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유로화

글로벌 금융 위기 직전만 해도 유로화는 사실상 국제 유일의 기축통화인 달러화를 대신할 강력한 경쟁 통화로 부상하고 있었다. 1999년 출범 직후 한동안 신뢰성 시험이 이어지면서 유로화가 약세를 보이기는 했었지만 2002년 이후 국제적으로 외화보유액 다변화 등의 수혜를 누리면서 유로화는 강세 일변도를 구가했던 것이다.
<YONHAP PHOTO-1754> Latvian Prime Minister Valdis Dombrovski (R) and Finance minister Andris Vilks (L) give a press conference on the adoption of the euro by Latvia on July 9, 2013 at the EU Headquarters in Brussels.    AFP PHOTO / GEORGES GOBET../2013-07-09 20:54:11/
<저작권자 ⓒ 1980-2013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Latvian Prime Minister Valdis Dombrovski (R) and Finance minister Andris Vilks (L) give a press conference on the adoption of the euro by Latvia on July 9, 2013 at the EU Headquarters in Brussels. AFP PHOTO / GEORGES GOBET../2013-07-09 20:54:11/ <저작권자 ⓒ 1980-2013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미국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시장의 불안으로 곤욕을 치르면서 달러화 위기설이 부상하는 가운데 달러·유로 환율은 1.6달러까지 상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장춘몽이랄까. 2008년 9월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위기에 직면하면서 글로벌 차원에서 금융 위기가 확산되자 유로화는 폭락세로 돌변했다. 서브프라임 사태의 불똥이 대서양 건너 유럽에도 번진 것이다. 반대로 달러화는 국제적으로 달러 유동성 경색이 심화되면서 오히려 초강세를 보였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리먼 사태로 폭발한 금융 위기의 충격이 미국 이상으로 유럽에 더욱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이는 무엇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담보로 한 각종 첨단 구조화 상품에 대한 최대 투자자가 바로 유럽 투자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종잣돈 대부분이 바로 미국의 단기 금융시장에서 빌린 것이었다.


인류 최초의 민주적 통합 실험
그래서 리먼 사태로 각종 구조화 상품에 대한 손실이 커진 것은 물론 미국 단기 금융시장이 경색되면서 대규모 자금 회수 움직임이 확산되자 유럽계 투자자들은 거의 아노미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유로화 폭락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 서브프라임 관련 노출이나 연계성이 극히 미미한 우리나라마저 외화 유동성 위기에 빠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유럽계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외자가 빠져나간 탓이다.

다행히 유럽중앙은행(ECB)과 영국 중앙은행 등 역내 중앙은행들이 대규모 유동성 공급에 나서고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와 통화 스와프를 확대하는 등의 노력에 힘입어 유럽의 유동성 위기는 어느 정도 막을 내리는 듯 했다. 하지만 이내 2009년 초 유럽의 변방인 동유럽 신흥 시장의 부도 위험이 부각되면서 관련 노출이 큰 유럽계 투자자들은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일시 회복세를 시도하던 유로화 가치도 다시 급락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불안, 또 그와 맞물린 금융 위기라는 외부의 충격이 문제였다. 따라서 국제적 유동성 공조 등에 힘입어 글로벌 금융 위기가 진정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유로화도 반등세를 나타냈다.

하지만 2010년이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이제 유럽 선진국의 주변부, 즉 그리스를 비롯해 포르투갈·스페인·이탈리아 등 남유럽의 재정 위기가 연이어 확산된 것이다.

물론 재정 위기 역시 금융 위기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금융 위기에 대응해 정부 지출을 대거 확대하면서 재정이 급속히 악화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다 통합 유럽의 취약 고리인 역내 주변부의 문제점이 가세했다. 유럽경제 통합 과정에서 경쟁력 강화 노력 없이 금리 하락과 통화가치 상승을 통해 일종의 ‘무임승차’를 누려 왔던 결과다. 게다가 이에 맞선 유럽 차원의 정책 대응은 지극히 더디고 미온적이었다.

