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빛나게 하는 전설 속 명마들…누가 타느냐 따라 운명 엇갈려

어떤 기자가 물었다. “독창성을 말씀하셨는데, 한국엔 왜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죠?”
이어령 선생이 대답했다.
“잡스가 없는 게 아니에요. 있어요. 알아보지 못하는 거지. 독창성은 남들이 당연시하는 것, 이미 해답이 나온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는 데서 나옵니다. 유행을 따르거나 남의 것을 모방하는 데서는 독창성이 나오지 않아요. … 잡스 같은 인물을 알아주고 그런 사람을 키우는 애플 같은 회사가 없는 게 문제죠. 페이스북을 창안한 마크 저커버그는 몇 번이나 학업을 포기할 뻔했지만 학교와 사회가 그를 살렸죠. 그를 인정해 준 미국 사회의 문화 자본과 관용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인터뷰 말미에 덧붙인 선생의 한마디가 여운이 있다.
“천리마는 있는데 백락이 없는 겁니다!”
[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천리마야! 네가 나를 죽이려느냐
백락의 안목 없으면 천리마도 무용지물
한유(韓愈)는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천리마에, 황제를 백락에 비유했다.
“천리마는 세상에 항상 있다. 그러나 이를 알아보는 백락 같은 사람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千里馬常有, 而伯樂不常有). 세상의 많은 명마들이 종의 손에서 학대당하다가 다른 평범한 말처럼 마구간에서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문장 덕분에 한유는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와 무관하게 한유의 말 자체는 설득력이 있다.

예로부터 말은 생명력과 진취성을 상징한다. 가축화한 동물 중에서 가장 빠르다. 사람들은 말이 육지를 달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상상 속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른바 천마(天馬) 혹은 비마(飛馬)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가수스가 대표적이다.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 있다. 그들은 지상과 천상을 연결해 주는 영적(靈的)인 매개체다. 박혁거세·동명성왕·주몽 등 한국 고대 건국 신화나 영웅 설화에 말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난세 중의 난세였던 춘추전국시대나 진한시대에 말은 가장 중요한 전략 물자였다.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것처럼 기쁘다’는 말이 달리 나왔겠는가.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병마용(兵馬俑)이 이를 대변한다. 초나라 항우의 애마였던 오추마(烏 馬)도 뺄 수 없다. 한무제는 훌륭한 전투마를 구하려고 해외 원정도 불사했다. 13세기 이후 몽골 고원에서부터 카자흐스탄·우크라이나를 넘어 헝가리까지 동서로 장장 8000km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부분을 장악했던 몽골제국. 몽골제국의 영화도 기본적으로는 말을 타고 하루 70~80km씩 이동이 가??杉?몽골 기병대의 탁월한 기동성이 바탕이었다.

‘삼국지’ 시대를 말을 빼고 얘기할 수는 없다. 명청시대에 발행된 각종 ‘삼국지’ 관련 서적 삽화의 절반이 말 그림이다. 사람들은 ‘삼국지’ 4대 명마로 적토마(赤兎馬)·적로마(的盧馬)·절영마(絶影馬)·조황비전(爪黃飛電)을 꼽는다. 절영마는 조조의 애마다. 전투 후 개선(凱旋)할 때 애용했다. 그림자도 못 따라올 정도로 빠르다는 뜻이다.

절영마는 완성전투에서 화살을 여러 대 맞고도 계속 달리다가 마지막에 눈에 화살을 맞고서야 쓰러졌다. 조조가 크게 슬퍼했다. 조황비전도 조조의 애마였다. 근거지인 허창에 헌제를 초대해 개최한 사냥 대회에서 이 말을 타고 위세를 부렸다고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삼국지’ 최고의 명마는 적토마다. “사람은 여포가 최고요, 말은 적토마가 최고(人中呂布, 馬中赤兎)”라는 말이 있다. 사실 인간성이 문제였지 ‘삼국지’에서 여포의 무공을 뛰어넘는 이는 없었다. 여포는 유비 3형제와 3 대 1로 겨뤄도 밀리지 않았다. 적토마에 올라 방천화극을 휘두르는 여포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배신에 배신을 거듭한 여포의 뒤끝이 좋을 리 없었다. 그 역시 부하의 배신으로 종말을 맞는다.

