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들이 세운 신생 기업 300여 개…알토대 ‘벤처 요람’으로 재탄생

기획 연재 창조 경제 시대, 기업가 정신이 희망이다⑤
[SPECIAL REPORT] 노키아 공백, 스타트업이 책임진다
‘스타트업은 가장 강력한 성장 동력이다.’ 핀란드가 이 말을 증명하고 있다. 스마트 게임 ‘앵그리버드’를 빅 히트시킨 ‘로비오’가 태어난 나라가 바로 이곳이다. 노키아의 몰락에도 흔들림 없이 스타트업 강국으로 떠오른 핀란드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답은 ‘젊은이들의 창업 문화-대학·정부 플랫폼-전문성을 가진 기업가들의 조합’이 만들어 낸 창업 생태계에서 찾을 수 있다.



“핀란드 대학생들의 꿈은 노키아에 입사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노키아가 몰락하면서 생각의 혁명이 일어났고 이제는 직접 꿈을 만들려는 젊은이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핀란드의 대표 액셀러레이터인 ‘스타트업 사우나’에서 만난 티나 리우코넨 스타트업 사우나 홍보 담당자의 말이다. 그는 핀란드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벤처들의 등장에 대해 “노키아의 몰락은 충격적이었지만 그 대신 창업 열기가 뜨거워졌다”며 “젊은이들도 대기업 입사라는 평이한 삶보다 열정적인 도전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실제로 10년 전에는 2% 정도만 졸업 후 창업하고 싶다고 했지만 지금은 4분의 1이 창업을 꿈꾼다”고 전했다.

핀란드 경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글로벌 대기업인 노키아에 의존하고 있었다.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가량을 노키아 1개 기업이 담당할 정도였다. 그러다 2007년 이후 노키아가 스마트폰 경쟁에서 삼성·애플에 밀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15년 만에 첫 영업 적자를 기록한 노키아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핀란드는 이 같은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핀란드 정부는 노키아 출신 엔지니어들을 스타트업 생태계로 불러들였다. 이를 두고 “‘노키아 살리기’보다 ‘스타트업 붐’을 택한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많았다. 리우코넨 홍보 담당자는 “실제로 노키아의 몰락을 계기로 핀란드에는 스타트업 기업이 급증했다”며 “노키아의 몰락은 잠자고 있던 핀란드인들의 열정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앵그리버드·슈퍼셀 등 성공 신화 이어져
핀란드 정부는 기술혁신투자청(TEKES)을 통해 노키아 직원의 창업을 돕는 ‘이노베이션 밀’이란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 결과 노키아 퇴직자들이 세운 신생 기업이 300여 개에 달했다. 사실 정부의 노력은 이미 30여 년간 지속돼 왔다. 1984년부터 TEKES는 벤처 캐피털 펀드인 ‘핀베라(Finnvera)’를 통해 다양한 스타트업의 성장을 지원하고 있다. 핀베라는 기금 약 26억 유로(약 3조7500억 원)로 매년 벤처기업 3500여 개를 지원해 새 일자리 1만여 개를 만들고 있다. 앵그리버드의 주인공 ‘로비오’와 노키아 직원들이 만든 ‘욜라’, 매출 1조 원을 돌파한 모바일 게임 회사 ‘슈퍼셀’ 등이 이들 기업 중 하나다.


“젊은이들도 대기업 입사라는 평이한 삶보다 열정적인 도전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실제로 10년 전에는 2% 정도만 졸업 후 창업하고 싶다고 했지만 지금은 4분의 1이 창업을 꿈꾼다.”


핀란드 정부는 창업 지원을 위해 대학 개편도 단행했다. 각기 다른 전공의 학생들이 모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고 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게 정부의 취지였다. 정부는 1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헬싱키공대·헬싱키경제대·헬싱키예술디자인대 등 3개 대학을 통합해 2010년 ‘알토대’를 만들었다. 벤처 육성의 ‘요람’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알토대 안에서 창업과 관련한 정부 역할은 축소됐다. 스타트업의 실제 주체인 젊은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나선 것이다. 핀란드 스타트업 생태계의 문화를 이끌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은 어떤 활동을 펼치고 있을까.

