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연·기금의 투자 혁명 - 저성장과 고령화 파고 넘는다① 노르웨이 GPFG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지는 가운데 거대 연·기금들의 공격적인 행보가 도드라진다. 이들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뚜렷해진 저성장과 고령화라는 이중고를 헤쳐 나가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수백, 수천만 가입자들의 노후가 이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수익률이 하락한 채권 대신 주식·부동산·인프라에 눈을 돌리고 숨겨진 투자 기회를 찾아 아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신흥 시장을 샅샅이 훑는다. 한경비즈니스가 세계 주요 연·기금들의 투자 혁명 현장을 취재해 6회에 걸쳐 연재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세계 최대 주식 투자가’로 꼽히는 노르웨이의 정부연금펀드글로벌(GPFG)이다.
[SPECIAL REPORT Ⅱ] ‘신흥시장·성장기업 잡아라’…투자 전략 대전환
오슬로 중앙역에서 남서쪽으로 5분쯤 걸으면 노르웨이 국립 현대미술관이 나온다. 1906년 건축된 옛 노르웨이 중앙은행 건물을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미술관 앞 작은 공원은 주변에 주요 은행들이 밀집해 있어 ‘은행 광장(Bankplassen)’으로 불린다. 현재 노르웨이 중앙은행은 이 공원을 끼고 오른쪽에 자리해 있다. 겉보기에는 소박한 3층 건물로 보이지만 한 구역 전체를 요새처럼 둘러싸고 있을 만큼 큰 규모다.

지난 4월 26일 오전 9시 이 건물 지하 1층 기자회견장에 윙베 슬링스타 노르웨이은행자산운용(NBIM) 최고경영자(CEO)가 모습을 나타냈다. NBIM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연·기금인 노르웨이의 정부연금펀드글로벌(GPFG) 운용을 전담하고 있다.

“올 1분기 GPFG가 5.4% 수익률을 달성했습니다. 총자산도 4조1820억 노르웨이 크로네(약 821조 원)로 불어났고요. 미국과 일본 주식이 큰 기여를 했습니다.”

1분기 운영 성과를 발표하는 슬링스타 CEO의 표정엔 강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벤치마크 지수를 0.3% 포인트 앞지른 좋은 성적이었다. GPFG는 작년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13.45%의 수익률을 기록한 바 있다. 슬링스타 CEO의 발표 내용은 외신을 타고 순식간에 전 세계로 타전됐다.
[SPECIAL REPORT Ⅱ] ‘신흥시장·성장기업 잡아라’…투자 전략 대전환
주식 비중 60%…세계 시장 ‘큰손’

자산 규모로 보면 세계 최대 연·기금은 단연 일본 공적연금(GPIF)이다. 하지만 GPIF는 자금의 80% 가까이를 국채에 투자한다. 그것도 일본 국채 비중이 압도적이다. 반면 GPFG는 주식 비중이 60%에 달할 뿐만 아니라 100% 해외 기업에만 투자한다. GPFG가 세계 최대 주식 투자가로 불리는 이유다.

NBIM는 분기마다 기자 간담회를 열어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한다. 이날도 슬링스타 CEO가 직접 나서 20분간 투자 성과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어 20분간 질의응답이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각 언론사별로 슬링스타 CEO와 스탠딩 인터뷰가 진행됐다. 시간은 3분으로 엄격하게 제한됐지만 참석한 모든 언론사에 똑같은 기회가 주어졌다. 간담회 내용은 동영상으로 제작돼 유튜브에도 공개된다.

이날 가장 큰 화제는 NBIM의 볼보 인사추천위원회 참여 소식이었다. 4월 4일 열린 볼보 주주총회에서 슬링스타 CEO가 인사추천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것이다. 볼보의 인사추천위원회는 이사진 선임과 급여 결정 권한을 갖고 있다. NBIM이 투자 기업의 인사추천위원회에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예고하는 신호탄인 셈이었다.

NBIM은 세계 7427개 기업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 550개 기업에서는 10대 주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계 최대 사모 펀드인 블랙록(9%)·네슬레(2.57%)·로열더치쉘(2.3%)·HSBC(2.52%)·BP(2.25%) 등 거대 글로벌 기업들의 주요 주주이기도 하다. 슬링스타 CEO는 “대형 투자자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며 ▷지분율 5% 이상 ▷상위 5대 주주 ▷지분 가치 10억 달러 등 3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시장에서는 대략 10개 기업이 이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NBIM은 볼보에 이어 핀란드 제지회사 스토라엔소의 인사추천위원회에도 참여할 계획이다.



