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년 마도로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2시간 독점 인터뷰

한경비즈니스가 한국 경영학의 대가인 조동성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께 우리 시대의 진정한 기업가 정신 탐구에 나선다.

조 교수가 한국의 대표 기업가 중 직접 인터뷰이를 선정하고 질문을 던진다. 기업가를 기업가답게 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경영학자의 눈으로 본 기업가의 세계는 매월 1회 연재된다. 조 교수가 만난 첫 주인공은 세계 1위 수산 기업을 일군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다.
[COVER STORY] “바다가 나를 키웠죠…현장에 몸 던지는 게 성공 지름길”
김재철(80) 동원그룹 회장은 ‘살아 있는 장보고’로 통한다. 20대 청춘 시절 원양어선을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 세상을 만났고 바다에서 한국의 미래를 봤다. 한국 어선이 적도를 한 번도 넘어본 적이 없는 1960년대, 유서 한 장을 써 놓고 맨몸으로 처음 배에 오른 마도로스의 도전은 결국 창업으로 꽃을 피웠다.

조동성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께 3월 20일 서울 양재동 동원산업빌딩을 찾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경영학자이면서 재계에 인맥이 넓기로 유명한 조 교수는 김 회장을 첫째로 찾은 이유에 대해 “1차산업에서 시작해 2차, 3차로 확장하면서 균형 있게 유지해 가는 철학, 디테일, 스케일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점이 감명 깊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과 조 교수의 첫 만남은 3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 교수가 서울대로 부임한 1978년,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AMP)을 마친 김 회장과 사석에서 만난 게 첫 인연이었다. 조 교수에 따르면 “서초동 맥줏집에서 처음 봤다. 보통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은 교수들을 최고급으로 모시는데, 김 회장은 젊은 사람들이 자주 가는 곳에 가서 신선하게 다가왔고 건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1981년 김 회장이 하버드대 AMP 입학 시 조 교수가 추천서를 써 주면서 둘의 인연은 더욱 깊어졌다. 당시 “회사 일은 밑에 위임할 수 있고 영어는 가서 배우겠다”는 배짱 하나로 미국 길에 오른 김 회장을 추천해 준 두 명 중 한 명(또 다른 한 명은 미쓰비시 수산부장)이었다.

18층 김재철 회장 집무실에는 ‘거꾸로 된 세계지도’가 있었다.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인의 미래가 보인다”는 그의 지론이 잘 나타나 있는 상징이다. 김 회장은 “바다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수많은 별은 위아래가 없는데 지도는 왜 있을까’라는 착상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80대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동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 교수는 “저보다 10년은 젊어 보인다”라고 말했고 김 회장은 손사래를 치며 “그래도 나이가 들어 목이 잘 잠긴다”고 화답했다. 두 시간 정도 진행된 인터뷰 내내 김 회장은 전혀 기운이 꺾이지 않았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소리엔 알맹이, 즉 ‘기’가 있었다. 80대 청춘, ‘영원한 마도로스’를 꿈꾸는 걸까. 도전의 연속인 인생을 가감 없이 풀어냈고 웃으며 던지는 이야기에도 경륜과 지혜가 묻어났다. 전반적으로 차분한 어조로 대화가 진행됐는데, 특히 기업 철학, 기업가 정신을 논하는 대목이 나올 때면 자연스럽게 억양이 올라가며 눈빛을 반짝거렸다. 회장님이라기보다는 친근한 할아버지처럼 느껴지다가도 그 순간이 되면 열정과 카리스마가 넘치는 창업가로 변모하는 듯했다.



조동성 교수(이하 조 교수) 회장님, 처음 뵀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김재철 회장(이하 김 회장) 험한 일을 많이 겪었지만 스트레스를 안지 않고 그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안 되는 건 잊어버리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일 것 같습니다. 신의 섭리라고 체념해 버리니까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또 참치를 많이 먹고 홍삼 사업을 시작해 홍삼도 먹고 있습니다. 마음과 음식이 중요하고 셋째로 운동을 꼽습니다. 매일 아침 10~20분간 맨손체조를 꼭 하고 있고 등산을 다니다가 주변에서 위험하다고 해서 요즘에는 골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동차로 말하면 20년쯤 탄 셈이니까 아무래도 털털거리죠.

