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애·나눔·여유…여행이 준 선물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이 아니라 살면서 하지 못한 것들이다.”

‘죽기 전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 나선 두 노신사의 여정을 담은 영화 ‘버킷리스트’에 나오는 대사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사는 이경택(49)·이미혜(44)씨 부부는 얼마 전 버킷리스트 1번 ‘가족 세계여행’의 꿈을 이뤘다. 쉰을 바라보는 부부의 가슴 속에서 수십 년간 키워 온 오랜 꿈이었다.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후에는 과감히 결단을 내렸다.

부부는 맞벌이로 월 700만~800만 원 정도 벌이를 하던 직장을, 유정(14)·은정(12) 두 딸들은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렇게 이 씨 가족은 2011년 12월 26일 한국을 출발, 호주~말레이시아~인도~아프리카~남아메리카~북아메리카~유럽을 돌아 1년 동안 세계 일주를 해냈다.

꿈을 이루기에는 한없는 노력과 때로는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하는 결정과 용기가 뒤따른다. 한편으로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들 가족의 용기의 원천은 과연 무엇일까. 남편 이 씨의 말이다.

“사실 세계여행은 아내가 대학 시절부터 키워 온 꿈이었어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꿈을 놓지 않았죠.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선택한다는 결정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부장까지 올랐는데 그대로 나오려니 미련이 많이 남았죠. 하지만 저 역시 많이 지쳐 있었고 중학교 2학년인 큰딸 유정이도 사춘기를 겪으며 언제나 짜증 섞인 얼굴이었어요. 방향 없이 무작정 돌기만 하는 쳇바퀴를 멈추고 아이들과 함께 다른 세상을 보고 싶었어요.”
[행복의 조건] 세계 일주로 행복 찾은 이경택 씨 가족
직장·학교 그만두고 세계 일주 떠나다

아내 이 씨의 말이 이어졌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도 보통 결단은 아니었어요. 학업을 포기한 아이들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동년배 친구들과 학년 차이도 날 것이고 거기서부터 오는 아이들의 혼란스러움도 생길 것이 분명한데도 가족 모두가 잃는 것이 있다면 새로운 것을 얻는다는 원칙을 알고 이것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삶이 100%라면 우리 가족은 꿈을 이루기 위해 70%를 포기했고 그 70%를 꿈과 도전과 성취로 채웠다고 생각해요.”

아이들 교육 문제를 아예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제집 몇 권을 챙겨가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 내내 문제집을 들춰본 적은 없었다.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나간 세상이 학교였고 여행이 곧 공부였다. 이것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은 이 씨 가족에게 많은 것을 선물했다. 넉넉지 못한 여행 자금도 뜻밖의 가르침을 전했다. 이 씨 가족은 10년간 모은 1억 원을 들고 세계여행에 나섰다. 대개 어른 1명당 드는 세계 일주 경비는 3000만~4000만 원이라는 것에 비하면 넉넉한 편은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다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패키지 여행보다 자유여행을 선택했다. 아내 이 씨가 나서서 항공권부터 숙소까지 일일이 체크하고 결정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여행길을 떠났지만 막상 현지에서 많은 변수가 생겼다. 남미에서는 버스 파업으로 터미널에 발이 묶여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비행기를 놓칠 뻔한 일 등 돌발 상황에 우왕좌왕하는 일이 적잖이 일어났다.
[행복의 조건] 세계 일주로 행복 찾은 이경택 씨 가족
이러다 가족 누군가 ‘툭’ 한마디 내뱉기라도 하면 말다툼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서로 몸도 마음도 힘들고 예민해져 있는 데다 24시간 줄곧 붙어 지내다 보니 언쟁이 쉽게 나곤 했다. 가족이었지만 잘 몰랐던 각자의 개성과 장단점, 취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공감대가 생기면서 이해와 배려하는 폭이 넓어졌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옛말처럼 가족애는 더욱 단단해졌다.

이런 가족들의 변화는 ‘어려움도 긍정적으로 해결하려는 힘’으로 발휘됐다. 사실 이 씨 가족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터라 공원에서 캠핑을 하거나 좁은 차에서 겨우 몸을 뉘이고 눈을 붙일 때도 있었다. 끼니도 직접 지어 먹을 만큼 아끼고 아끼며 지냈다.

“너무 춥고 힘들 때는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나’ 후회도 했어요. 렌터카를 빌려 직접 운전하고 다녔는데, 1년간 달린 거리만 10만km가 넘더군요. 몸이 힘들어지니까 여행 매너리즘에 빠지더라고요. 하지만 가족들이 있어서 극복할 수 있었어요. 아이들도 잠투정, 밥투정도 안 하고 뭐든 잘 견뎠어요. 가족이 함께 ‘어려운 상황도 긍정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행복의 조건] 세계 일주로 행복 찾은 이경택 씨 가족
“적당히 버리고 채우는 법을 배웠다”

가족들은 여행 중에 그간 못 했던 대화를 실컷 나누기도 했다. 이동 중인 차 안에서나 함께 걸을 때 언제든 서로 이야기를 꺼냈다. 힘들고 지칠 때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 만한 에너지도 없었다. 한국이었다면 항상 시간에 쫓겨 뒤로 미뤄 놓았을 법한 일이었다. 어떨 때는 몇 시간이고 서로 말없이 걷기만 할 때도 있었다. 침묵이 이어지는 이 시간마저도 소중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본 아내 이 씨는 누구보다 이 시간이 값지고 소중하다고 말한다.

“빨리 가려고 앞만 보고 달렸지 살아온 길을 뒤돌아본 적은 없었더라고요. 남들이 여행 가서 나를 발견하고 온다는데 대체 그게 뭘까 했어요. 인생의 쉼표가 이래서 필요한가 봐요.”

또한 낯선 여행지에서 수많은 이들에게 받은 도움을 통해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에도 모른 채 살았던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다. 둘째 은정 양 역시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많은 것을 느낀 듯했다.
OLYMPUS DIGITAL CAMERA
OLYMPUS DIGITAL CAMERA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우리 가족을 많이 도와줬어요. 저도 꼭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여행은 유럽을 마지막으로 2012년 12월 7일 끝이 났다. 현실로 돌아온 네 식구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행복의 답을 얻어 각자의 삶과 가족의 새 희망을 찾아 나섰다. 한국에 돌아와 먼저 집을 이사하고 아이들 학교를 옮겼다. 오는 3월부터 새로운 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여행을 하는 동안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는 큰딸 유정 양은 새로운 꿈을 찾는 중이다. 남편 이 씨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예전과 같은 지위와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괜찮아요. 지금 같은 마음이면 정말 다 잘될 것 같거든요.”

아내 이 씨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안간힘을 쓰며 살았던가 싶어요. ‘노력한다’는 말로 포장해 나를 너무 힘들게 했던 것 같아요. 항상 뭐든지 100점 만점에 90점 이상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거든요. 그런데 이제 적당히 버리고 또 채우는 방법을 알아가면서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끝없이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인간의 욕망의 밥그릇이다. 그러나 이 씨 가족은 채우기에만 급급한 우리 사회에 반문이라도 하듯 버릴 줄 아는 삶의 지혜를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