먼저 핀란드의 대표적 액셀러레이터로 꼽히는 스타트업 사우나가 있다. 예비 창업자들 사이에 ‘우호적인 투자사’로 불리기도 하는 스타트업 사우나는 알토대 학생들의 창업 동아리 ‘에이알토에스(AaltoES)’를 주축으로 성장했다. 2010년 설립된 이후 120명 정도의 파트너급 투자사들의 예산을 지원받아 예비 창업자들을 돕고 있다.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하는 회사 창업을 희망하는 ‘모든 국적의 청년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게 리우코넨 홍보 담당자의 설명이다.
[SPECIAL REPORT] 노키아 공백, 스타트업이 책임진다
[SPECIAL REPORT] 노키아 공백, 스타트업이 책임진다
“스타트업 사우나의 지원을 받는 예비 창업가들의 경우 학생들이 10명씩 팀을 구성해 1년 동안 협력해 실제 제품을 만들어 냅니다. 기업의 후원으로 팀당 1만5000유로(약 2114만 원)를 지원받아 활동을 시작하는데, 어떤 기능(기술)을 넣어 어떤 모습(디자인)으로 만들어 어떻게 시장에 팔 것인지(경영)를 고민합니다. 분야는 주로 정보기술(IT)을 접목한 헬스 케어, 라이프스타일 관련 시스템 등 다양하고요. 이곳에서 사실상 벤처 창업을 경험하는 것이죠.”


젊은 청년들이 주도하는 스타트업 문화
특히 스타트업 사우나가 예비 창업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는 이곳 출신 스타트업의 유지율이 일반 창업 기업에 비해 15% 가까이 높은 데다 후속 투자 유치율도 60~70%에 이르기 때문이다. 슈퍼셀을 비롯해 기타 교육 애플리케이션(앱) 세계 1위를 달리는 오벨린(Ovelin) 등 최근 핀란드의 스타트업 성공 신화에는 모두 스타트업 사우나가 함께하고 있다.

리우코넨 홍보 담당자는 “스타트업 사우나의 가장 고무적인 일은 스타트업 사우나를 통해 성공한 기업가들이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그들이 가진 노하우나 재원을 다시 베푸는 선순환 구조가 조성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처럼 이곳을 통해 성공한 사업가 100여 명은 스타트업 사우나의 코치로 활동하며 예비 창업자 또는 현직 창업자들을 만나 멘토링을 해주고 있다. 슈퍼셀 창업자인 아이카 파나넨 최고경영자(CEO) 역시 멘토 활동에 적극적이다. 그는 지난해 스타트업 사우나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실패한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가능성을 집중 공략하라”고 조언했다. 이어 “투자가·주주 등의 단기 이익과 회사의 발전 방향이 배치된다면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며 기존 기업 구조와 환경이 회사의 발전을 저해할 때도 과감한 변화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잘 만들어 낸 스타트업의 홍보 역시 스타트업 사우나의 역할 중 하나다. 대표적인 행사로는 2008년부터 열린 ‘스타트업 슬러시(Slush)’가 있다. 이는 글로벌 창업 콘퍼런스로, 전 세계 스타트업과 벤처 캐피털, 엔젤 투자자, 언론인을 한자리에 모아 이들에게 신생 기업을 알리는 행사다. ‘국제적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지난해 열린 행사에는 약 60개국으로부터 5000여 명의 예비 창업자와 1200개 기업이 참가했다. 2012년 3500명의 예비 창업자, 550개의 기업이 참석한 것에 비해 두 배 정도 늘면서 슬러시는 유럽 최대 창업 관련 교류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리우코넨 홍보 담당자는 “슬러시는 핀란드 전반에 걸쳐 스타트업 붐을 일으킨 주요 요소다. 이 행사장에서는 다양한 창업 관련 정보, 노하우 습득뿐만 아니라 투자, 사업 제휴, B2B 판매 등 사업과 관련,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안타깝게도 아직 슬러시에 한국 스타트업이 참가한 적이 없지만 많은 참가 기업들과 투자자들이 한국의 게임 또는 IT 관련 회사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스타트업 사우나는 이 밖에 세계 벤처 허브에 있는 스타트업들과 핀란드 내의 능력 있는 인재들을 연결해 주는 인턴 파견 프로그램 ‘스타트업 라이프’, 세계 기업 및 투자자를 대상으로 네트워킹 행사를 여는 ‘데모 데이’ 등을 열며 창업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이지형 KOTRA 핀란드 헬싱키 무역관장은 “핀란드 스타트업 생태계의 성공에는 대학(교육, 자금 지원, 스타트업 원천)과 정부 기관(다양한 자금 지원)이 제공하는 플랫폼, 생태계 에너지원으로서의 젊은 기업가들이 가진 재능, 엔젤 투자자나 벤처 캐피털, 경험 있는 기업가들이 가진 전문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엇보다 핀란드식 액셀러레이터인 ‘스타트업 사우나’와 창업 콘퍼런스인 ‘슬러시’가 창업 문화와 창업자 간 교류·협업을 위한 네트워킹을 극대화하는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창업에 성공한 스타트업은 노키아의 본거지였던 핀란드의 오울루테크노폴리스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북유럽 최초의 사이언스파크이면서 핀란드 경제성장의 엔진 역할을 했던 곳으로, IT 산업 중심으로 한 미디어·바이오·환경 콘텐츠의 복합 클러스터로 조성됐다. 최근 이곳은 노키아의 휴대전화 부문을 인수한 마이크로소프트(MS)의 데이터센터 설립 1순위 후보지 물망에 오르고 있다.