조 교수 처음에 서울대 농대에 합격했는 데도 수산대를 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 회장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서울대 문리대를 수석 졸업하신 분이었는데, 당시 6·25전쟁을 겪으면서 시골로 내려오셨어요. 그분이 “나 같으면 바다 계통 학교에 지원하겠다. 나도 서울대 나왔지만 별것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라가 좁고 자원이 없기 때문에 바다로 나가야 한다고 하신 거죠. 부랴부랴 알아보니까 수산대가 학사 학위를 준다고 해서 진로를 바꾸게 됐어요. 그래도 갑자기 길을 바꿨기 때문에 선생님께도 야단맞고 아버지도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쌀은 보내줄 테니 반찬은 고기 낚아서 해 먹어라”고 하셨죠.


홍삼·맨손체조로 건강관리
조 교수 수산대를 졸업하고도 다른 진로가 있었을 텐데, 또 배를 타신 이유는 뭔가요.

김 회장 수산대를 다니면서 실습선을 타고 어업 실습을 해 봤거든요. 그런데 자원이 고갈돼 ‘장래가 없구나’라고 수산대에 온 것을 후회했어요. 낙담하던 차에 졸업을 한 해 앞둔 1957년 말 신문을 보니까 한국에서 처음으로 남태평양으로 참치 잡이를 나간다고 하더군요. 원양어선이 나간다는 기사를 보고 승선을 지원했죠. 그런데 그쪽에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게 최초로 나가기 때문에 베테랑 선원만 선발해 가겠죠. 풋내기 대학생이 오니까 “네가 언제 일을 해봤느냐”며 거절하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이고 찾아갔습니다. 나중에는 주임교수님도 모시고 갔죠. 수산대를 졸업하면 이등항해사로, 사관학교로 말하면 소위 자격증이 있는 셈이거든요. 몇 번 사정해도 안 돼 마지막으로 제가 획기적인 제안을 한 게 “월급을 받지 않고 일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가서 죽어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했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어선·상선·군함을 통틀어 적도를 넘어본 적도 없고 일본해를 지난 적도 없어요. 미지의 사모아에 간다고 하니 떠나는 사람들도 유서를 써놓고 가고 흙을 베개 속에 담아 조국의 흙냄새를 맡는다며 비장한 각오로 떠나던 땐데, 저는 겁 모르고 뛰어들었죠. 설움도 많이 당한 게 정원 외이기 때문에 침대가 없었거든요. 파도가 치면 나무로 만든 간이침대째 구르기도 하고 고생 좀 했죠.

조 교수 이등항해사로 타신 게 아니에요?

김 회장 처음엔 실습 항해사로 출발했죠. 당시에는 지금처럼 위성항법장치(GPS)로 위치를 찾는 게 아니라 천체를 관측해 위치를 계산해야 하거든요. 그건 좀 배운 사람이 해야 해요. 왜냐하면 텍스트가 전부 영어로 돼 있거든요. 1년간 무보수로, 헌신적으로 일하고 돌아왔습니다.

조 교수 주로 어떤 인재들이 원양어선에 탔습니까.

김 회장 한국 원양업의 요람은 사모아인데, 지금도 가보면 희생자 92기의 묘가 있습니다. 또 부산수산대, 지금은 부경대인데 졸업생들이 워낙 많이 희생돼 학교 교정에 위령탑이 있거든요. 학교 안에 위령탑이 있는 곳은 없잖아요. 그런 과정이었으니까 정말 뛰어난 인재가 오기 어려웠죠. 제가 가끔 얘기하는 게 “내가 만약 고시를 했다면 수명이 길었겠느냐. 여긴 사람이 없으니까 나 같은 사람이 왕초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웃음) 2006년 무역협회장을 그만두고 가장 먼저 연수원을 만든 것도 좋은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예요.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연수원 중 제일 좋다는 소리를 들어요.

조 교수 동원그룹은 어느 기준으로 봐도 대기업이죠.

김 회장 중소기업은 아니더라도 재벌 기업과는 다르잖아요.

조 교수 그건 회장님의 철학 아닐까요.

