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 SPA 전환 봇물…‘포화’ 내수 대신 중국 등 해외시장 공략해야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의사 이가은(32) 씨는 1주일에 한 번씩 유니클로에서 쇼핑한다. 이 씨는 히트텍·니트·레깅스 등 일상적으로 입는 옷은 유니클로·자라 같은 해외 제조·직매형 의류(SPA) 매장에서 사고 그 대신 코트 등 아우터·구두·가방은 명품 브랜드에서 구입한다. 이 씨는 “출근할 때마다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는 편인데, SPA 브랜드에서 저렴한 가격에 여러 벌을 구입해 믹스 매치를 하면 다양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저성장 시대 속에서 해외 SPA는 오히려 ‘폭풍 성장’하고 있다. SPA는 한 회사가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해 제조원가를 낮추고 유통 단계를 축소해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빠르게 회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최신 유행을 포착해 패스트푸드처럼 빠르게 생산하고 판매한다는 의미에서 ‘패스트 패션’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SPA는 최신 트렌드와 소비자의 욕구를 반영하면서도 저렴한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한국 시장 내에서의 시장점유율을 지속적으로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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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클로·자라·H&M 매출액 ‘1조’
지난해 유니클로·자라(ZARA)·H&M 등 3대 해외 SPA 브랜드의 국내 매출 총액이 1조 원을 돌파해 2010년 3441억 원 대비 3배가량 증가했다. ‘빅3’ SPA 브랜드 가운데 가장 먼저 국내 매장을 낸 일본 유니클로는 매장 수·인지도·판매량 등에서 경쟁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 지난해 한국에서만 6940억 원의 매출을 올렸는데 전년(5049억 원)보다 37% 증가한 액수다. 특히 유니클로는 2월 기준 117개 점포(온라인 포함)를 보유해 한국 시장에서 점포 수 기준으로는 자라(40개)·H&M(17개)을 압도하고 있다. 2005년 3개 점포로 시작해 빠른 속도로 수를 늘리고 있다.

스페인의 자라는 지난해 전년(1673억 원)보다 22% 늘어난 2038억 원어치를 팔았다. 한국 진출 첫해인 2008년 343억 원에 불과했던 매출액은 매년 평균 62% 성장했다. 빅3 중 가장 후발 주자인 스웨덴의 H&M은 한국 진출 3년 만인 지난해 1226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H&M의 매출액은 2010년 국내 진출 후 매년 평균 68% 성장했다.

유통 업계에서는 해외 브랜드와 토종 브랜드를 합쳐 국내 SPA 시장 규모가 지난해 3조 원을 넘어선 것으로 내다봤다. 2008년 5000억 원이었던 시장이 불과 5년 만에 6배나 성장한 것은 한국 시장에서 단기간 동안 매년 50% 이상 성장하며 SPA 시장을 형성한 글로벌 빅3의 영향이 지대했다. 전문가들은 2015년에는 5조 원까지 시장이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

추호정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는 “일반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옷을 구입하게 되면 품질도 떨어지고 쇼핑 환경도 별로인 곳에서 산다는 게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는데 SPA는 허를 찔렀다”며 “SPA 브랜드 열풍으로 그간 홀세일, 백화점 브랜드 중심으로 운영돼 오던 패션 산업의 지형이 바뀌고 있고 글로벌 패션 기업이 국내 소비자들의 구매 행태를 급격히 변화시켰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 패션 업계 컨설팅 전문가는 “최근 2~3년 사이 소비자들의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기업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며 “트렌드를 반영한 제품, 다양한 상품 구성, 저렴한 가격, 넓고 쾌적한 매장, 점원의 방해를 받지 않는 쇼핑 분위기 등이 소비자들을 매료시킨 것이 글로벌 SPA 브랜드의 성공 요인”이라고 말했다.

SPA 브랜드의 최대 강점은 합리적인 가격에 있다. 2012년 대한상공회의소가 서울·수도권 소비자 50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SPA 브랜드를 좋아하는 이유로 저렴한 가격(84.8%)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정연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자라의 인디텍스는 세계 85개국에 매장을 운영하는 등 글로벌 SPA 브랜드들이 이미 규모의 경제를 확보해 생산비용 면에서 국내 기업과 비교할 수 없는 경쟁력을 갖췄다”고 말했다. 주요 상권에 포진한 유통망과 글로벌 소싱력을 바탕으로 소비자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가격을 지속적으로 낮출 수 있도록 인프라를 갖춤으로써 소비자의 기대를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SPA 브랜드의 성장은 비단 국내시장에 한정되지 않고 동유럽·중동·아시아권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아시아 등 신흥 시장에서 급속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글로벌 SPA의 ‘2차 공습’ 대비해야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을 휩쓰는 빅3 브랜드는 저마다 성공 전략이 있다. 유니클로는 셔츠·티셔츠·면바지·히트텍 등 ‘기본’과 ‘기능’에 충실하며 자라는 1주일에 한 번씩 매장의 옷을 교체하고 유행을 발 빠르게 따른다. H&M은 칼 라카펠트, 이자벨 마랑 등 유명 디자이너와 협업(컬래버레이션)해 만든 고품질의 옷을 한정판으로 내놓는 전략으로 ‘고품격 브랜딩’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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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해외 SPA 브랜드가 소비자로부터 선택을 받자 국내 패션 기업들도 속속 SPA 브랜드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국내 SPA 시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이랜드그룹의 스파오·미쏘, 삼성에버랜드의 에잇세컨즈 등 주요 3대 브랜드의 지난해 매출액은 각각 1400억 원, 1000억 원, 1300억 원이다. 전년 대비 상승 폭은 크지만 해외 SPA ‘빅3’ 국내 매출액의 30% 수준이다.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 관계자는 “후발 주자이기 때문에 더욱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하다”며 “한국인의 신체에 특화된 사이즈와 디자인의 옷을 자라보다 저렴한 가격에 내놓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해외 SPA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와 함께 국내 패션 기업들이 시장에 속속 뛰어들면서 글로벌 브랜드와 토종 브랜드의 경쟁은 날로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올 상반기 빅3와 가격대·스타일이 다른 자매 브랜드까지 들어올 예정이어서 가뜩이나 기존 고객을 빼앗긴 국내 패션 업계는 더욱 긴장하고 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 캐나다 SPA 브랜드인 ‘조 프레쉬’와 스웨덴 H&M의 자매 브랜드인 ‘코스’가 국내에 진출한다. 코스는 오는 5월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 1호점 개장을 확정했다. H&M의 기존 제품들보다 2배가량 가격이 비싸지만 품질의 격을 높인 브랜드다. 일본 유니클로의 자매 브랜드 ‘지유’와 미국 갭의 세컨드 브랜드 ‘올드 네이비’도 국내 진출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SPA 브랜드의 성장은 세계적 추세로, 한국 시장에서도 향후 수년간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들이 브랜드 확장 전략을 이용해 시장 내 포화 전략으로 전환하는 추세인 만큼 국내 패션 시장의 추가적인 잠식이 이어질 것으로 보여 이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추 교수는 “빅3의 영향으로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 패션에 대한 글로벌 스탠더드가 생겼다. 한마디로 눈이 높아진 것”이라며 “지나치게 한국적인 스타일과 트렌드는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추 교수는 국내 업체들이 내수 시장에 머무르는 대신 중국 진출 등 글로벌 SPA 기업으로 발돋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 전문가는 “단순히 가격이 저렴하고 제품 종류만 다양하다고 해서 SPA가 아니다”며 “SPA의 겉만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 고유의 캐릭터를 갖춰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김민주 기자 vit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