미래 대비한 저축…매년 4%만 활용

NBIM이 운용하는 GPFG는 명칭에 ‘연금(Pension)’이 들어 있지만 일반적인 연·기금과는 큰 차이가 있다. GPFG는 노르웨이 북해 유전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모아 운용한다. GPFG의 돈이 노르웨이 국민들의 연금 지급에 직접 쓰이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GPFG는 오히려 국부 펀드에 해당한다. 오이스타인 숄리아 NBIM 홍보 고문은 “1990년 재무부에서 원유 수익을 모아 펀드를 만들기로 결정했다”며 “20년 후 은퇴자 급증에 대비해 저축을 해놓자는 취지였다”고 말했다.

1969년 북해 에코피스크 유전의 발견은 노르웨이 국민에게 엄청난 축복이었다. 노르웨이 지역 북해 유전의 매장량은 총 290억 배럴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노르웨이는 세계 5위 원유 수출국이자 세계 3위 가스 수출국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원유와 가스가 전체 수출의 50%,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한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원유로 벌어들인 돈을 몽땅 써버리지 않고 미래를 위해 저축한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1990년 ‘오일 펀드’가 설립됐지만 실제 자금이 들어온 것은 1996년부터다. 펀드 운용은 노르웨이 중앙은행이 담당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정부와 정치권의 영향에서 독립돼 있고 전문 인력을 갖추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초기에는 중앙은행의 외화보유액 관리 부서에서 이를 맡아 함께 운용했다. 100% 해외 국채 투자였다.

펀드 유입 자금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국채 투자. 1998년 재무부에서 펀드 자산 40%를 주식에 투자하기로 결정하고 중앙은행 내부에 이를 뒷받침할 전담 부서를 신설했다. NBIM이라는 독특한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숄리아 고문은 “외화보유액과는 다른 목표, 다른 규모로 펀드를 운용할 조직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NBIM은 노르웨이 중앙은행의 기존 통화정책 부서들과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숄리아 고문은 “NBIM은 철저하게 돈을 버는 게 목적”이라며 “임금 체계는 물론 인사 부서와 정보기술(IT) 시스템도 따로 구축했다”고 말했다. 현재 NBIM 인력은 300명대로 불어나 있다. 노르웨이 중앙은행 인력의 절반에 해당한다. 오슬로를 중심으로 런던·뉴욕·싱가포르·상하이에 현지 사무소를 두고 있다.

초기에는 원유 수입을 전액 펀드에 투자하는 원칙을 엄격하게 지켰다. 하지만 유가 상승으로 펀드 규모가 급격히 커지면서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2001년 도입된 재정 규칙은 그 타협점이다. 펀드 원금은 그대로 두되 투자 수익은 빼내 사용하자는 것이다. 4%가 기준선으로 설정됐다. 원유에서 발생하는 매출에는 78%의 높은 세금이 붙는다. 이 세수가 GPFG(옛 오일 펀드)로 이전된다. 국제 유가에 따라 매년 1000억~4000억 노르웨이 크로네가 펀드로 들어온다. 작년에는 3000억 노르웨이 크로네(약 59조 원) 수준이었다. GPFG 총자산을 대략 4조 노르웨이 크로네라고 치면 4%에 해당하는 1600억 노르웨이 크로네(약 31조 원)가 매년 펀드에서 인출돼 정부 예산으로 활용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숄리아 고문은 “노르웨이 정부 예산의 10%에 해당한다”며 “이 수입이 없다면 노르웨이 병원들의 현대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매년 4% 이상 수익률을 올린다면 펀드 자체는 영원히 지속된다”고 말했다.

GPFG의 투자 전략은 그동안 두 차례 중대한 변화를 경험했다. 우선 2007년 재무부가 40%인 주식 투자 비중을 60%까지 끌어올리기로 결정했다. 국제 유가가 고공행진을 계속하면서 펀드로 엄청난 신규 자금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전환점은 2012년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와 유럽 재정 위기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핵심은 유럽 투자 비중 축소, 아시아 등 신흥시장 확대로 요약된다.

