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나무 목(木)자란다. 이건 내천(川)자고.” 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는 마차를 타고 합덕의 오일장에 다녀오면서 파란 칠판을 사오셨다. 그리고 내 키 높이에 맞게 칠판을 걸고 신문에 있는 한자를 그리면서 놀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밭을 갈다가 집에 새참 드시러 오면 내가 그려 놓은 한자를 보고 한 글자 한 글자 그게 무슨 뜻인지 어떻게 읽는지 가르쳐 주셨다. 전기도 없었고 운동회 나가서 달리기 3등이라도 해야 누런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를 얻을 수 있었던 때이니 집에 칠판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어느 날 칠판에 글자를 그리면서 놀다가 문득 자전거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는 아버지의 큰 자전거밖에 없었다. 자전거를 끌고 다니다가 페달에 발을 한번 올려볼까 하는 순간에 내가 넘어질 것 같아 자전거를 놓아버렸다. 그랬더니 오른쪽 페달이 똑 부러졌다. 야단맞을까봐 일찍 자고 일어났는데 그 다음날 자전거에 페달이 붙어 있었다. 아버지가 10km가 넘는 시골길을 자전거를 끌고 가서 페달을 수리해 다시 그 자리에 놓아준 것이다. 아버지는 자전거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 나의 아버지] “얼마나 못났으면 우리 계숙이 친구여”
[아! 나의 아버지] “얼마나 못났으면 우리 계숙이 친구여”
합덕여중 2학년 새 학기 하루 이틀 지난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학교에 오셨다. 무슨 일로 학교에 오셨냐고 여쭈었더니 가방을 싸라고 하셨다. “아버지 가방을 왜 싸요”하니까 “지금 너를 서울학교로 전학시키려고 한다”고 하셨다.

아침 먹을 때까지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아버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고 “네가 여자이기 때문에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짧게 한마디하셨다.

아버지는 용산에 전세 200만 원짜리 단칸 셋방을 얻어 놓으셨다. 내가 먹어야 할 쌀과 김치를 날라다 주는 것도 아버지 몫이었다. 김치를 비료 포대에 담아 새끼줄로 묶어 등에 메고 장항선 완행열차를 타면 김치 냄새가 날까봐 늘 객차와 객차 사이를 이용하셨다.

우리 집에 친구를 데리고 가서 아버지한테 인사를 드리면 아버지는 “아이고 우리 친구는 얼마나 못났으면 우리 계숙이 친구여?”라고 하시면서 막내딸과 놀아주는 친구에 대한 고마움을 돌려서 표현하셨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 중어중문학과를 선택했더니 아버지는 중국과 교류도 없는데 밥은 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하셨고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 요리를 하겠다고 중국 요릿집 주방에 들어갔을 때도 내가 힘든 일 하지 말라고 대학을 가르쳤는데 힘든 일 한다고 또 걱정이 많으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막내딸을 위해 뒷바라지만 하시고 밥벌이 못할까봐 걱정만 하시다가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꼭 내려서 인사드리라고 하셨다. 시간을 잘 지키셨고 꼭 메모를 하셨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었으며 유머가 있었다. 지금 나를 보면 그때 아버지가 하셨던 것들을 나도 모르게 따라 하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50줄을 넘고 보니 아버지가 평소에 보여주셨던 모습들이 참으로 귀하고 값졌다는 생각이 든다.


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