동탁이 매수용으로 여포에게 주었던 적토마는 조조가 관우를 스카우트하기 위한 뇌물로 쓰인다. 조조의 선물을 사양하던 관우가 적토마는 기꺼이 받았다.
“관공은 적토마가 그렇게도 좋소?”
“좋다마다요. 유비 형님의 소재만 파악되면 적토마를 타고 천 리 길도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잖습니까?”

조조가 씁쓰레 웃었다. 적토마에 올라 동탁 수하의 맹장 안량과 문추를 베고 조조 진영의 다섯 관문을 지나며 여섯 명의 장수를 단칼에 베던 관우는 맥성전투에서 오나라 군대에 사로잡혔다. 관우 사후 손권은 관우를 사로잡은 마충에게 적토마를 넘긴다. 그러나 적토마는 주인을 그리며 슬피 울다가 굶어 죽었다. 백락을 알아보는 천리마였다고나 할까.


방통에게는 저승사자 된 적로마

적로마 역시 명마다. 상산 조자룡이 장무를 죽이고 빼앗아 유비에게 바쳤다. 주위에서 “적로마는 주인에게 해를 끼치는 말입니다”라고 말렸다. 유비가 웃어 넘겼다. “하하하.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소. 어찌 말 따위가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한단 말이요?”
유비가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했던 시절이다. 유비가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유표가 의아해서 물었다. “제가 말을 탄 지 오래돼 허벅살이 너무 올라 그랬습니다.”
유비는 조조에게 쫓겨 온 이후 허송한 6년의 세월을 한탄했던 것이다. 비육지탄( 肉之嘆)의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한편 유표의 후처 채씨와 그의 동생 채모 일파는 유표가 유비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자 이에 반발, 몰래 유비를 제거하기 위해 잔치를 열었다. 유비는 멋모르고 홀로 잔치에 왔다가 누군가의 귀띔을 받고 적로마를 타고 줄행랑을 쳤다. 채모의 군사들이 추격했다. 급류가 흐르는 깊은 계곡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유비가 탄식했다.

“적로야! 적로야! 네가 나를 해하려느냐?”
순간 적로마는 10m 계곡을 날아올라 채모 일당을 따돌렸다. 적로마의 징크스가 깨지는 듯했다.
사달은 다른 데서 났다. 유장이 다스리던 서천의 낙성을 공격하려고 출발하는 군사 방통의 말이 시원찮아 보이자 유비가 그의 말을 방통에게 준 것이다. 진격 중이던 방통이 “이곳의 지명이 뭔가?”라고 묻자 낙봉파(落鳳坡)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낙봉파는 봉황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나의 도호(道號)가 봉추(鳳雛)이니 내가 죽는다는 뜻 아닌가?’ 불길한 생각이 든 방통은 급히 후퇴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매복해 있던 장임의 무리는 적로마를 탄 사람이 유비인 줄 알고 무한정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와룡(공명)과 봉추, 둘 중에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얻는다”고 했던 봉추는 그렇게 허무하게 갔다. 징크스는 끝내 깨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족 같은 적토마를 봉선(여포)이 탔을 때와 관운장이 탔을 때는 품격이 달랐다. 적로마도 유비에게는 활인(活人)의 말이었는데, 봉추에게는 저승사자였다. 우리는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의 안목을 배워야 한다. 또한 자신이 천리마인지 아닌지도 돌아볼 줄도 모르고 무작정 백락만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끊임없이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며 백리마라도 되기 위해 노력할지 선택은 오롯이 우리 몫이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