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15만 원이면 차값·연료비 모두 OK
만에 다시 찾은 실리콘밸리.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도로에 늘어난 전기차들이다. 테슬라 모델S와 닛산 리프가 변화의 두 주역이다. 모델S가 세금 혜택을 고려해도 차 값이 6만~8만 달러인 고급 모델인 반면 리프는 2만 달러대(세금 혜택 포함)면 살 수 있는 보급형 전기차다. 주행거리가 73~84마일로 훨씬 짧지만 차로 30분 이내에 주요 기업과 도시가 밀집한 이 지역 특성상 운행에 큰 무리가 없어 큰 인기다. 실리콘밸리는 전기차 혁명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시험 무대다. 전기차의 매력에 빠진 2명을 만나 생생한 사례를 취재했다. 2002년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에서 은퇴한 김 기노시타(71) 씨는 쿠퍼티노 애플 본사에서 2km 정도 떨어진 조용한 주택가 단독주택에서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다. 성 때문에 한국인으로 종종 오해 받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계 미국인이다. 아들이 한국인 며느리와 결혼했다며 반가워했다. ‘김’은 일본 성 ‘키미오’를 줄인 것이다.출퇴근용 세컨드 카로 ‘최고’
연구소에서 배터리와 연료전지 연구 프로그램 매니저로 오랫동안 일해 온 그는 웬만한 전문가보다 전기차에 정통했다. 은퇴 후 한때 닛산의 연료전지 개발 프로그램에 컨설팅을 하기도 했다. 이제는 컨설팅 일도 그만뒀지만 글로벌 자동차 기업의 연료전지 개발 동향은 여전히 그의 관심사 중 하나다.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새크라멘토에서 진행하는 시범 사업에 현대차도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했다고 귀띔해 준다.
그는 2011년 초 닛산 전기차 리프를 구입해 2년 반가량 운행했다. 닛산이 미국 시장에 리프를 2010년 말부터 공급했으니 거의 초기 구매자다. 그는 리프를 운전하면서 리프 전도사가 됐다. 샌프란시스코만 리프 동호회를 만들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연료전지 전문가였지만 연료전지차의 상용화 가능성에는 회의적이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전기차는 바로 눈앞에 와 있는 대안이다.
리프의 짧은 주행거리에 불만은 없을까.
“모든 사람에게 리프를 권할 수는 없죠. 왕복 100마일 이상 출퇴근한다면 충전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나처럼 하루 30~40마일 운행한다면 리프가 좋은 선택이죠. 평균적으로 미국에서 그 이상 운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모든 사람이 300마일 가는 차를 가질 필요는 없어요. 그런 일은 1년에 한두 번뿐이거든요.”
그의 차고에는 리프 말고도 2002년에 생산된 도요타 하이브리드 프리우스가 있다. 장거리 운행이 필요할 때는 리프 대신 이 차를 탄다.