김 회장 저는 크게 하는 것이 능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업종이 전자나 첨단 제품처럼 크게 승부하는 게 아니고 아주 오래된 업종을 하고 있으니까요. 또한 지금 식으로 가면 어느 시기엔가는 또 한 번 챌린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 교수 다시 옛날로 돌아가 선장이 빨리 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 회장 배 탄 지 2년 반 만에 선장이 됐으니까. 굉장히 빨리 된 거죠. 당시 갑판장이 아버지 나이와 똑같았어요. 당시 참치 잡이에 너도나도 뛰어들던 시기였는데, 우선 현장에 가 본 사람이 없었어요. 쉽게 말하면 살아있는 참치를 본 사람이 없잖아요. 제가 특별히 잘했다기보다 적어도 학부를 나와 배를 탄 사람이 처음이었고 이등항해사 법적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현장에서 2년간 참치를 잡아 본 사람이 없으니까 하게 된 거죠.
[COVER STORY] “바다가 나를 키웠죠…현장에 몸 던지는 게 성공 지름길”
조동성 교수
1949년 서울 출생으로 경기고를 거쳐 1971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8년 당시 최연소인 29세에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다. 메커니즘 이론의 창시자이자 ‘CEO들이 가장 조언을 듣고 싶어 하는 경영 대가’, ‘한국의 마이클 포터’로 불린다. 현재 첫 간선제를 진행하고 있는 서울대 총장 후보로 출사표를 던진 상태다.


김재철 회장
1935년 전남 강진에서 출생했다. 1969년 동원산업을 창업해 세계 1위 수산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1982년에는 동원증권으로 금융업에 진출했고 2003년 다시 한국투자금융지주로 그룹에서 계열 분리해 재계에 금산분리의 ‘본’을 보였다. 2008년엔 미국의 참치 캔 1위 스타키스트를, 2011년엔 세네갈 수산 캔회사 SNCDS를 인수해 세계 수산업 중심에 섰다.



신문·잡지 글 기고…‘교과서’ 실려
조 교수 미국에 있을 때 포드자동차 사장을 거쳐 보스턴대 경영대 학장으로 부임한 분을 뵌 적이 있습니다. 이분이 하버드 MBA를 마치고 포드자동차 기획실에 취업했는데, “저녁과 주말은 포드자동차 판매장에서 무보수로 중고 자동차를 팔겠다”고 해서 2년 동안 일했대요. 자동차 딜러로 일하면서 소비자의 관심과 차 결함 등을 소상히 알게 됐고 그 후부터 회장에서부터 누구든지 자신만큼 현장을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하더군요. 초기에 현장에 몸을 던지는 게 성공의 지름길인 것 같습니다.

김 회장 맞습니다. 기업 경영에도 스마일 곡선이라고 해서 가장 밑단과 윗선을 잡으면 조직 운영이 쉽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일도 저변과 위를 알면 되는데, 중간 이상만 알면 막상 말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거죠. 아래부터 경험해야 아랫사람이 잘못해도 구체적으로 가르칠 수 있거든요. 직접 손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경험해 보지 않으면 가르쳐 줄 수 없죠. 또 그래야 아랫사람이 거짓말을 못해요.

조 교수 그게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회장님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김 회장 당시 배를 타고 나간 것은 거창하게 얘기하면 수산업 발전이지만, 사실은 어려운 때니까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바다 생활을 시작한 거죠. 제가 장남인데 동생들이 대학을 못 갈 정도로 가난했으니까, 빈곤을 해결하려면 바다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바다 생활을 시작하면서 모든 걸 터득하게 된 거죠. 가서 보니 자원 없고 땅 좁은 한국이 살 길은 바다라고 생각하게 됐죠. 그때부터 세계로 나가야 한다는 얘길 많이 하게 됐어요.

조 교수 이런 얘길 젊은 사람들에게 하면 모두 고개는 끄덕이거든요. 그런데 행동으로 옮기고 옮기지 않는 것의 차이는 과연 뭘까요.

김 회장 결국은 힘드니까요. 힘든 일을 누구나 즐겨 하는 건 아니거든요. 쉽게 지름길을 가려고 하지 힘든 일을 기꺼이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조 교수 회장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신 이유는 뭡니까.

