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비자물가 상승률 0%대 진입, 기준 금리 공격적으로 인하할 때

지난 11월 7일 유로화를 공동 통화로 사용하는 유로존 17개국의 중앙은행인 유럽중앙은행(ECB)이 전격적으로 기준 금리를 0.25% 포인트 인하했다. 인하 예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러도 12월에 내년 경제 및 물가 전망을 내놓으면서 금리를 내릴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였다. 저금리에다 풀린 돈이 부동산 시장으로 몰려들면서 거품을 우려하고 있는 독일의 반대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출신 마리오 드라기 총재가 이끄는 ECB는 기준 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인 0.25%까지 낮추는데 성공했다.

ECB가 독일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면서 금리를 인하한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크게 ▷디플레이션 진입 우려 ▷유로화 강세 ▷경기 침체 지속 등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디플레이션 진입 우려는 유로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나치게 빠르게 안정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유로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1.8%로, 인플레이션 억제 목표인 2.0%를 밑돈 이후 계속 1%대를 오르내리다가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둔화되고 있다. 지난 10월에는 0.7%로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3년 반 만에 처음으로 0%대에 진입했다.



만약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유로존 경제가 일본식 디플레이션으로 빠져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상황에 진입하게 되면 소비자와 기업들이 소비와 투자를 가급적 늦추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기업들의 매출과 이익이 줄어들면 고용과 소득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줄어든 고용과 소득이 또다시 소비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지면서 일본처럼 경기 침체와 물가 하락이 동반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이슈 인사이트] ECB 금리 인하가 韓銀에 주는 시사점
[이슈 인사이트] ECB 금리 인하가 韓銀에 주는 시사점
기준 금리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춘 드라기 총재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11월 초 유로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011년 2.7%에서 작년에는 2.5%로 낮아진데 이어 올해와 내년에는 1.5%로 더 안정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만약 글로벌 경제의 회복세 둔화 등으로 유로존 경제가 최근의 회복세를 이어가지 못한다면 내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대로 떨어질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국가별로 보면 9월 기준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이미 0%대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는 17개국 중 6개국(키프로스·그리스·아일랜드·이탈리아·포르투갈·스페인)이다. 이른바 남유럽 재정 위기국(PIIGS) 또는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키프로스)가 죄다 디플레이션 압력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스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7개월 연속 전년 동월 대비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8월과 9월엔 마이너스 1.0%까지 하락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로화의 강세는 이중고(二重苦)를 가져다줄 가능성이 높다. 유로화의 강세는 한편으로는 환율 하락에 따른 수입 물가의 하락으로 물가의 하락 안정세를 더 부추길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로화 강세가 최근 살아나고 있는 수출에 악영향을 미치면서 그나마 남아 있는 유로존의 성장 동력에 제동을 걸 가능성도 있다. 일부에서는 ECB의 이번 금리 인하가 이 같은 유로화 강세 흐름을 미리 차단하려는 선제적 대응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원화 강세 억제 위해서도 결단 필요
디플레이션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유로화 강세가 지속된다면 유로존 경제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디플레이션과 유로화 강세 둘 다 유로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유로존의 지난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기 대비 0.3%를 기록했다. 무려 7분기 만에 마이너스를 벗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디플레이션 압력에다 유로화 강세가 겹친다면 다시 마이너스로 내려앉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로존 회원국 간 성장률(2012년 기준)이 최고 1.8%(슬로바키아)에서 최저 마이너스 6.4%(그리스), 실업률이 최저 4.3%(오스트리아)에서 최고 25.0%(스페인)로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독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금리를 인하할 수밖에 없었던 속내를 읽을 수 있다.


성장률과 실업률뿐만 아니라 물가 상승률 또한 큰 차이가 나고 있는 17개 회원국으로 이뤄진 유로존과 다른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은행도 물가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할 때가 아닐까.


이쯤에서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으로 눈을 돌려보자. 한국은행은 지난 5월 기준 금리를 2.75%에서 2.5%로 인하한 이후 11월까지 6개월 연속 동결해 오고 있다. 필자를 포함한 일부 전문가들이 꾸준히 금리 인하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물가 안정에다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데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양적 완화 축소를 앞두고 금리를 움직이기가 어렵다는 판단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성장률을 보면 2011년 2.0%에서 올해 2.7~2.8%에 그치고 내년에도 잘해야 3% 중·후반대로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개월 연속 전년 동월 대비 1%대를 기록한 데 이어 9월, 10월은 각각 0.8%, 0.7%로 두 달 연속 0%대로 낮아지고 있다.

성장률과 실업률뿐만 아니라 물가 상승률 또한 큰 차이가 나고 있는 17개 회원국으로 이뤄진 유로존과 다른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은행도 물가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할 때가 아닐까. 다시 말해 한국은행도 디플레이션 및 저성장 지속 우려뿐만 아니라 원화의 강세를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기준 금리를 공격적으로 인하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은행은 기준 금리를 2.5%로 인하할 여력도 충분하다.


용어 해설

어원으로 보는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의미

최근까지 주요국의 근심거리는 ‘인플레이션(inflation)’, 즉 물가가 전반적·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이었다. 영어 인플레이트(inflate)는 원래 타이어나 풍선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는 것을 의미한다. 가격과 임금이 어느 정도 올라 줘야 상품을 파는 기업도, 임금을 받는 직장인들도 신이 날 것이다. 이에 따라 풍선이 여기저기 가볍게 둥둥 떠다닐 정도의 적절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풍선에 바람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면 바람을 빼기도 어렵지만 잘못 다루다가 터지기 십상이므로 과도한 인플레이션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반대로 ‘디플레이션(deflation)’은 물가가 전반적·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 디플레이트(deflate)는 인플레이트의 반대말로 바람을 뺀다는 뜻이다. 물가 하락은 통상 저성장과 실업 증가를 동반하면서 나타나기 때문에 요즘의 디플레이션은 물가 하락과 경기 침체가 동반되는 현상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람 빠진 풍선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것처럼 경제가 전반적으로 활력을 잃고 있는 상황이다.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은 미국과 유럽 또는 우리나라처럼 인플레이션이 이미 상당히 발생한 상황에서 물가 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리플레이션(reflation)’은 디플레이션을 벗어나 어느 정도 물가가 오르는 상태로 만드는 상황을 뜻한다.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