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서스, 벤츠를 놀라게 하다…‘히노’·‘다이하쓰’·‘사이언’ 브랜드 가세
1983년 8월 일본 도요타 본사 회의실. 한자리에 모인 임원들 사이엔 긴장감이 흘렀다. 이윽고 도요다 에이지 회장이 모습을 보였다. 도요타의 창립자인 사키치의 조카인 그는 당시 회사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이날 회의의 핵심 주제는 ‘프리미엄 브랜드 설립’이었다. 임원들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도요타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이들도 있었지만 천문학적인 투자비용과 낮은 성공 가능성 등 회의적인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말없이 임원들의 의견을 경청하던 도요다 에이지회장이 입을 열었다.“이제 도요타는 더 높은 성장을 위해 메르세데스-벤츠와 같은 고급 브랜드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도요타의 프리미엄 브랜드 프로젝트, 추진합시다.”
도요타의 프리미엄 브랜드 설립을 위한 극비 프로젝트 ‘F-1(플래그십 넘버원)’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이날 이후 도요타는 이전 50년 역사와 다른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됐다. 당시 세계 최대 시장이었던(그리고 지금도 세계 최대 시장 중 하나인) 미국 고급차 시장을 점령한 ‘렉서스’의 설립 배경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렉서스의 등장은 값싸고 품질 좋은 자동차를 만들던 도요타를 메르세데스-벤츠·BMW와 맞붙을 수 있는 위치까지 올려놓았다.
벤츠 성능에 가격은 절반 수준
이와 함께 도요타는 195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히노·다이하쓰·사이언(SCION) 등 다른 브랜드들을 연이어 인수 및 설립하면서 ‘도요타 제국’의 외형을 확장했다. 하지만 인수·합병(M&A)에 적극적이었던 폭스바겐그룹과 제너럴모터스(GM)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도요타는 렉서스와 사이언 등 브랜드 신규 설립도 수년에 걸쳐 신중하게 추진했다. 히노와 다이하쓰 인수 역시 이들 업체의 제안을 받고 나서야 검토를 시작했을 뿐 먼저 나서지 않았다. 도요타 특유의 보수적인 기업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신시장 개척과 기술 개발 등에 대해선 180도 달랐다. ‘판매의 도요타’라고 불릴 만큼 공격적인 시장 확대 전략을 추진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 경주인 ‘포뮬러원(F1)’과 프랑스 ‘르망 24 레이스’ 등에 참가하며 유럽 브랜드들과 치열한 기술 경쟁을 벌였다. 이런 과감한 실행 뒤에는 도요타 역사상 가장 훌륭한 경영자로 꼽히는 도요다 에이지 회장이 버티고 있었다. 그는 도요타자동차를 설립한 기이치로가 사망한 후 장남인 쇼이치로가 경영권을 잡기 전까지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주역이었다.
에이지 회장의 결단 이후 렉서스가 대중 앞에 등장하기까지는 6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됐다. 전례 없던 프로젝트인 만큼 도요타 경영진은 볼트 제작 하나부터 차량 개발, 판매망 구축까지 치밀하게 준비해야 했다. 소비자 조사에만 3년이 걸렸고 브랜드 론칭까지 총 10억 달러가 투입됐다. F-1 프로젝트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비결은 ‘벤츠에 비견되는 품질과 성능, 벤츠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었다. 1989년 등장한 LS400의 가격은 3만5000달러였다. 동급 차종인 벤츠 420SEL 가격(6만1000달러)의 57.4% 수준이었다. 소비자들은 3만 달러 미만이었지만 품질도 형편없었던 링컨과 캐딜락 대신 렉서스에 쏠렸다. 렉서스는 1990년 4만2806대가 판매됐고 매년 2만~3만 대 이상 꾸준히 판매되며 미국 고급차 시장점유율 10%를 넘어섰다. 그리고 1999년 고급차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며 2011년 BMW에 자리를 내줄 때까지 내리 11년 연속 1위 자리를 지켰다. 뉴욕타임스 대표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렉서스는 현대적 세계화 시스템의 대표 명사로 묘사될 정도로 미국 내 고급차의 대표 아이콘이었다. 현대차가 제네시스를 미국 시장에 출시하며 ‘BMW 5시리즈급의 성능, 3시리즈급의 가격’으로 마케팅 전략을 짠 것은 렉서스의 성공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기도 하다.
도요타는 렉서스 설립 이전에 단 두 개의 브랜드만 도요타그룹 내에 편입했다. 그것도 완전한 편입이 아니라 제휴 방식을 택했다. 1965년 10월 도요타는 히노자동차와 업무 및 자본 제휴를 발표했다. 히노는 당시 프랑스 르노와 기술 제휴를 맺고 소형차 ‘르노 4CV’를 조립 생산(CKD)해 판매하고 있었으며 이 기술을 바탕으로 컨테서(contessa)도 개발해 내놓았다. 하지만 판매 실적 저조로 경영난에 빠졌다. 히노의 주거래은행인 미쓰이은행은 이런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은행은 도요타의 주거래은행이기도 했다. 미쓰이은행의 사토 기이치로 회장은 당시 도요타의 최고경영자(CEO)인 이시다 다이조 사장과 친분이 두터웠다. 사토 회장은 이시다 사장에게 히노 인수를 제안했다. 이시다 사장은 이에 대한 협상 책임자로 도요다 에이지 당시 부사장을 임명했다.