김 회장 꿈과 사명감이 생긴 게, 1960년대 당시 한국이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외국에 나가면서 한국이 경제적 발전을 하루빨리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어떻게 하면 달러를 많이 벌어들이느냐, 수출을 많이 하느냐가 가장 중요했죠. 제가 대학을 졸업하던 1958년에 국민소득이 60달러, 총 수출액이 1600만 달러였으니 얼마나 달러가 간절했겠습니까. 그런 사명감이 생기다 보니까 조금씩 차원이 높아졌다고 얘기할 수 있겠죠. 그때 배 생활을 하면서 남달리 했던 것은 젊은이들을 바다로 끌어들이기 위해 신문이나 ‘사상계’, ‘신동아’ 같은 잡지에 기고했던 겁니다. 회사에서는 싫어했지만 젊은 혈기로 글을 썼는데, 그게 알려지면서 초·중·고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죠.

조 교수 마치 미다스 손처럼 하는 것마다 성공하셨는데, 실패 사례는 없나요.

김 회장 실패 사례도 많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 최초로 카메라 사업을 한 게 동원이라는 사실을 모를 겁니다. 원양업으로 번 돈으로 뭔가 수출을 더 하고 싶어 오리온광학으로 1970년대 카메라 사업을 시작했어요. 당시 부품 사업이 전혀 없었는데 카메라 하나에 1000여 개 부품이 들어가요. 그런데 부품 사업이 없잖아요. 그래서 애를 태웠고 또 하다 보니까 삼성과 LG가 카메라 사업에 뛰어들어요. 이때만 하더라도 카메라를 현금으로 팔 땐데, 대기업이 외상을 주기 시작하니까 어느 시점이 되니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죠. 결국 당시 돈으로 70억 원 정도 손해를 봤어요. 외상으로 깔아놓고 장사를 하다가 안 하면 그냥 떼이는 겁니다. 쓰라린 경험을 했죠. 지금도 강원도 영월에 가면 당시 담보로 넣었던 산지가 있어요. 그때 느낀 게 ‘모르는 분야는 쉽게 하는 게 아니다’, ‘경쟁자를 봐 가면서 해야지 무조건 뛰어들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입니다.
[COVER STORY] “바다가 나를 키웠죠…현장에 몸 던지는 게 성공 지름길”
동원그룹이 걸어온 길
1969년 자본금 1000만 원으로 동원산업 설립
1973년 아프리카 가나 테마항구에 최초의 해외 기지 설치
1982년 동원증권 인수. 동원참치통조림 국내 최초 출시
1993년 양재동 신사옥 준공, 입주
1996년 동원그룹 공식 출범
2001년 동원그룹 지주회사 동원엔터프라이즈 설립
2002년 금융자회사 분리 한국투자금융지주 분할 설립
2004년 동원그룹과 한국투자금융지주 계열 분리
2008년 미국 최대 참치 브랜드 스타키스트 인수
2011년 동원그룹, 세네갈 SNCDS 인수
2013년 동원참치 중국 시장 진출

2014년 현재 동원엔터프라이즈 지주회사를 중심으로 동원산업·동원F&B·동원시스템즈 등 주요 상장계열사 3곳과 비상장사 19곳, 해외 법인 15곳을 거느리고 있다. 2012년 3조3644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2004년 분리된 한국투자금융지주도 자산 20조 원 규모의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숫자 심하게 따지는 엄한 회장님
조 교수 증권업은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김 회장 수산대를 나와 배를 오래 타고 월급쟁이도 했지만 제가 회사를 해보니까 경영이라는 것은 모르잖아요. 용어도 모르니까 나름대로 공부해 봤는데, 하버드 AMP를 다녀와서 두 가지 소득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미국에서 참치 캔 만드는 걸 보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거였죠. 그래서 1981년에 다녀와서 1982년부터 참치 캔을 시작했습니다 둘째는 하버드 MBA의 우수한 인재들이 증권사를 가더라고요. 한국은 증권 파동 후유증으로 증권사들이 사기꾼 취급을 받으며 찬밥 신세였던 시절이었죠. 정부가 마침 당시 한신증권을 불하한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와 응찰해 증권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때 큰 배 한 척 값을 가지고 샀으니 그때 그만큼 가치가 없을 때예요.

조 교수 금융은 모르고 시작했지만 성공하셨지 않습니까.

