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동 아파트에 살던 김우 씨는 자기들만의 주택을 지어 사는 꿈을 갖고 있었다. 설계에서 인테리어까지 자신의 땀이 밴 집을 갖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비싼 땅값과 건축에 문외한인 탓에 섣불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2009년 즈음 동네 사람들 몇 명이 모여 공동주택(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이하 소행주)을 짓는다는 소리에 뜻을 모았다.

세 아이의 엄마인 한진숙 씨는 아이들이 커가면서 좁은 집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장은 아이들이 불편하지 않을 화장실 둘 딸린 집이 급했다. 그렇지만 작은 집에는 화장실이 대부분 하나인 곳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소행주를 알게 됐다. 소행주는 설계부터 참여할 수 있어 56㎡(17평)에도 화장실이 두 개인 집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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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들의 귀가 시간이 빨라진 이유

소행주의 장점은 각자의 필요와 기호에 따라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점이다. 소행주 1호는 3.3㎡당 약 1200만 원에 분양했으니 아파트 가격에 나만의 주택을 지은 셈이다. 땅을 먼저 매입하고 주택을 지을 사람을 모집하다 보니 현실적인 가격에 주택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작은 대부분 엄마들이었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소행주 이야기를 듣고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재산적 가치를 따져도 아파트에 비해 나을 게 없고 나올 때 팔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집이 어울려 산다는 자체도 막연했다. 하지만 ‘아내 이기는 남편’ 없는 법이다.

그렇게 제각각의 사연을 간직한 아홉 집이 모였다. 서로의 사연을 풀어놓고 함께 짓게 될 집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렸다. 토론이 필요할 때는 친목도 다질 겸 1박 2일 워크숍을 떠났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으로 살기 위해선 서로에 대한 이해가 따라야 한다. 다행히 성향도 비슷해 어렵지 않게 좋은 관계가 됐다.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어느 사이엔가 이름 대신 별칭을 부르게 됐다. 형님 아우님도 좋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별칭을 부르기로 했다. 그렇게 김우는 ‘느리’로, 한진숙은 ‘길모(원래는 ‘길모퉁이’였는데 줄여서 길모라고 부른다), 박종숙은 ‘야호’, 박흥섭은 ‘박짱’, 박미현은 ‘에이미’로 거듭났다.

2011년 2월 이들 아홉 집은 마침내 소행주 1호에 짐을 풀었다. 1층은 주차장, 2층은 천연 비누를 만드는 공방, 커뮤니티실, 방과 후 공부방 등이 자리 잡았다. 살림집은 3층부터 6층까지 들어섰고 옥상에 또 다른 커뮤니티실을 마련했다. 임신한 새댁에서부터 대학생 아이를 둔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것이다.

길모는 처음 입주하고 한동안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인터폰과 전화벨 소리에 조금 피곤했다고 한다. 다른 집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아이들이 무시로 방문한 때문이다. 집 구경이 끝나자 아이들은 다른 집에 놀러 다녔다. 그게 시들해지자 아이들은 커뮤니티실에서 놀았다.

아이들의 놀이방으로 자주 쓰이는 커뮤니티실은 소행주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소행주에서는 2층과 옥상, 두 곳에 커뮤니티실이 있다. 주민들은 2층 커뮤니티실은 씨실, 옥상은 날실이라고 부른다.

씨실에 들어서면 싱크대·책장·책상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도 서너 명의 아이들이 책을 읽거나 지저귀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커뮤니티실은 평형과 상관없이 각 집에서 3.3㎡씩을 부담해 30㎡의 공간을 마련했다. 용도는 공부방·서재·부엌 등 다양하다.

한 달에 한 번, 아홉 가구가 모두 모이는 입주자 회의도 씨실에서 한다. 방모임에서는 공통 경비 결산과 다음 달 있을 행사를 주로 이야기한다. 행사라곤 하지만 대부분이 ‘놀 궁리’다. 군대 가는 아이 환송회, 엄마들끼리 가기로 한 여행 계획 등이 화제에 오른다.

소행주에서 씨실만큼 활용도가 높은 곳이 없다. 씨실에는 하루 24시간, 1년 365일 항상 사람이 찬다. 낮은 아이들의 차지다. 아이들은 이곳을 놀이터 겸 공부방으로 쓴다. 주중 주말이 따로 없다. 그 덕에 엄마들은 ‘엄마, 심심해’하는 아이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다.

엄마들에게는 문화센터 역할을 한다. 월요일은 기타, 화요일은 바느질 등으로 소일한다. 공간이 있기 때문에 외부 강사를 초빙하는 게 그만큼 수월하다. 어느 해인가는 요가를 배우기도 했다.

저녁이면 식당으로 변한다. 사정이 있는 몇 집을 빼고는 함께 모여 저녁을 먹는다. 얼마 전 결성한 저해모(저녁 해방 모임) 덕이다. 박짱은 ‘저해모’가 결성된 후 아빠들의 만족도가 높아졌다고 했다.

피곤한 남편을 해맑은 미소와 된장찌개로 반기는 건 광고 속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힘든 하루를 보낸 남편을 맞는 건 그보다 더 힘든 하루를 보낸 아내의 지친 얼굴일 때가 많다. 하루 종일 아이 보고 저녁 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탓이다. 그게 현실이다. 저해모가 생긴 후론 그런 일이 사라졌다.

어둠이 무르익으면 저녁상은 술상으로 바뀐다. 저녁상을 물린 엄마들과 퇴근한 아빠들의 조촐한 술상이 차려지는 것이다. 소행주에 들어온 지 2년, 엄마들만큼 친해진 아빠들이 이야기꽃을 피운다.

남자들은 직장에 매이다 보니 관계도 그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루 종일 직장 동료와 일하고 퇴근해서도 그들과 술잔을 나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소행주에 들어온 후론 새로운 세계를 만난 듯 반가워한다. 하도 붙어 다녀 ‘아빠들끼리 연애한다’는 지청구를 들을 때도 있다.

야호는 “소행주에 들어온 후 남편들의 귀가가 빨라졌다”고 귀띔했다. 이웃들과 술자리를 하다 보니 회사 회식처럼 2차, 3차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 덕에 요즘은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사람은 떡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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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

남편과 아내, 모두 이처럼 만족할 수 있는 배경에는 물론 아이들이 있다. 소행주는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다. 소행주에는 아이가 하나인 집부터 둘, 셋인 집까지 있다. 갓 돌을 지난 영아에서부터 대학생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연령대의 형·누나와 동생이 생겼다. 내남없이 지내다 보니 아이들도 다양한 나이의 어른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또래 친구들이 많아서 좋다. 부모와 선생이 아무리 잘 해준다고 하더라도 친구에게는 못 미친다.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를 배운다. 소행주의 아이들은 이곳에서 친구들과 더없이 행복한 날들을 보낸다. 부모들에게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성싶다.

대학생 아이들은 젊은 엄마, 아빠들과 어울린다. 함께 요가를 배우기도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에이미는 “벌써부터 결혼하면 자기도 소행주에 들어와 살겠다는 아이도 있다”고 했다.

1호의 성공에 힘입어 지난해 7월에는 소행주 2호가 집들이를 했다. 올 9월에는 3호점이 문을 연다.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