그가 산 리프의 실제 구매 가격은 1만9800달러였다. 공장 출고가 3만3000달러(SL모델)에서 연방 세금 혜택(7500달러)과 주 보조금(5000달러, 현재는 최고 2500달러), 레벨2(240볼트) 충전용 6.6kW 충전 포트를 직접 설치해 닛산에서 돌려받은 700달러를 뺀 액수다. 여기에 가정용 레벨2 충전기를 덤으로 받았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딸 집을 종종 방문한다. 쿠퍼티노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44마일 거리다. 한 번 충전으로 왕복이 불가능했다. 그는 딸 집에 가면 항상 120볼트 일반 콘센트로 충전한다. 100% 충전까지 6시간이 걸린다. 그 외 대부분은 집 차고에서 충전한다. 외부 공공 충전소를 찾는 것은 한 달에 1~2번뿐이다. 쿠퍼티노에서 충전소가 가장 많은 곳은 애플 본사다. 하지만 이곳은 애플 직원만 충전할 수 있다. 인근 디엔자 칼리지에도 충전소가 있지만 충전기마다 회원 카드가 달라 사용이 불편하다. 쿠퍼티노 시청과 닛산 판매점도 그가 가끔 찾는 충전 장소다. 최근에는 대형 마트 타깃이 9대나 되는 충전기(최초 2시간 무료)를 설치했다. 충전하면서 할 일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을 매장으로 유인하려는 마케팅이다. 운행 중 충전할 일이 생기면 충전소 위치를 알려주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활용한다. 문제는 실제로 찾아가 보면 고장 나 있거나 일반 가솔린차가 주차돼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전기차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장애인 주차 구역에 차를 대면 250달러 벌금을 물어야 하지만 전기차 구역은 위반해도 따로 벌금이 없다. 충전이 다급한데 이런 경우를 당하면 황당할 수밖에 없다. 김 씨는 리프 운행 현황을 정리한 엑셀 파일을 보여줬다. 날짜별 주행거리와 충전 장소, 전기 사용 요금 등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구입 후 총 주행거리는 1만5293마일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충전 요금으로 234달러를 썼고 기름값 307달러를 절약한 것으로 계산돼 있다. 전기차의 또 다른 매력은 유지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그가 지출한 유지비는 타이어 교체에 쓴 20달러가 전부다.
스마트폰 앱으로 충전소 쉽게 찾아
전기차 구매자들의 걱정거리 중 하나는 배터리 성능 저하다. 시간이 갈수록 전기차의 핵심인 리튬이온 배터리의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닛산은 배터리 8년 보증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김 씨는 리프 동호회원이 개발한 스마트폰 앱 ‘리프 스파이’를 소개해 줬다. 자가 진단 장치(OBD)를 차량 내부에 설치해 평균 온도, 충전 상태 등 각종 데이터를 모니터할 수 있다. 그중 배터리 전류 체크 기능이 있다. 전류 수치가 70% 밑으로 떨어지면 배터리 보증 프로그램에 따라 교환 받을 수 있다. 1만5000마일을 주행한 그의 차는 92%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전기차 혁명의 도래를 낙관하고 있을까.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20년 내에 전기차로 모두 바뀌기는 어려울 겁니다. 석유회사들이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죠. 전기차는 그들의 주유소가 필요 없거든요.”
정직한(39) 전 갈라넷 대표의 집은 애플이 태동한 스티브 잡스의 옛 집 차고에서 몇 블록 떨어진 로스앨터스 처튼 애비뉴다. 최근 이 동네에도 전기차가 부쩍 늘었다. 정 전 대표의 집 주변만 따져도 리프를 타는 그를 포함해 한 집이 테슬라 모델S를 샀고 또 다른 집은 도요타의 전기차 SUV RAV4를 들여놓았다. 범위를 좀 더 넓히면 리프가 5대로 가장 많이 눈에 띈다.
정 전 대표가 실리콘밸리에 처음 자리를 잡은 것은 8년 전인 2005년이다. 일본에서 인터넷 포털 회사에 근무하던 그는 이곳에서 게임 업체 갈라넷을 창업했다.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부분 유료화 게임 모델을 미국 시장에 적용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부분 유료화는 게임 자체는 무료지만 각종 아이템을 유료로 판매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말한다. 그는 7년 동안 갈라넷을 매출 400억 원 규모로 키웠고 올 초 2000만 달러에 회사를 매각했다. 지금은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 바로 전기차다. “회사를 키우고 매각하면서 비즈니스는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파도가 칠 때 서핑보드에 올라타야 하는 거죠. 지금 전기차라는 새로운 파도가 오고 있어요. 얼마나 빨리 올 것인지, 어떤 형태로 올 것인지 모르지만 지금 준비해야 서핑보드를 멋지게 탈 수 있죠.”
그는 5월 초부터 리스로 리프를 타고 있다. 처음에는 테슬라 모델S를 사고 싶었지만 주문 후 6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마음을 접었다. 2년 약정에 3000달러를 계약금으로 냈고 매달 240달러(SL 모델)를 리스비로 지불한다.