김 회장 금융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10년 정도 고전했죠. 1982년에 동원증권을 인수하니 그간 제대로 된 공채 한 번 하지 않고 사방에서 청탁으로 사람을 쓰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공채를 실시하고 10년 정도 교육했는데, 그때 거쳐 간 사람들이 김정태(전 국민은행장)·조승현(전 교보증권 사장)·박현주(미래에셋 회장) 등이 있습니다. 증권계 사관학교로 불렸죠. 하드 트레이닝을 시킨 편이었는데, 당시 사무실이 서소문 육교 옆 대양빌딩에 있었거든요. 여의도 증권사에서 보고하러 오면 임원들이 오기 전에 다 암기하고 오는데, 서소문 고가차로를 넘는 순간 하도 긴장해 숫자를 다 잊어버렸다고 얘기해요. 그 정도로 제가 심하게 숫자를 따지면서 교육한 거죠.

조 교수 회장님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또 시대적 배경과 잘 맞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김 회장 그렇죠. 1970~1980년대가 원양업의 피크기라고 볼 수 있는데, 동원산업도 그때 많이 성장했어요. 동원산업은 어업에 관해서는 세계 톱입니다. 제가 맨 밑바닥부터 했으니까 선원들이 이야기하면 알아듣고 해외 어디서나 자기들이 직접 사장이나 회장과 통화할 수 있으니까 중간에서 이상한 짓을 못하거든요. 또 뭐니 뭐니 해도 한국 젊은이들은 해상 적응력이 뛰어납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장보고의 피를 이어받은 민족이다’라고 얘기하는데, 세계 거친 어장에 한국 배, 한국 선원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니까 시대와도 잘 맞아떨어진 거죠.

조 교수 둘 중 더 중요한 게 있다면 뭘까요. 다시 말해 영웅이 시대를 만듭니까, 시대가 영웅을 만듭니까.

김 회장 좋은 시기를 거쳤지만 모두가 발전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회사를 창업할 때 당시 원양 회사가 40여 개 됐는데, 명맥을 유지하는 건 동원을 제외하고 딱 한 곳 있습니다. 원양업이 다른 산업에 비해 흥망성쇠가 성한 분야입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경기가 좋다, 나쁘다 얘기하는데 좋다는 것은 10개 회사 중 6~7개가 잘 되고 3~4개 회사가 안 좋고, 반대로 좋은 기업이 2~3개이고 안 좋은 곳이 7~8개라면 경기가 나쁜 겁니다. 경기가 나쁘다고 모든 업종이 없어지는 건 아니고 좋다고 해서 모든 업종이 살아남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조 교수 환경도 중요하지만 경영 주체의 비전이나 리더십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케네스 앤드루스라고 전략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버드대 교수가 만든 모델이 있습니다. 외부 환경에서 ‘기회’와 ‘위협’을 잡고 거기에 내부 ‘강점’과 ‘약점’을 보태면 바람직하면서도 가능한 전략이 나온다는 겁니다. 스와트(SWOT) 전략 모델이 여기서 나왔죠. 그런데 원래는 이게 다가 아니에요. 앤드루스 교수는 경영자의 가치관과 철학, 기업의 사회적 책임까지 나갑니다. 이걸 다 고려하는 게 원래 모델인데, 컨설팅 회사들이 양 날개를 떼고 지금의 스와트 모델을 만들면서 영혼이 없고 이기적인 경영자들이 양산되기도 했습니다. 오리지널 모델을 유지했다면 지금처럼 기업과 경영자가 비판받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김 회장님은 그런 오리지널 모델을 잘 유지한 것 같아요.


미국 기업 인수해 성공한 첫 사례
김 회장 그렇게까지 과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기업이 사회적 질서를 지키고 배려하고 베푸는 건 개인으로 말하면 인성의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만큼 산업자본이 발전해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고 있지만 사회자본이 빈약한 게 교수님 지적처럼 경쟁과 효율만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동원그룹을 세울 때 사시로 ‘성실한 기업 활동으로 사회 정의의 실현’을 택했습니다. 양재동으로 옮기면서 좀 더 현대적으로 풀어 ‘새로운 가치 창출로 사회 필요 기업’이 되자고 했죠.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는 기업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이 할 일은 첫째는 고용 창출과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국가나 사회, 공익적인 요인을 생각하지 않고 혼자서만 잘되겠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죠.

