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공무원 시험 응시자 45만 명, 평균 경쟁률 46.9 대 1. 서울 서초구 인구, 경기도 평택시 인구, 수학능력시험을 보는 고교생 수보다 많은 인원이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제2의 수능’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안정적인 직장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기 때문이라지만 공무원 시험 열기는 비정상적으로 과열되고 있다.
공무원 시험 준비에 인생을 담보 잡히고 수년간 목매달고 있는 공시(공무원 시험) 낭인도 속출하고 있다.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 낭비와 인재의 적체 현상이 심화되는 현상을 두고만 보기엔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젊은 인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공무원이 되려는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공시 열풍 현상을 진단해 본다.
[COVER STORY] 최고 인기 직업을 향한 전쟁, 공무원 열풍 어디까지
서울 소재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김나영(31·가명) 씨는 재학 시절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왔다. 졸업 후 공무원 시험을 도전하던 중 지역 도시관리공단에 합격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준공무원 신분으로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근무하면서 담당 공무원과 대면할 일이 많았는데 김 씨는 철저한 ‘을’이었다. 공단 생리상 관련 공무원의 지시를 받아 업무를 진행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김 씨는 고민에 휩싸였다. 좀 더 나은 직업을 꿈꾸며 기존 직장을 그만뒀다. 김 씨는 결국 공무원 시험이 여러 상황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공무원 시험은 공부만으로 합격할 가능성이 있고 기업 채용보다 평등하게 경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공무원이 되면 ‘을’이 아닌 ‘갑’이 되는 지위 상승, 안정적 고용과 공무원연금까지 보장된다. 사회적 시선 역시 고려했다. 김 씨의 부모도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고 공무원은 결혼하는 데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김 씨가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이유와 동기는 충분했다.

“공무원을 하겠다는 직업의식이 투철한지 스스로 생각해 봤어요. 폐쇄적 직장 문화, 무사안일주의 등이 성격에 맞지 않을 것 같기는 했지만 일단 들어가면 잘 동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공무원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면 되니까요.”

김 씨는 직장을 그만둔 지 어느덧 4년이 돼 가고 있다. 지속적으로 국회사무처 8급, 국가세무직 9급 등 시험을 보고 있지만 아직 기대하는 합격 소식은 없다. 그는 지난 7월, 9급 공무원 시험을 치렀다. 스스로 채점해 봤지만 이번에도 합격권에 들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8월에 있을 경기도 9급, 9월에 있을 서울시 9급 시험에 대비해 묵묵히 도서관에서 기출문제 풀이에 집중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대인 관계가 없어져 사회성이 점점 떨어져요. 그래도 포기하지만 않으면 결국 합격으로 끝나는 게 공무원 시험이에요. 올해 안에는 꼭 합격할 수 있을 거예요.”

대한민국 젊은 세대가 공시 열풍에 휩싸여 있다. 최근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청년 취업 준비생의 3분의 1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고교생·가정주부·직장인까지 공시 열풍이 확대되고 있다.

공시 열풍의 주된 이유는 경기 불황으로 채용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양질의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평생 고용 시스템, 각종 복지와 공무원연금, 어렵지 않은 직무 등이 일반적인 공무원의 매력을 설명하는 이유다. 하지만 김 씨의 사례를 보면 공시 열풍의 더 깊숙한 이유를 읽을 수 있다. 갑을 주종 관계가 심한 한국 사회에서 공무원은 상당수 갑이라는 풍조도 반영돼 있는 것이다. 앞의 김 씨도 공무원의 지시를 받는 일을 하다가 ‘차라리 갑이 되자’는 생각으로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게 됐다.

주목할 점이 또 있다. 공무원 응시자 중 상당수가 부모의 권유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부모들이 자녀를 갑 지위가 되길 바라고 사회적 시선이 좋다는 이유로 수년간 뒷바라지를 각오하며 공무원 시험에 도전할 것을 주문한다. 전후 세대인 지금의 부모들은 대부분이 수십 년간 을의 입장에서 일에 매달려 고생해 왔다. 그리고 최근 경제 위기, 고용 불안을 겪으며 명예퇴직을 겪은 세대다. 자신이 겪은 고생을 자녀들이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늘고 긴’ 공무원이 되길 바라는 것.

류동희 한국취업진로교육원 원장은 “부모와 학생이 공무원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사회적 안정성이 높은 공무원을 희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무원이란 직무는 사회적으로 볼 때 창의성을 발휘하거나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일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 공시 열풍으로 사회적 비용이 낭비되고 공무원 관문 앞에서 많은 인재들이 적체되는 현 상황을 이제는 타개해야 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취재 이진원·이현주·김민주·김보람 기자·김은진 인턴기자
사진 김기남·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