짧은 주행거리가 가장 큰 숙제
2년 리스 프로그램은 실리콘밸리에서 리프의 인기를 끌어올린 1등 공신이다. 그 이유는 간단히 계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리프 공인 연비는 도심 주행의 경우 갤런당 129마일에 해당한다. 반면 아반떼 가솔린차는 갤런당 30마일에 불과하다. 리프가 아반떼보다 연비가 4배 이상 높은 셈이다. 아반떼에서 리프로 차를 바꾸면 연료비를 25%대로 낮출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주행거리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월 100달러 절약은 충분히 가능한 액수다. 이렇게 따지면 리스비로 매달 250달러를 지출해도 연료비 절약으로 100달러가 빠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월 150달러에 리프를 타는 셈이 된다.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것이다. 전기차 충전 장비는 레벨1, 레벨2, 직류 고속 충전 등 3종류로 구분된다. 레벨1은 미국의 일반 가정에 설치된 120볼트 콘센트를 가리킨다. 시간당 6마일 거리의 충전이 가능하다. 레벨2는 240볼트를 사용한다. 가정용 충전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시간당 10~15마일 충전이 가능하다. 교류 고속 충전은 480볼트 고압을 사용한다. 30분 이내에 배터리 용량의 80%까지 충전할 수 있다. 상업 충전소나 공공 충전소가 이 방식을 사용한다.
정 전 대표는 레벨2 가정용 충전기를 따로 설치하지 않고 120볼트 일반 콘센트에 꽂아 충전한다. 전기요금은 kWh당 13센트다. 예전에는 전기요금이 매월 100~120달러 나왔는데 리프를 충전하면서 150~170달러로 늘어났다. 리프 충전을 위해 50달러를 추가로 지출하는 것이다. 가솔린차를 타면 한 달에 2번 기름을 넣어 보통 기름 값으로 200달러가 듣다. 연료비가 200달러(기름값)에서 50달러(전기료)로 150달러 줄어든 것이다.
정 전 대표가 리프를 선택하고 나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엔진 진동 소음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전기차에 익숙해져 가솔린이나 디젤차를 타면 엔진 소음이 굉음처럼 느껴질 정도다. 전기차의 또 다른 매력은 예상을 뛰어넘는 성능이다.
“처음에는 전기차라 속도가 별로 나지 않을 것이라고 얕잡아봤어요. 하지만 초기 가속력과 드라이빙 성능이 탁월해요. 처음 BMW를 탔을 때 느꼈던 충격과 비슷하죠.”
반면 전기차의 유일한 단점은 짧은 주행거리다. 그가 리프를 몰고 가장 멀리 간 곳은 샌프란시스코다. 그 이상을 갈 때는 미니밴 혼다 오디세이를 탄다. 주행거리가 짧다 보니 항상 충전할 곳을 찾는 것이 큰 걱정거리다. 충전소 위치를 알려주는 스마트폰 앱은 많지만 대부분이 세부 정보가 빠져 있다. 플러그셰어는 충전소 위치 정보는 있지만 주차 요금이나 충전 요금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는 이런 불편에서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충전소 관련 정보를 통합해 제공하는 서비스다. 충전소 위치는 물론 주차 요금과 충전 요금, 현재 사용 가능 여부까지 알려주는 것이다. 여기에 예약 기능도 추가할 수 있다. 꼭 필요하면 추가 요금을 내더라도 충전하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서비스를 전기차 커뮤니티로 발전시킬 수도 있다. 충전소 사용 후기나 평가 정보를 회원들끼리 나누고 서로 운행 기록도 공유할 수 있다. 전기차를 처음 구입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장거리 운행을 위해 렌터카가 필요한 회원들에게 할인을 제공하거나 차고에 쉬고 있는 전기차를 서로 빌려 쓸 수 있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는 “전기차 사용자가 늘어나면서 전기차와 관련된 새로운 비즈니스가 수없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쿠퍼티노·로스앨터스(미국)=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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