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人質) 코드

흔히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신화는 실제 인간 역사의 변용(變容)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인질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는 독수리로 변해 미소년 가니메데스를 납치해 신들의 시중을 들게 한다. 또 황소로 변신한 제우스는 페니키아의 왕 아게노르의 딸 에우로페를 납치해 크레타섬에서 사랑을 나눈다.

성경 속의 인질 이야기는 좀 우울하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이집트 파라오의 아내로 넘긴다. 사랑하는 아내를 자신의 생존을 위한 볼모로 삼은 것이다. 한편 동생 요셉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이 기근에 허덕이다가 이집트로 온다. 식량을 관할하는 고위 관료가 되어 있었던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주동자였던 형 시므온을 인질로 붙든다. “고향에 가서 그대들의 막내 동생 르우벤과 아버지 야곱을 모셔오라!”


현대에는 불만을 이슈화해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인질을 이용하기도 한다.


한나라 무제가 서역으로 원정을 보냈던 장건은 13년간이나 흉노족에게 포로로 붙들려 있다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다. 그가 가지고 돌아온 서역에 관한 귀중한 정보가 훗날 실크로드를 여는 계기가 된다. 명나라 정통제는 몽골 오이라트 원정에 나섰다가 포로가 된다. 명나라 조정은 즉각 정통제의 동생을 황제로 세워 제국의 황제가 인질이 된 곤란한 상황을 벗어난다. 권력은 무섭다. 풀려난 형이 귀국하지만 동생 경태제는 황위를 돌려주지 않는다. 절치부심한 형은 몇 년 뒤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되찾는다.

중국 최근세사에서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이 대표적이다. 공산당의 홍군(紅軍)과 대치 중이던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개석이 전쟁을 독려하려고 서안에 온다. 이때 홍군과 내통한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이 공관을 급습해 장개석을 인질로 잡는다. “총통은 홍군 토벌을 중지하고 대일전쟁부터 치르도록 해 주시오!” 이 사건으로 수세에 있던 중국 공산당이 시간을 벌고 결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당하게 조건을 내걸고 볼모가 된 관우
우리 역사에도 인질 관련 비화가 많다. 관례에 따라 원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고려 왕자가 원나라 노국공주와 사랑에 빠진다. 본국에 돌아온 왕자는 1351년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 로맨스의 주인공이 바로 31대 공민왕이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인조는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의 예를 맹세한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이다. 그는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다.

‘삼국지’에서 인질을 얘기하려면 우선 인질의 범위부터 정해야 한다. 넓게 보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동한 말년부터 영제·소제에 이어 마지막 황제인 헌제에 이르기까지 역대 황제는 그야말로 외척이나 환관 혹은 동탁이나 조조 등의 지방 호족 세력에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운명까지 볼모로 잡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의 인질을 이야기하면 관우가 먼저 떠오른다. 조조는 하비성 전투에서 마침내 관우를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관우는 생포되기 전에 자결하려고 했지만 평소 알고 지내던 조조의 부하 장수 장료의 권유로 3가지 요구를 하며 조건부 투항한다. 첫째, 한나라에 항복하는 것이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유비의 두 부인을 보호한다. 셋째, 유비의 행방을 알게 되면 즉각 떠난다. 이게 협상 조건이지 어디 포로가 된 장수의 투항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충의(忠義)의 화신인 관우답다. 더 놀라운 것은 조조가 이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일단 관우를 잡아 둬 전향시켜 보자. 실패하더라도 관우 같은 맹장을 우리가 붙들어 두는 게 라이벌 유비에게 돌려보내는 것보다 백배 낫다.”

신야에서 서서(徐庶)를 만난 유비는 단번에 서서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그를 군사(軍師)로 삼는다. 서서는 탁월한 전략으로 조조군을 크게 무찌르고 번성을 점령하는 등 큰 공을 세운다. 이에 당황한 조조는 모사 정욱의 계책에 따라 서서가 효성이 지극하다는 것에 착안한다. 마침 조조의 본거지인 허창에 있던 서서의 노모를 볼모로 삼아 구금하고 노모의 필적을 흉내 낸 편지를 써서 서서를 허창으로 불러들이는데 성공한다. 아들이 속은 것을 깨달은 노모는 아들을 꾸짖고 스스로 목을 맨다. “네가 어찌 어미와의 사사로운 정에 매여 한나라 역적 조조에게 충성하려고 하느냐?”

오나라 손권은 의심이 많아 툭하면 국경 수비를 맡은 장수들을 의심하고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뒀다. 손권은 또 유비가 익주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갈근을 특사로 삼아 성도로 가서 형주를 돌려달라는 뜻을 전하게 했다. 이때 손권은 제갈근이 제갈량의 형이라는 것을 의식해 제갈근의 가족을 인질로 삼고서야 제갈근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한편 조조의 아들 조비가 헌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 자리(위문제)에 오르자 손권은 아직 오나라의 힘이 약함을 알고 위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몇 년 뒤 조비가 중앙 관직을 제수하겠다면서 손권에게 아들 몇 명을 올려 보내라고 하자 이를 거부하고 위에 맞서기로 한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어찌 조비에게 인질로 바치랴?”


전투력 보충 위해 조선인 60만 명 끌고 가
통상 인질은 상대방 혹은 적국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개인이나 집단을 강제로 구금하는 비열한 짓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정복한 지역에 의무를 강제하려고 그 지역 왕자를 인질로 잡아갔다. 서양 중세에는 전투력을 확보하기 위해 기사들을 포로로 잡아 이용했다. 병자호란 전후로 끌려간 60만 명의 조선인은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이 모자란 청나라의 전투력을 보완하기 위한 측면이 컸다. 현대에는 불만을 이슈화해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인질을 이용하기도 한다.
[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내 아들을 인질로?” 황제 명령 거부한 손권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질을 잡는 동기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도구적인(instrumental) 측면이다. 말 그대로 해상에서 배를 납치하는 소말리아 해적처럼 인질의 몸값을 얻는 등 특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경우다. 다음으로 뭔가를 표현하기 위한(expressive) 경우다. 리암 니슨이 주연한 영화 ‘테이큰(2012년)’처럼 개인이나 집단의 복수가 목적인 경우가 있다. 혹은 좌절·분노 등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경우도 있다. 이라크 반미 조직인 알 자르카위가 인질을 잡아다가 무자비하게 참수하는 장면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 그러한 예다.


사족: 전쟁·재난·참사나 납치 등의 환란(患亂)을 겪고 나면 사람들은 통상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린다고 한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소현과 봉림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노모와 부친에게 닥친 환란 앞에서 서서와 제갈근의 가족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우리는 자기 인생을 볼모로 턱없이 자학하거나 혹은 남의 인생을 볼모로 무고하게 상처를 주며 환란을 자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