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매각’ 제일모직 어떻게 바뀌나

지난 9월 23일. 삼성 계열사인 제일모직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삼성그룹의 모태 사업인 패션 사업을 12월 1일자로 삼성에버랜드에 양도하기로 전격 결정한 것. 몇 년간 루머로만 돌던 일이 현실이 됐다. 1954년 직물 사업으로 시작한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의 모태 사업이기 때문에 단지 루머일 뿐 현실이 되기는 어렵다고 예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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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러가지 그룹 내 승계 구도 및 사업적인 이유로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이번 패션 사업 양도가 단지 사업적인 의사결정이었다고 생각하는 시각보다 그룹 내 중요한 승계 구도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그룹 내 승계 구도를 감히 예측하거나 언급하기가 조심스럽기 때문에 사업적인 측면에서의 향후 제일모직의 행보를 예상해 본다.

패션 부문 인수 가격은 총 1조500억 원이다. 2012년 에버랜드의 총매출은 3조 원 수준이었다. 사업 비중은 FC(Food Culture) 39%, E&A(Engineering & Asset) 43%, 레저 사업 11% 수준이었다. 제일모직 패션 사업이 연간 매출 1조7000억 원 수준이기 때문에 에버랜드 내에서도 가장 큰 사업부가 된다.


바뀔 사명 ‘제일인더스트리’ 유력
현재 에버랜드의 주력 사업들과 패션 사업의 화학적 결합은 크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소위 ‘먹고 놀고 입는’ 사업은 이제 에버랜드로 집합했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에버랜드의 현재 최대 주주는 이재용 부회장 25.1%,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부사장이 각각 8.37%씩 보유하고 있다.

제일모직이라는 사명도 연말쯤 변경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 사명이 확정된 건 아니지만 제일인더스트리(Cheil Industry)나 삼성전자재료 정도의 사명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사업적인 관점에서의 이번 패션 부문 양도는 제일모직에 실보다 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제일모직이라고 하면 패션 부문이 가장 대표적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이 부문은 매출 비중 29%, 영업이익 비중 18% 수준으로 이미 전자재료 영업이익 비중 58%에 비해 크게 기여도가 떨어지는 사업이다(2013년 예상 실적 기준).

게다가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론칭한 패스트 패션(SPA) 브랜드 에잇세컨즈(8Seco nds)의 국내 점포 확대 및 중국 진출에 따른 실적 악화 및 투자비용 부담도 이제 없어졌다. 에잇세컨즈는 이른 시간 내에 국대 대표적인 SPA 브랜드로 성장했다. 하지만 단기간에 고성장을 시도함에 따라 점포 확대 비용 등이 최근 전사 실적에 악영향을 주는 실정이다.

2014년 이후에는 중국 시장에도 진출할 전망이기 때문에 에잇세컨즈가 1~2년 내에 흑자 전환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자재료 및 화학 소재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이번 결정은 매우 긍정적으로 보인다.

1조500억 원이라는 인수 가격이 적절했는지 여부는 현재 시점에서 판단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손해를 보고 넘기지는 않은 듯하다. 2013년 패션 부문의 예상 영업이익이 600억~700억 원 수준임을 감안했을 때 시장 가치보다 좋은 가격에 넘긴 것으로 생각된다.

비슷한 매출 규모인 LG패션의 2013년 예상 매출은 1조5000억 원, 영업이익 801억 원으로 주가수익비율 12~13배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신한금융투자 추정치). 1조 원이 넘는 금액을 받게 되기 때문에 제일모직의 패션 사업은 시장 가치로는 LG패션보다 높은 가격을 받은 셈이다. 이에 따라 굳이 계산하자면 남는 장사라는 얘기다. 물론 1조 원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1조500억 원이라는 금액을 기반으로 제일모직이 향후 어떠한 분야에 집중하게 될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예상하는 바와 같이 전자재료 및 소재 분야에 집중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제일모직의 전자재료 사업은 크게 디스플레이·반도체·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소재로 나눌 수 있다.

디스플레이 소재는 편광 필름(빛을 통과시키거나 차단하면서 LCD 화면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 필름 소재)을 중심으로 한다. 이 사업부는 과거 에이스디지텍과의 흡수 합병을 통해 외형을 키웠고 올해 2분기 정도부터 본격 흑자 전환한 상태다. 향후 성장 가능성이 큰 사업은 아니지만 연매출이 6000억 원에 달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흑자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

반도체 소재 사업 역시 SOH(Spin on hardmask) 등의 고부가가치 소재에 따라 매년 외형 확대가 진행되고 있다. 삼성전자의 메모리 및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의 미세 공정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이러한 소재는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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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기대를 모으는 분야는 OLED 분야다. 삼성전자의 초고가 스마트폰(가령 갤럭시 S4나 갤럭시 노트3) 위주로만 탑재되고 있는 OLED 패널은 향후 OLED TV 시장이 본격 확대되면 성장의 속도가 매우 가파를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2012년 초에 55인치 OLED TV를 발표한 이후 이를 상용화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최근 삼성전자는 곡면형 OLED TV로 프리미엄 TV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일모직은 최근 몇 년간 OLED 패널을 생산할 때 필수적인 유기 재료 생산에 사력을 다했다. 스마트폰 부품과 달리 다른 유기 재료와의 호환성까지 고려해야 하는 OLED 유기 재료는 고객사로부터 승인받기 매우 까다로운 분야다. 제일모직도 실제로 양산을 승인받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2012년 말부터 전자수송층(ETL) 등을 납품하기 시작했으며 정공수송층(HTL)도 곧 고객사로 납품이 가능한 상황이다.


모델은 LG화학 같은 글로벌 IT 소재 기업
제일모직 매출 중 OLED 유기 재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까지 매우 낮은 상황이다. 연매출이 아직까지는 200억 원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OLED TV 시장이 본격화된다면 매출액의 빠른 상승은 시간문제다.

더 좋은 소식은 OLED 유기 재료 생산 시설이 막대한 시설 자금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업이기 때문에 이번 패션 사업 매각으로 얻을 1조500억 원이라는 돈을 더욱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최근 독일 OLED 소재 업체를 인수한 바와 같이 또 다른 OLED 업체 및 향후 신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인수·합병에도 뛰어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직까지 예측하기는 어려운 시나리오지만 삼성정밀화학이나 삼성석유화학과의 제휴 및 합병을 통한 외형 성장도 가능하다. 현재 제일모직의 전자재료 사업 및 케미컬 사업은 사실상 특정 정보기술(IT) 업종에 국한돼 있다. 이 때문에 이들 사업만 가지고는 삼성그룹이 원하는 수준의 전자재료 회사로 성장하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계열사를 통한 수직 계열 효과를 많이 누려 왔다. 삼성전자는 삼성전자 내부의 반도체·디스플레이·LED 사업과 삼성전기·제일모직 등을 통해 상당한 비중의 부품 소재를 공급받아 왔다.

LG전자 역시 반도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품 소재를 LG디스플레이·LG이노텍·LG화학을 통해 조달했다.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업체들은 아니지만 이러한 구도 때문에 제일모직과 LG화학은 자주 비교돼 왔다.

현재까지는 규모의 경제를 갖추고 다양한 라인업을 갖춘 LG화학이 대표적인 IT 소재 기업으로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패션 사업을 떼어내고 본격적인 전자소재 전쟁에 뛰어든 제일모직의 향후 행보에 따라 또 하나의 글로벌 전자 소재 업체의 탄생을 기대해 볼 수 있게 됐다.


하준두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