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을 공개당하기보다 적당한 수준까지 진급하고 편히 사는 것을 택하는 임원들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경영을 잘하는 사람보다 대중 설득에 능한 정치적 경영자들이 득세할 가능성도 있다.


김정호 프리덤팩토리 대표·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1956년생. 1979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1988년 미국 일리노이대 경제학 박사. 2000년 숭실대 법학 박사. 1990년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1997년 자유기업센터 법경제실장. 2004년 자유경제원 원장.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현). 프리덤팩토리 대표(현).


얼마 전 공개된 대기업 등기 임원들의 연봉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꼈다. 특히 월급쟁이 임원들의 연봉을 보면서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봉이 적으면 수억 원에서부터 많은 사람은 67억 원이나 된다. 이 정도의 소득이면 월급쟁이라고 하더라도 웬만한 중견기업 오너들보다 낫다.

고용된 경영자들이 이처럼 고액의 연봉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원래 한국 기업들의 봉급 체계는 연공서열식으로, 근무 연수에 따라 호봉이 올라가는 식이었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부터였다.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기업들이 저마다 앞다퉈 성과급·연봉 제도로 전환하기 시작했고 고액 연봉을 받는 경영자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공서열제의 직장에 취직해서는 부자가 될 수 없었다. 아무리 경영 능력이 뛰어나도 튀는 연봉을 받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월급쟁이 임원들 중에서도 힘 있는 사람들은 뒷돈을 챙기거나 회사의 내부 정보로 땅 투자를 해서 돈을 벌곤 했다. 큰돈을 벌려면 자기 사업을 해야 했다. 자기 사업은 실패할 가능성도 높지만 성공하면 큰 부자가 될 수도 있다.

보수는 능력 발휘의 인센티브가 되기도 한다. 권오현·윤종용·황창규 같은 스타 최고경영자(CEO)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보수 체계와도 상당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봉급이 연공서열이면 능력 발휘를 할 이유도 없어진다. 월급쟁이 경영자들 중 걸출한 기업가를 찾기 어려운 것도 연공서열식의 보수 체계가 직장인들의 기업가 정신을 눌러 놓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고액 연봉을 받을 수 있는 풍토가 월급쟁이들로 하여금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스타 CEO들이 나온 것은 아닐까.

필자 같은 사람이 보기에 월급쟁이 임원이 고액 연봉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계층 이동성을 높일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전문 경영인의 출현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액 연봉이 질투의 대상이다. 등기 임원의 5억 원 이상 보수를 의무적으로 공개하게 한 것은 그런 질투를 제도화한 결과일 것이다.

연봉 공개 제도는 고액 연봉 임원들에게 큰 부담을 지울 것이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소득이나 재산을 잘 공개 하지 않는 이유가 뭐겠는가. 그런 것들이 알려지면 돈 낼 일이 있을 때 적당히 둘러대기가 어려워지고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쓰는지 설명해야 할 심리적인 부담감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등기 임원들은 온 세상에 소득을 공개하게 됐으니 그들이 느끼는 심리적·경제적 부담은 무척 클 것이다. 프라이버시가 사라지는 만큼 그들의 실질적 소득수준이 낮아지는 셈이기도 하다.

걱정되는 것은 모처럼 자리 잡아 가고 있는 전문 경영인 체제, 월급쟁이 중에서도 스타 CEO가 나오는 풍토가 위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소득을 공개당하기보다 적당한 수준까지 진급하고 편히 사는 것을 택하는 임원들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경영을 잘하는 사람보다 대중 설득에 능한 정치적 경영자들이 득세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원해 본다. 한국에서도 미국처럼 월급쟁이를 해서 세계적 경영자가 되고 돈도 수백억 원을 버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