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 겨냥한 BOP 비즈니스 주목… 아지노모토 등 첫발

‘빈곤층을 공략하라.’ 금융 위기 이후 일본 재계가 BOP(최하소득계층: Bottom of Pyramid) 비즈니스에 꽂혔다. ‘선진+고부가+자본재’의 전통적인 수출 전략 대신 ‘신흥+중부가+소비재’로 말을 갈아타려는 분위기다. 기존 전략으로는 환경 변화에 대처하기 곤란하다는 공감대에 따른 결과다. 세계시장에서 기업 경쟁이 격화됐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선진국에 맞춘 제품을 미세 조정 없이 그대로 신흥 시장에 내놓아서는 승산이 없어졌다. 유출 우려로 핵심 기술을 블랙박스처럼 움켜쥐면서 신흥 시장 변화 감지에 뒤처졌다는 반성도 한몫했다. 아베노믹스의 훈풍에 올라타기 위해서라도 수출 유인은 더 높아졌다.

‘BOP 비즈니스’는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부각된다. 이는 신흥국 저소득층 시장·인구와 관련된 사업 모델을 의미한다. 인구 40억 명의 신흥국·개도국 저소득층 시장 규모는 450조 엔(5조 달러)에 달한다. 일본 메이커의 자랑거리였던 고부가가치 상품과 대조되는 비즈니스다. 물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일본 정부도 공을 들이는 유력한 미래 엔진으로 점찍은 비즈니스다. 재계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주문도 많았다. 일례로 주무 부처(경제산업성)는 2009년을 ‘BOP 원년’으로지정했다. 이후 정부 주도의 보고서와 회의 개최를 통해 일원화된 BOP 정보 제공을 위해 노력 중이다. 필요하면 BOP와 관련한 해외시장 개발·지원 활동에 정부 예산도 투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GLOBAL_일본] 수익·명분 함께 잡는 ‘빈곤층 시장’
BOP는 풀어 해석하면 피라미드의 하단이다. 주로 개도국 이하의 경제적 빈곤 계층을 의미한다. 즉 BOP는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사업 모델이다. BOP의 양적인 시장 규모는 합격점이다. 국제금융공사(IFC)는 소득별 인구구성에서 연간 소득 3000달러 이하의 세대를 BOP층으로 규정하는데, 그 규모가 세계 인구의 약 72%를 차지한다. 잠재적인 시장 규모는 일본의 실질 GDP에 준하는 거액이다. 지역별로는 중동을 포함한 아시아가 최대 BOP 시장이다. 1990년대 이후 세계경제의 스포트라이트가 약 9억 명의 신흥국 중간 소득층(Volume Zone) 시장에 집중됐다면 BOP는 한 발 더 나아가 그 밑의 저소득층 구매력까지 아우르자는 발상의 전환인 셈이다.


선진국의 잠자는 기술, 후진국서 빛나
BOP 비즈니스는 요약하면 꿩 먹고 알 먹는 양수겸장의 사업 모델이다. 수익 추구(실익)와 빈곤 삭감(명분) 모두를 추구하는 신사업이다. 경제성부터 보자. BOP 시장은 미래 지향적인 잠재 성장성이 꽤 매력적이다. 저성장·고령화에 직면해 축소되는 선진 시장의 제반 한계를 극복할 유력 대안이다. 개도국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 이들 국민의 구매력이 확대돼 신규 시장 장악 효과도 기대된다. 실제로 세계시장은 돈이 되는 신흥 시장과 머리 아픈 선진 시장으로 이극 분화 중이다. 이때 BOP는 매력적인 대안이다. 미래 고객이 포진한 시장에 미리 진출해 브랜드를 침투시키면 짭짤한 후속 효과를 얻는다. 곧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는 빈곤층 시장에 군침을 삼키는 이유다. 선진국에선 이미 끝난 고도의 노하우와 잠자는 기술 등이 후진국에선 인프라 미정비 때문에 여전히 잘 팔린다.

