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대 기업 순이익 절반 쏟아부어…‘R&D 투자 외면’ 비판도
미국 대기업들이 지난 연말 ‘주주 잔치’를 벌였다. 내부 유보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배당금을 올리는 기업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 최대 항공기 제조업체 보잉은 2013년 12월 17일 이사회를 열고 100억 달러(약 10조5000억 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결의했다. 이 같은 규모는 2007년 70억 달러를 웃도는 역대 최대 규모다. 분기 배당금도 주당 48.5센트에서 73센트로 51% 인상했다. 짐 맥너니 보잉 최고경영자(CEO)는 “미래 현금 흐름에 대한 자신감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네트워크 업체 시스코는 2013년 11월 무려 150억 달러의 자사주 매입을 결정했다. 시장조사 업체 브리니어소시에이츠에 따르면 뉴욕 증시의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에 편입된 30개 대기업들이 2013년 자사주 매입을 승인한 규모는 2110억 달러(보잉 제외)로 집계됐다. 홈디포 170억 달러, 골드만삭스 108억 달러, 화이자 100억 달러, 월마트 150억 달러, AT&T 111억 달러 등이다. 30개 대기업 중 절반이 자사주 매입에 나섰다. 윌리엄 라조닉 미국 매사추세츠대 경제학과 교수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S&P500 지수에 편입된 500대 기업은 전체 순이익의 절반을 자사주 매입에 사용한 것으로 집계됐다.자사주 매입은 유통 주식 수 감소와 주당순이익(EPS) 증대로 이어진다. 주당 가치가 높아져 대표적인 주주 이익 환원 정책으로 꼽힌다. 기업들이 돈을 많이 벌었으니 주주들에게 그 이익을 돌려주는 행위는 미국식 ‘주주 중시 자본주의’에서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미국 유력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최근 1면 톱기사로 대기업의 자사주 매입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대기업들이 미래 성장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에는 소홀히 하면서 자사주 매입에 열을 올린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시스코의 자사주 매입 금액 150억 달러는 2012년 R&D의 2.5배에 이른다. 시스코는 그러면서 비용 절감 및 구조조정 차원에서 전체 직원의 4%에 해당하는 4000명을 해고했다. 투자와 고용, 임금 인상은 외면하고 주주 보상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라조닉 교수는 “자사주 매입은 기업 본연의 임무인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꼬집었다.
주당순이익으로 경영진 임금 결정
기업들이 자사주 매입에 열을 올리는 배경은 뭘까.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다우지수 편입 30개 대기업 가운데 26개 기업이 주당순이익을 경영진 임금을 결정하는 잣대 가운데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가 성적표를 경영진 성과 보수에 연동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스톡옵션 등 주식으로 보수를 받는 경영진도 많다. 경영진이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행위와 무관하지 않은, 이른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우려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내부 유보금은 넘쳐나지만 마땅한 투자처가 없는 만큼 어쩔 수 없이 ‘주주 가치 제고’에 나서고 있다는 현실론도 있다. 성장 전망이 어두워지면서 높은 투자수익률을 기대할 수 없어졌다는 것이다.
자사주 매입이 중요한 경영 행위로 자리 잡은 것은 불과 30년도 채 되지 않는다. 1985년 미국에서 자사주를 매입한 기업은 52개에 불과했다. 그 수가 올해 885개로 늘어났다.
워싱턴 = 장진모 한국경제 특파원 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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