이지형 관장은 기업들이 오울루테크노폴리스에 몰리는 이유에 대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연구 기관이 있고 인재를 찾기 쉽다는 환경적 요인이 크다”며 “대학·연구소·기업 등 오울루테크노파크를 구성하는 다양한 주체들과 유기적인 협조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피카 소메르토 발키 CEO 인터뷰
[SPECIAL REPORT] 노키아 공백, 스타트업이 책임진다
“고유 테마와 핵심 경쟁력을 확보하라”

핀란드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우울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품이 등장했다. 스타트업인 발키(Valkee)가 개발한 ‘LED 이어폰’이다. 겉으로 보기엔 MP3 플레이어와 유사하게 생겼지만 이어폰을 통해 소리가 아닌 밝은 빛으로 충분한 햇빛을 받지 못해 발생하는 질병인 계절성 정서장애(SAD:겨울 우울증)를 치료한다.

피카 소메르토 발키 최고경영자(CEO)는 “매일 6~12분씩 발키를 사용하면 외이도를 통해 빛을 쬐는 것과 같은 유사한 자극을 뇌에 전달함으로써 피로감을 상당 부분 완화해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핀란드인들은 그동안 계절성 정서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약물치료, 서유럽 및 동남아 등 따뜻한 나라로의 휴가 여행, 비타민 D가 함유된 건강보조식품 섭취 등 다양한 치료와 예방을 해왔다. 심지어 집이나 사무실에 18인치 TV만한 발광다이오드(LED)판을 두고 그 앞에 30분 이상 가만히 앉아 LED 빛을 쬐기도 한다. 발키의 창업자인 주소 니실라와 안티 우니오는 이런 치료 방법을 하나로 해결하고 싶었다. 발키는 오울루대에서 심박측정기를 연구한 주소 니실라와 제너럴일렉트릭(GE)·필립스의 헬스케어사업부에서 엔지니어로 활동한 안티 우니오가 개발했다. 소메르토 CEO는 창업 이후 투자 요청이 쇄도하자 경영을 담당하기 위해 임명됐다. 세일즈&마케팅의 고수로, 전 노키아 부회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지난 3월 중순 헬싱키 시내의 발키 사무실에서 만난 소메르토 CEO는 “2010년 핀란드의 투자자 그룹인 라이프라인 벤처 등 벤처 캐피털을 통해 40만 유로를 지원받아 제품 판매를 시작했으며 작년까지 모두 5만5000개를 파는 데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발키가 각광받게 된 비결은 안정성과 치료 효과에 있다. 2009년 한 달간 오울루대 연구진이 발케 제품을 SAD 환자 13명에게 임상 실험한 결과 1명을 제외하고는 치료 효과를 경험했고 10명은 완치됐다. 유럽연합(EU)의 적합성과 안정성 평가를 모두 통과했으며 유럽 의료기기 2등급 CE 인증도 획득했다. 믿을 만한 제품으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발키의 주요 시장은 핀란드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지역과 영국·독일·일본 등 총 20여 개국으로 늘었다.

“발키가 자체 조사한 결과 사용자의 87%가 지인에게 추천하는 것으로 확인돼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년 4월부터 핀란드 대표 항공사인 핀에어를 통해 비행 시차 증후군과 생체리듬 장애를 겪는 승객에게 제공되고 있고요.”

이러한 행보에 힘입어 발키는 올 들어 기존 투자자 그룹 외에 새로운 익명의 글로벌 펀드가 더해져 740만 유로의 자금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인지도 향상뿐만 아니라 시차 증후군·인지력·우울증 치료에 기반한 임상시험 확장에 힘쓰고 있다.

“각종 사회현상으로부터 아이디어를 발굴해 전 세계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제품 개발이 필요합니다. 사회현상을 잘 분석해 그에 맞는 고유한 제품을 개발한 것이 발키의 성공 요인이죠. 여기에 더해 LED의 활용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었던 핵심 경쟁력이 됐어요. 중요한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명확한 전략과 글로벌 비즈니스를 바탕으로 ‘와츠 넥스트(what’s next)’를 고려하는 겁니다. 조만간 발키에서 개발한 웨어러블 헬스 케어 제품을 만나게 될 겁니다.”


헬싱키(핀란드)=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