대의명분도 매력 요소다. BOP 사업 모델은 빈곤 계층의 지원·구제라는 목적성이 강하다. 비정부기구(NGO)를 필두로 한 공익 추구의 국제기구가 관심을 갖는 이유다. 즉 환경·빈곤 등 개도국의 사회적 과제 해결을 위한 접근이 우선이다. 이 때문에 사회적 책임(CSR) 활동처럼 사회 공헌이라는 이미지 제고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국제기구의 지원 획득도 가능하다. 국제기구는 민간 기업과 손잡는 게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율적이기 때문에 꽤 적극적이다. 이 결과 빈곤 탈피도 가속화되고 있다. 해외 원조에만 기대는 절대 빈곤층보다 발전 단계에서의 일시 빈곤층이 늘고 있다는 것도 유리한 점이다. 교육 부재와 자원 왜곡 등에 따라 빈곤이 빈곤을 부르긴 해도 국제기구 등의 장기·효율적 원조 덕분에 그 악순환을 끊는 사례가 늘어나서다. 활력을 지닌 힘 있는 빈곤층의 증가다.
[GLOBAL_일본] 수익·명분 함께 잡는 ‘빈곤층 시장’
성공 사례는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유럽의 식품·일용품 메이커인 유니레버다. 국제기구의 지원을 얻어 감염 방지를 위한 개발 활동과 동시에 비누 판매에 나서 성공했다. 유니레버는 세제와 샴푸를 작은 용기에 소량씩 담아 저가에 제공해 개도국 저소득 계층의 구매 한계를 해소했다. 유니레버의 성공 함수는 ‘대량 소비=거대 인구×소량 구매×반복 사용’으로 완성된다. 국제기구의 지원도 있었다. 국제기구의 관민 파트너십을 활용해 계도 활동을 위한 인적·자금 지원을 제공받았다. 또 프랑스 대형 식품 회사인 다농은 방글라데시에서 아동 영양 상태 개선을 위해 영양가 높은 요구르트 제품을 개발해 저가에 판매함으로써 BOP 비즈니스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NGO·국제기구와 연대 필요
일본 기업의 움직임은 아직 초기 단계다. 구미 국가에 비해 늦었다. 다만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해 일찌감치 시장 진출을 모색한 기업도 있다. 아지노모토가 대표적이다. 회사가 원천 기술을 가진 맛(UMAMI)으로 조미료를 만들었는데, 이때 현지 소비성향에 맞는 가격·사이즈로 접근성을 높였다. 동전 한 닢으로 살 수 있는 저렴한 소량 패키지로 현지의 중산층 이하 BOP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맛과 기호를 현지화했을 뿐만 아니라 판매 수법도 현지 직원을 통함으로써 친근감을 높였다. 유통의 현지화다. 스미토모화학의 오리세트네트는 살충제를 넣은 수지로 만든 실을 모기장 재료로 사용해 BOP 시장에서의 선점 전략에 성공했다. 유니세프 등 국제기구를 통해 아프리카 등 50개국에 제공했다. 내구성이 높고 살충 효과가 5년 이상 지속되는 등 경제성이 검증되면서 세계무역기구(WTO)에서도 호평을 얻어 수요 확대를 꾀할 수 있었다. 특히 탄자니아 현지 생산을 통해 약 4000명의 고용 창출 효과를 내는 등 지역 경제에도 공헌한 것으로 평가된다.
[GLOBAL_일본] 수익·명분 함께 잡는 ‘빈곤층 시장’
다만 BOP 사업은 난이도가 높다. 거대 자금과 우수 인재의 투입 없이는 성공 확률이 낮다. 관련 임직원에 대한 대우와 만족도도 다르다. 이 때문에 사내 자원의 재조정·재배치를 통해 의식 전환과 역량 투입의 가능성을 점치는 게 우선이다. 물론 더 중요한 건 최고경영자의 상황 인식과 추진 의지다. 어려운 비즈니스인 만큼 경영진의 리더십이 중요해서다. 일본 정부는 성공 안착을 위한 5가지 과제를 선정했다. ▷비용과 불확실성 ▷기업의 고기능·고품질(High-end) 지향 ▷본업과 CSR 활동의 단절 ▷개발 원조 기구의 대응 지체 ▷빈약한 NGO와의 기업 연대 등이다.

해결책도 있다. 비용과 불확실성은 관의 지원으로 일정 부분 낮출 수 있다. 고품질·고기능 지향성은 명분 등 스토리를 만들어 마케팅에 활용하면 좋다. 또 기업의 공익 사업은 경쟁력을 가진 본업 위주로 시행하면 부업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다. 공공 기관과의 대응 지체는 강력한 의사결정 기구의 구축이 대안이다. 제일 중요한 한계는 기업과 국제기구·NGO 등과의 빈약한 연대다. 결국 이들과 선이 닿는 일본 국내 NGO를 활용해 거리감을 좁히는 게 필요하다. BOP 모델은 이제 논의 단계를 넘어 액션플랜이 필요하다는 게 일본 정부의 판단이다. 해외 진출을 원하는 기업엔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특임교수(전 게이오대 방문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