조 교수 다시 20대가 되신다면 뭘 하시겠습니까.

김 회장 몇 년 전 연세대에서 강의할 때 학생이 똑같은 질문을 하더군요. 남미 아르헨티나 같은 데 땅 661만㎡(200만 평)쯤 확보해 거기에서 대장 노릇을 하겠다고 그랬죠. 남미는 땅이 넓어 무상으로 장기 임대해 주는 곳이 흔해요. 농업적으로 개발할 데도 무궁무진하고요. 옛날 망망대해에 뛰어든 것처럼 이번엔 육지에서 꿈을 일구고 싶어요. 한국인은 자질이 우수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조 교수 자주 불리는 별명이 있나요.

김 회장 ‘살아 있는 장보고’라는 별명이 있죠. 장보고를 역적이라고 했는데, 알고 보면 중국이나 일본 역사 정사에 한국 사람으로 이름이 나오는 유일한 인물이 장보곱니다. 장보고야말로 제대로 국위선양을 한 셈인데, 장보고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국민들이 장보고를 많이 알게 된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는 역사 바로 세우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조 교수 2008년 스타키스트 인수로 새로운 도전을 하셨는데요.

김 회장 사모아에서 고기를 잡아 처음 납품했던 인연이 깊은 회사인데, 마침 몇 년 전 시중에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제일 큰 참치 캔 가공 회사인데, 세계적으로도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다고 볼 수 있어요. 인수하려고 보니까 당시 글로벌 금융 위기가 와서 인수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만 주변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인수하게 됐습니다. 지난해 이익으로 보면 스타키스트가 동원산업보다 더 매출이 높습니다. 미국 회사를 인수해 성공한 게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성공 비결이라면, 참치는 평생 해봤으니까 안다면 안 거겠죠.

조 교수 보통 그룹 같은 경우 금융과 산업이 서로 섞여 있는데 동원은 완전히 분리돼 있습니다. 뜻이 있었던 겁니까.

김 회장 특별한 건 없습니다. 그건 정부 정책이 금융 산업과 일반 산업을 구분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투자증권 주식을 다 처분하고 큰아들에게 넘겨주고 저는 상징적으로 1% 미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마 한투 주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면 큰 재벌이 됐을 거예요. 그런데 다 처분하라고 해서 싼값에 다 처분하고 계열 분리했죠. 그 쪽 하고는 거래도 없고 큰아들이 맡아서 합니다.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로 이어졌다. 총장 선거로 한창 바쁜 조 교수가 30분밖에 시간이 없다고 하자 김 회장은 예약해 둔 청담동 유명 스시집을 취소하고 회사 옆 일식집으로 안내했다. 집무실에서의 인터뷰와 달리 식사 자리에서는 김 회장이 주로 질문을 던지고 조 교수가 답했다. 총장 선거와 관련한 이슈가 화제였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항상 지시만 하는 오너이면서도 얘기를 잘 듣고 적절한 리액션을 보이는 점이었다. 80대에 ‘듣는 귀’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는 아직도 배울 자세를 지닌 듯했고 귀로 듣는 옛적 ‘전설’보다 더 실감나는 ‘배움’의 시간이었다.



김재철 회장의 남다른 자녀 교육법
구름 위에 오르면 아래 사정 모른다

김재철 회장은 독특한 2세 교육으로 유명하다. 맏아들인 김남구(51)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은 대학 졸업 후 6개월간 남태평양에서 신분을 숨기고 참치 잡이를 했고 둘째 아들인 김남정(41) 동원그룹 부회장도 참치 캔 공장 생산 라인에서 일을 시작했다. 김 회장은 “임원이 되고서는 빨리 올렸지만 직원이나 대리·과장급까지는 적어도 10년씩 훈련을 시켰습니다. 구름 위에 올라가 버리면 아래 사정을 모르거든요”이라고 말했다. 이는 두 아들을 향한 말이다. 혹독한 현장 교육을 거쳐 장남은 2011년 부회장 직함을 달았고 차남은 지난해 말 동원그룹 부회장에 올랐다.


정리=장승규·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