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혹은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유행에 맞게 제품 생산·판매·유통을 빠르게 한 패션)으로 양분됐던 패션계에 ‘중고가 브랜드’가 속속 얼굴을 내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2월 6일(현지 시간) “저가 전략의 패스트 패션 시장과 초고가 전략의 디자이너 브랜드 시장의 틈새를 뚫고 중고가 브랜드가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몇 년 간 패션 업계는 두 개의 시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자라·유니클로·H&M 등 유행에 따라 빠르게 제품을 생산·판매·유통하는 패스트 패션은 2000년대 패션계 최고의 발명품으로 꼽히며 수년간 인기를 끌었다. 샤넬·구찌·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는 중국 등 신흥 시장에서 등장한 부유층의 성원으로 꾸준한 호황을 누렸다.

이 흐름에 20대 후반~40대 초반 연령대의 중산층 소비자는 갈 곳이 없었다. 프랑스 의류 브랜드 산드로, 클로디 피에로, 쿠플스, 자딕앤 볼테르 등은 명품과 저가 의류 사이에서 방황하던 이 소비자들을 잡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그 결과 지난해 명품 브랜드에 비해 2배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미국 패션 브랜드 랙&본과 띠어리는 중고가 의류 시장에서 큰 족적을 남긴 선구자다. 프랑스 브랜드는 이 회사의 영향을 받아 미국 내 보폭을 넓히고 있다. 산드로와 마쥬, 클로디 피에로의 모회사인 SMCP는 올해 안에 미국 내 매장을 2배로 확장할 계획이다.

루이비통을 보유한 명품계 큰손 LVMH의 투자를 받아 2011년 9월 미국에 첫 번째 매장을 연 이후 현재 40개 지점을 갖고 있다. 이들은 올해 안에 100개 지점을 확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레데릭 뷔오스 SMCP 최고경영자(CEO)는 “SMCP는 2007년 이후 연평균 40% 이상씩 성장했고 지난해 순익은 3억8000만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구찌의 모회사인 PPR그룹은 최근 알렉산더 매퀸의 하위 브랜드 McQ를 내놓고 현대적인 감각을 선보이고 있다. 중성적인 이미지를 선보이는 쿠플스는 지난해 9월부터 미국 시장 공략에 나서 현재 7개의 매장을 갖고 있다. 자딕앤 볼테르는 올해 미국 뉴욕에 4개 매장, 소호거리에 대형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 예정이다.
중고가 브랜드 ‘꿈틀’ 틈새 상품 새바람…품질·가격‘강점’
패스트 패션 브랜드, 고급화 전략 시동

중고가 브랜드의 무기는 경제적인 가격과 좋은 품질이다. 미국인들은 지난해 전년 대비 5.3% 줄어든 194억 벌의 옷을 샀지만 오히려 총 구매 가격은 4.9% 늘어난 2837억 달러를 기록했다. 1인당 평균 연평균 62벌의 옷을 사는 데 910달러를 지불한 셈이다.

뉴욕 트렌드 전문가 데이비드 울프는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이 파격적으로 가격 낮추기 경쟁을 하면서 품질을 떨어뜨렸다”며 “세탁기에 두세 번 돌리면 망가지는 옷을 사는 건 낭비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대중들이 패스트 패션을 멀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패스트 패션을 선도해 온 업체들도 중고가 브랜드 전략에 시동을 걸고 있다. 스웨덴의 대표적인 패스트 패션 브랜드 H&M은 지난 1월 중저가 제품 판매에 힘을 쏟는 대신 상대적으로 고가 제품을 판매하는 새 브랜드를 선보였다. H&M은 올 초 “옷장에서 오래갈 수 있는 디자인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는 최신 유행을 제품에 즉각 반영해 빨리 제작하고 빨리 유통하는 방식을 고수해 왔다. 제품 가격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스페인의 자라, 일본의 유니클로 등은 이미 다양한 가격대의 제품을 출시했고 미국 브랜드 갭은 최근 고급 여성 의류 브랜드인 인터믹스를 1억3000만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전문가들은 패스트 패션 브랜드가 유로존 재정 위기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은 부유층과 고령 소비자를 타깃으로 삼는다면 더 성장할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김보라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