NBIM은 GPFG의 최종 목표를 ‘펀드의 장기적인 국제 구매력 유지’로 요약한다. 이를 위해 세계 실물경제를 그대로 반영한 투자 포트폴리오 구성을 추구한다. 2011년 기준으로 투자 자산을 지역별로 나누면 유럽 54%, 아메리카 35%, 아시아 11%였다. 이는 지역별 주식시장이나 채권시장 시가총액 비중과 큰 차이를 보인다. 유럽에 너무 많이, 아시아와 아메리카에는 너무 적게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NBIM은 지역별 투자 비중을 유럽 41%, 아메리카 40%, 아시아 19%로 재조정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신흥 시장 비중도 6%(2011년)에서 10%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신흥국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불가리아·요르단·크로아티아·카타르·루마니아 주식시장에 신규 진입했다. 지난 1분기에는 쿠웨이트와 오만 상장 기업에도 투자했다.

채권 투자에서도 2가지 중대한 변화가 추진 중이다. 우선 투자 기준을 채권 발행 규모에서 경제 규모로 바뀌었다. 특정 국가에서 채권을 아무리 많이 발행해도 그 나라의 경제 규모(GDP)를 고려해 투자 비중을 조절한다는 것이다. 유럽 재정 위기의 진원지가 그리스·스페인 등 국채를 남발해 온 나라들이었다는 걸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된다.
[SPECIAL REPORT Ⅱ] ‘신흥시장·성장기업 잡아라’…투자 전략 대전환
유럽에서 아시아로…포트폴리오 재편

두 번째는 통화의 다양화다. 2010년 기준으로 GPFG 보유 채권은 달러와 유로·엔·파운드 등 4대 통화 표시 채권이 전체 95%에 육박했다. 작년 새로운 투자 전략을 채택하면서 NBIM은 신흥 시장 통화 채권을 공격적으로 사들였다. 중국·칠레·체코·홍콩·헝가리·이스라엘·말레이시아·필리핀·러시아·태국·대만·콜롬비아 채권 등이 새로 포트폴리오에 편입됐다. 통화 다변화를 통해 특정 통화의 부침에 따른 리스크를 줄일 수 있고 세계 실물경제 비중을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는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한국 채권시장에도 진출해 4조 원 가까이를 쏟아부었다. 현재 GPFG가 보유한 신흥국 통화 채권 가운데 원화채 비중(1.4%)은 멕시코 페소화 채권(1.5%)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GPFG는 삼성전자(0.84%)·현대자동차(1.55%)·포스코(0.9%) 등 229개 한국 기업의 주식 8조 원어치를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NBIM는 세계경제가 갈수록 글로벌화되고 있기 때문에 투자 포트폴리오를 더한층 글로벌화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판단이다. 슬링스타 CEO는 “NBIM은 30~50년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하기 때문에 중국 경제의 하강 조짐이나 한반도의 긴장 같은 일시적인 도전이나 일시적인 후퇴, 일시적인 열광에 신경 쓰지 않는다”며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에 대한 투자를 계속 늘릴 것”이라고 말했다.

GPFG의 투자 자산은 주식과 채권이 두 축이다. 여기에 2011년 부동산이 추가됐다. 지난해 프랑스·영국·스위스·독일 지역의 쇼핑센터와 오피스 빌딩에 투자했다. 올 초에는 미국 부동산 시장에도 출사표를 던졌다. 현재 부동산 투자 비중은 1% 안팎으로 목표(5%)를 크게 밑돌고 있다.

부동산 투자는 본격적인 대안 투자 확대의 전초전 성격을 갖고 있다. 재무부는 아직 인프라나 상품 등 부동산을 제외한 대안 투자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숄리아 고문은 “2010년 재무부에 대안 투자 확대를 제안했지만 아직 시기상조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말했다.

NBIM에도 시련은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펀드 수익률이 마이너스 23%로 급락했다. 책임 소재를 따지기 위한 의회 청문회가 열리고 언론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마이너스 23%라는 엄청난 손실 자체가 아니었다. 숄리아 고문은 “펀드의 벤치마킹 지수 손실률이 마이너스 20%인데 어떻게 해서 마이너스 3% 포인트의 추가 손실이 발생했느냐가 핵심 쟁점이었다”며 “NBIM의 투자 전략 자체는 장기적으로 옳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고 말했다.
[SPECIAL REPORT Ⅱ] ‘신흥시장·성장기업 잡아라’…투자 전략 대전환
오슬로(노르웨이) = 글·사진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 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