포트폴리오를 만들면서 실력을 키워 나갔다.


기회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
졸업반이 됐을 때 황 씨는 국가를 따지지 않고 큰 회사, 작은 회사 상관없이 100군데가 넘는 회사에 지원했다. 그중 두 곳에서 면접할 기회가 있었고 3시간 동안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테스트를 받았다. 결국 황 씨는 크라이슬러에서 취업 통보를 받았다. 이에 따라 그는 크라이슬러에서 한국인 최초 모델러로 활동하게 됐다. 황 씨는 크라이슬러와 계약했지만 이후 도요타와 폭스바겐에서도 더 좋은 작업 환경과 보수를 제시해 왔다. 크라이슬러에서 일한 지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취업 비자(H1B) 접수에 문제가 생겨 그는 미국에서 더 이상 근무할 수 없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빠졌다. 이 때문에 접촉이 있었던 다른 자동차 제조사에 이런 상황을 알리자 폭스바겐에서 바로 응답이 왔다. 황 씨는 “독일에서의 비자 문제도 해결해 주고 보험과 급여도 훨씬 좋은 조건이었다”고 말한다.

현재 독일 폭스바겐에서 활약하고 있는 황 씨는 작업과 관련해 한국인만의 정교함과 열정으로 경력 15년 차 영국인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 독일에서 경력이 쌓일수록 그는 더 많은 혜택과 좋은 대우가 보장돼 있다. 일례로 5년 이상 근무하면 영주권을 자동적으로 받는 혜택으로 비자를 갱신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는 자신이 만든 차가 세계를 누빈다는 자부심으로 독일 기업과 국가의 중요한 인재로 활약하고 있다.

황 씨와 같이 실력과 기술을 갖춘 고급 인재들에게 국경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소득·지위·성장 기회·비전 등에서 더 낳은 조건을 제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활발하게 이동하고 있다. 각국 정부와 기업들은 고급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다양한 혜택을 제시하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글로벌 경쟁 무대에서 고도의 지식과 기술로 무장한 인재를 확보하지 못하면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전문 지식과 탁월한 기술을 가진 엔지니어·기술자·연구원에 영주권을 부여하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외국 인재에 포인트제로 계층 분류해 우수한 인재를 우대하는 영국, 고급 인력에 대해 출입국 관리상 우대 제도를 도입한 일본 그리고 한국도 전문 분야에 따라 골드 카드, IT 카드, 사이언스 카드 등을 발급해 비자 유효기간을 연장하는 등의 방법으로 고급 인재를 정책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그야말로 세계 인재 전쟁이다.

특히 인구가 적다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국제도시로 빠르게 성장하는 싱가포르의 인재 유치 정책을 주목할 만하다.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에 힘입어 싱가포르의 난양기술대(NTU)·싱가포르국립대(NUS)·싱가포르경영대(SMU)는 세계적 수준의 대학으로 성장했다. 난양기술대의 유학생 합격률은 불과 8~9% 정도지만 중국·인도·말레이시아 등의 아시아 고급 인재들이 몰려들고 있다. 유학생은 학비가 연간 2000만 원 정도지만 이 중 절반을 싱가포르 정부가 장학금으로 보조해 준다. 그 대신 정부 보조금을 받은 유학생은 졸업 후 3년간 싱가포르에서 일할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주요 3개 대학을 졸업한 유학생들은 대부분이 이 제도를 받아들여 싱가포르 기업에 취업하고 싱가포르에 정착하는 사례가 많다. 즉, 대학·정부·기업의 유기적 연계를 통해 고급 인재 유치에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단순히 외국인 유학생과 노동자를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고급 인재 중심으로 대학에서 걸러 유치하고 자국의 산업 발전을 위한 기반으로 삼고 있다. 싱가포르는 국토도 좁고 천연자원도 없으며 저출산으로 2030년 인구 690만 명이 예상되고 있다. 싱가포르에는 ‘인재’야말로 유일한 자원이다.

하지만 ‘외국인이라면 무조건 환영’은 아니다. 싱가포르는 같은 외국인 인력이라도 ‘PMET(전문기술직·관리직·특별 기술자)’를 ‘매뉴얼 워커(미숙련 노동자)’로 구분하고 고급 인재를 더 우대하고 있다. PMET 해당자에게는 ‘E패스’라는 취업 비자가 주어진다. E패스를 가진 외국인에게는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진다. 영주권을 취득하기가 쉽고 싱가포르 내 회사를 그만둬도 싱가포르에 남아 생활하면서 구직 활동을 할 수 있다. 정부는 한 번 유입한 외국인 고급 인재를 잃지 않겠다는 의지다. PMET 중에서도 능력이 높다고 인정되는 ‘P패스’는 전문가와 관리자 등의 고급 인력에게 주어지는 취업 비자로 2개의 순위로 나눠져 세분화돼 있다. 월급·학력·전문기술·직종·경력 등을 심사한 후 발급 여부가 결정된다.
[한국은 인재 전쟁 무방비] 낮아진 인재 국경…국가 차원 유치 총력전
반면 매뉴얼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WP는 취업 비자, 고용 인원 및 국적인 업종별로 정해져 있어 고용하는 기업은 보증금이나 고용 세금을 내야 한다. 국내 인력으로 충당 가능한 단순노동직은 자국민의 고용 보호를 위해 외국인 유입을 막겠다는 것이다.


한국, 뒤늦게 해외 인재 확보 나서
유전자 연구로 유명한 최근 싱가포르의 연구 시설로 옮긴 한 연구원은 “사실 에이스급의 비즈니스맨이 세계무대에서 싱가포르에 모여 있다”며 “세계 유수의 기업들도 싱가포르로 몰리고 있어 우수 인재들이 모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글로벌 고급 인재 들뿐만 아니라 글로벌 기업도 싱가포르 정부의 세제 혜택 등으로 다른 도시보다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인재 전쟁 가운데 국내 상황은 어떨까. 국내 유수의 기업과 연구 기관들은 글로벌 고급 인재에 목말라 하지만 정부·국내 대학과의 체계적인 연계는 부족한 편이다. 최근 국내 대학들은 경쟁적으로 외국인 유학생을 늘리고 있지만 국제 수준급 인재를 확보하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국내에 유학와 학업을 떠나 비숙련 노동자로 일하려는 중국인 유학생 등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 밖에 국내 대기업의 인재 등용은 국내 모집과 해외 모집으로 이원화돼 있다. 대기업들은 글로벌 인재 확보에서 미국 등 주요 선진국 명문대를 중심으로 석·박사급 인재를 리크루팅하는 방식에 집중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해외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오는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제4회 현대 글로벌 톱 탤런트 포럼’을 열고 석·박사급뿐만 아니라 경력 사원까지 현지 채용할 계획이다. 대기업은 해외 리크루팅 역량이 있지만 벤처나 중소 정보기술(IT) 기업은 직접 해외 채용이 어려워 글로벌 인재 유치 경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다. 이 때문에 국가적으로 글로벌 고급 인재의 새싹을 국내에 유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나름대로 지난 1월 ‘해외 우수 인재 유치 및 활용 방안’을 확정 발표했다. 늦게나마 고급 인재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좋지만 정부·대학·기업이 모두 따로 움직이고 있는 듯한 엇박자다.

실력보다 학벌과 스펙 중심으로 획일적인 기업 문화 그리고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연구 환경 등으로 국내 인재가 한국을 떠나고 있다. 또한 세계 최고급 인재가 한국행을 결정짓는 데도 여러 제한이 많다. 국가 인재 개발 전략과 유치 정책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