그 영향은 유럽 통합 체제, 즉 유로존의 신뢰성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졌다. 그 영향으로 달러·유로 환율은 1.2달러 이하로 떨어지면서 2006년 초 이후 최저치, 특히 통합 유럽 출범 당시 수준(1.18달러) 근처까지 내려섰다.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위기국에 대한 자금 지원이 이뤄지고 유럽 통합 재건을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모색되면서 유로존도 위기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듯 했다. 유로화 역시 회복세를 나타냈다. 하지만 말만 무성할 뿐인 통합 제고 노력은 각국의 정치적 갈등과 맞물리면서 거듭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통합 유럽의 견고성에 대한 각종 투기 공격이 이어지면서 2011년 후반부터 유로화는 다시 하락세로 돌아섰다.
[유럽 경제 부활에 베팅하라] 위기의 통화에서 재건의 희망으로
2012년 봄에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우려, 이른바 ‘그렉시트(Grexit: Greece와 Exit의 합성어)’가 쟁점화되면서 ‘통합 유럽 체제가 결국 해체되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가 확산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결단의 순간이 도래한 듯 했다. 1999년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적 경제 통합 실험이라고 할 통합 유럽 경제 체제의 출범, 특히 단일 통화인 유로화의 출범 이후 14년에 걸친 노력이 와해 지경에 내몰린 것이다. 정치 통합 없는 경제 통합의 한계, 통화 통합의 이면에 놓인 역내 각국 간 불균형의 누적에 관심이 고조되면서 대내외적으로 통합 유럽 체제의 필요성에 대한 청산주의적인 분위기가 부각됐다.

그러나 위기는 충격요법이 되기도 한다. 그동안 미적미적하던 유럽 내 공동 금융 감독 및 단일 정리 기구 등의 필요성이 집중 조명 받으면서 2012년 6월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유럽의 ‘은행동맹’ 구상에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체제 붕괴의 위험에 직면해 유럽 내부적으로 공동 생존의 필요성이 부각된 결과다. 게다가 역내 전체적인 물가 안정에만 초점을 맞춰 다소 협소하고 보수적인 정책 운영에 치중하던 ECB가 이제 역내 회원국 각국의 개별적인 여건을 고려하는 선별적이고 공세적인 정책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며 위기관리의 유연성을 보인 점도 고무적이었다. 그 결과 유로화는 다시 회복세를 시도하고 있다.

체제 존망의 위기라는 급박했던 순간은 지나갔지만 아직 통합 재건을 위해서는 갈 길이 먼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올해 초만 해도 유로존의 변방 중에 변방이라고 할 키프로스마저 부도 위험에 직면하면서 유럽 위기가 새롭게 조명 받은 바 있고 포르투갈이나 그리스 등의 정치 불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당초 계획했던 은행 동맹의 구체적 일정이나 세부 사항 역시 계속해 지연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유로존 체제의 향방을 둘러싸고 단속적이고 간헐적인 불안의 소지는 언제나 잠재해 있는 셈이다.


가능성 낮아진 붕괴 시나리오
다만 일종의 학습 효과랄까, 이제 그 충격이나 파급력이 확대 증식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그때 악재들과 마주치며 유로화가 이따금 약세를 보이고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최근 Fed의 출구전략과 같은 대외 변수들이 역내외 금융시장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반면 침체 일로를 거듭하던 유럽 경제에는 조금씩 서광이 비치고 있다. 일본식 장기 불황의 그늘에서 헤매던 유로존 경제가 지난 2분기에는 7분기 만에 플러스 성장세를 보인 것이다. 물론 이 같은 회복세가 얼마나 지속 가능한 것인지, 또 대외 환경의 불확실성에 따른 재침체의 위험은 없는지 의구심도 크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유럽의 취약성보다 다른 곳의 취약성이 더 쟁점화되고 있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유로화 및 유로존의 미래가 마냥 장밋빛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암울한 시절만 이어질 것으로 예단하는 것도 문제다. 물론 1990년대 이후 장기 불황의 늪에 허덕여 온 일본도 중간 중간 회복세를 보이다 이내 좌절한 바 있다. 유로존 역시 그 전철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동안 통합 체제의 붕괴 위험에 치중했던 시장의 시선은 조금씩 유로존의 회생 가능성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로화에 대해서도 점차 반복되는 위기의 통화라는 오명을 접고 통합 재건을 지탱할 교두보로서 새롭게 관심이 쏠린다.

그리스나 키프로스 등의 탈퇴 위험이 남긴 교훈 하나가 있다면 유로화 붕괴가 초래할 더 큰 충격의 소지라고 할 수 있다. 통화가 각국의 주권 사항인 것은 분명하지만 유로화 탈퇴로 얻을 수 있는 편익(가령 자국 통화의 대규모 평가절하)이라는 것이 경제나 시장 통합 과정에서 얻은 편익의 포기를 만회하기에는 너무 유약한 데다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로벌 금융 위기 과정에서 입증된 달러화의 막강한 파워조차 그 이면에 내재된 취약성, 특히 재정 악화나 출구전략의 파괴적 동학 등을 완전히 상쇄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로화는 여전히 달러화와 경쟁할 대안 기축통화로서의 매력과 함께 유럽 재건의 희망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담당할 기회를 찾고 있는 셈이다.


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경제연구실장 jangbo@hanaf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