적자투성이 ‘히노’ 인수 묘책은 자본 제휴
에이지 부사장은 적자투성이였던 히노 인수에 부정적이었다. 게다가 컨테서는 도요타 코롤라와 경쟁 차종이었다. 자칫 ‘제 살 깎아 먹기’가 될 수도 있었다. 이를 눈치 챈 마쓰카타 미쓰노부 히노 사장은 1965년 봄 에이지 부사장에게 놀라운 제안을 했다. “컨테서의 생산을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에이지 부사장에게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해 회사를 살리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에이지 부사장은 여전히 ‘OK’ 사인을 보낼 수 없었다. 합병은 도요타의 재무 상황 악화를 불러일으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점금지법으로 인해 두 회사의 합병이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할 가능성도 높았다. 에이지 부사장은 묘안을 짜냈다. 도요타를 지키면서 히노의 요구도 만족시키는 것, 바로 업무 및 자본 제휴였다. 출자 비율을 5%로 제한하고 히노에 소형 트럭을 위탁 생산하기로 했다. 에이지 부사장은 승용차 사업을 버린 마쓰카타 사장에게 한 가지를 강조했다.
“도요타는 일본에서 가장 큰 자동차 회사입니다. 우리와 제휴한 이상 트럭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 합니다. 2, 3위에 만족한다면 히노의 미래는 불투명해질 겁니다.”
마쓰카타 사장은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히노의 트럭 생산에 전력투구했고 시장은 판매량 상승으로 화답했다. 이후 도요타는 아주 천천히 지분율을 높여 나갔다. 2000년 3월 지분율을 20.1%로 늘려 경영권을 공고히 했으며 이듬해인 2001년에는 50.1%까지 확대했다.
도요타와 히노의 제휴 협상 발표는 또 다른 제휴 협상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와타나베 다다오 산와은행(현재 미쓰비시도쿄UFJ) 은행장이 히노의 소식을 접한 직후 에이지 부사장에게 다이하쓰와의 제휴를 제안한 것이다. 산와은행은 다이하쓰의 주거래은행이었다. 에이지 부사장은 당황했다. 다이하쓰는 히노와 달리 좋은 실적을 내는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은 당시 일본 내 자동차 업계가 재편 과정을 거치면서 다이하쓰에도 위기감이 조성된 것으로 분석된다. 도요타와 히노의 제휴에 앞서 닛산과 프린스자동차도 합병되는 등 기업들 간의 M&A를 통한 몸집 불리기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당시 일본 자동차 업계 최강자인 도요타와 거래를 희망하는 산와은행의 의지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다이하쓰 역시 승용차를 생산하고 있었고 도요타와 경쟁 중이었다. 에이지 부사장은 히노와 같이 다른 차종 생산을 중단하고 도요타가 만들지 않던 경차 생산에만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이시 유지 다이하쓰 사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서로 한 발씩 양보했다. 다이하쓰가 경차 생산에 집중하되 소형 승용차도 계속 생산 및 판매하기로 한 것이다. 도요타는 그 대신 다이하쓰의 지분 6%를 사들였다. 두 회사의 제휴는 히노와의 제휴 발표 후 불과 3개월 만인 1967년 1월에 이뤄졌다. 이 제휴로 산와은행은 짭짤한 중개 수수료와 함께 도요타의 주거래은행 중 하나로 입지를 굳혔다.
사이언으로 미국 젊은층을 파고들다
도요타는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기업 문화를 갖고 있다. 회사를 설립한 도요다 가문이 현재까지 대를 이어 CEO를 맡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만큼 동질성을 중요시 여기며 다른 경쟁 업체들과 달리 M&A를 통환 성장을 지양한다. 필요하다면 100% 자회사를 세운다. 1990년대 말 실질적으로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던 히노와 다이하쓰의 지분율을 대폭 높인 것도 협력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시 다른 자동차 업체들이 두 회사의 경영 부실을 틈타 일부라도 지분을 인수하고 들어올까봐 두려워서였다.
이런 도요타가 2003년 ‘사이언’을 설립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목적은 명료했다. 미국의 젊은이들을 겨냥한 값싸고 재미있는 브랜드였다. 도요타는 2005년 글로벌 시장에서 709만 대를 판매해 포드를 제치고 GM에 이어 세계 2위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 이런 도요타에 고민이 하나 있었으니 구매 연령층의 고령화였다. 당시 미국 최대의 고객층은 1940~1950년대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였다. 이들 40~50대는 미국 전체 인구의 29%(820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의 현역 은퇴는 자연스레 자동차 구매 감소로 이어지고 도요타의 판매 위축으로 이어질 게 뻔했다. 이에 따라 도요타는 1970~1990년대에 태어난 ‘Y세대’로 눈을 돌렸다. 이들 역시 인구 비중이 26%(7300만 명)로 에코붐 세대로 불렸다. 10년 후에는 베이비붐 세대 이후 가장 강력한 소비 집단이 될 것으로 보였다. 사이언이라는 브랜드는 이렇게 태어났다. 대당 1만5000달러 안팎의 저렴한 가격과 깔끔한 디자인, 운전의 즐거움(수동 변속기) 등을 갖춘 소형차 ‘xA’와 박스카 ‘xB’를 2003년 출시했고 목표치(1만 대)를 웃도는 1만898대를 팔았다. 이듬해 소형 세단 ‘tC’를 추가하며 10만 대를 넘어섰다. 하지만 설립 10주년을 맞은 지난해 판매 실적은 4323대로 쪼그라든 상황이다. 아무리 ‘판매의 도요타’라고 하더라도 값싸고 질 좋은 차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미국 시장에서 사이언이 자리 잡기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사이언의 부진을 ‘도요타 왕국’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하다. 왕국의 팽창은 멈출 줄 몰랐다. 다양한 브랜드들로 가지를 늘려 시장 장악력을 높여가면서 비밀스럽게 친환경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1997년 전 세계 자동차의 역사를 뒤흔든 자동차 한 대를 내놓았다. 세계 첫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였다.
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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