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적인 개국 군주 이성계의 오판 ②

결국 1398년 절치부심하던 방원은 신의왕후 한 씨 소생 형제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고 정도전을 비롯한 반대파와 세자 방석, 그의 형 방번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른바 ‘왕자의 난’ 혹은 ‘무인정사(戊寅定社)’가 바로 그것이었다.

병중의 태조는 상황과 내막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가 나중에 일의 속내를 알고 분노해 왕위를 내놓았다. 다른 놈들도 아니고 자신의 자식들이, 아무리 이복형제라고 하더라도 같은 아비인데 그토록 처참하게 살육한 것을 보고 허망하지 않을 부모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 씨앗은 바로 태조 이성계 자신이 뿌렸다는 사실을 먼저 반성해야 했다.

이른바 왕자의 난은 분명 이방원의 야망이 그 근본 원인이다. 그러나 정도전의 조급함이나 과신도 한몫했다. 하지만 가장 큰 허물은 이성계 자신에게 있었다. 명 태조 주원장이 후대에 공신들이 득세하지 못하게 하여 황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거의 모든 개국공신들을 살해한 것은 분명 도에 지나쳤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왜 그런 극악한 선택을 주저하지 않았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그것은 독재를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고 권력의 생리를 재확인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지금은 이미 전제군주의 시대가 아니다. 물론 이른바 재벌이라고 불리는 대기업 가문에서는 지금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상사이긴 하지만 태조 이성계에게는 그런 냉혹하고 명철한 판단력이 부족했다. 아들의 욕망만 탓할 게 아니다.

따뜻한 감성은 멋진 자산이다. 그러나 감성은 자칫 무르기 쉽다. 지성이 차갑기 쉬운 것처럼. 차갑지 않은 지성과 무르지 않은 감성이 조화된 삶은 그만큼 지난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개국 군주로서는 자칫 위험한 감성을 지녔던 아버지 태조와 달리 이방원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차가운 피를 지녔다.

아버지의 판단을 반대하는 일은 아들로서는 불효일지 모르지만 개국을 도왔던 왕자로서는 어쩌면 그런 차가운 피가 더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분명히 이방원에게는 욕망과 냉정함이라는 위험한 요소가 교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잠깐 형을 왕으로 세웠다가 자신이 왕위에 오른 태종은 자신의 힘이 사병에서 왔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태종은 병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사병을 혁파하는 것을 제1의 과제로 삼았다.

그가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모든 군사력을 집중하고 의정부가 정무를 담당하게 했던 이른바 제도의 개혁은 사실상 사병의 혁파가 주목적이었다. 태종은 지나친 권력 의지와 그것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분명 많은 허물을 지닌 인물이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아버지의 어설픈 감상이 빚어낸 결과라는 변명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 비난에서 온전하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조가 거의 600년 가까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세종과 같은 위대한 군주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 세종 치세의 기틀을 마련한 게 바로 태종이었다.
[인문학 속으로] 욕망과 냉정함, 위험하지만 달콤한 동거
위험한 요소를 남기지 마라

태종은 개혁의 기틀을 마련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선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 씨와의 갈등은 그런 과정에서 불거졌다. 태조에게 신덕왕후 강 씨가 그랬던 것처럼 태종에게 원경왕후 민 씨도 그랬다. 그녀는 태종보다 두 살 위였고 태종의 즉위에 큰 힘을 보탰다.

정도전 세력이 방원을 제거하려는 것을 간파해 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할 수 있도록 했으며 심지어 정도전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고 하면서 병장기를 불태울 때 무기를 감춰둔 것도 그녀였다. 방원에게 군사를 내줘 선수를 치게 한 것도 그녀였다. 그러니 당연히 그녀의 발언은 힘이 들어갔고 민 씨 형제들도 덩달아 들썩였다.

어지간한 남자보다 당찬 그녀의 세력이 강해지면 자연스럽게 왕권이 약화된다고 본 태종은 왕후를 외면하고 후궁을 늘려갔다. 그것은 태종이 여색을 즐겨서라기보다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자연히 이 문제로 부부는 충돌했다. 민 씨는 노골적으로 투기했고 후궁들을 괴롭혔다. 임금은 결코 더 이상 좌시하지 않았다. 그는 갈수록 기고만장해지는 민 씨의 오라버니들을 제거했다.

태종이 아버지 태조로부터 학습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절대로 위험이 될 요소를 뒤에 남겨두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론 처남 형제 넷을, 그것도 왕비가 살아있을 때 죽도록 한 것은 분명 도를 넘는 일이었고 아들의 장인을 죽인 것 또한 냉혈한의 전형을 보는 듯 섬뜩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군주에게는 사사로운 정보다 왕조의 강화가 먼저라는 원칙을 실현한 인물로 조명할 수도 있다.

태종은 셋째아들 충령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병권을 쥐고 있었으며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아들 세종은 요즘으로 치면 인턴사원과 같았다. 물론 아버지가 뒤를 받쳐주고 아들은 든든한 뒷배를 안고 정치 감각을 익히라는 것이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물론 조선에서는 이미 두 명의 상왕이 있었다. 그러나 태조나 정종은 모든 권력을 내놓고 뒤로 물러선 상왕이었지만 태종은 달랐다. 두 개의 태양이 떠 있으니 볕은 밝을지 모르겠지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신하들로서도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유능한 인재를 물려주다

세종은 임금이었지만 장인 심온의 죽음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인턴과 같은 왕이 실제 오너십을 휘두르는 실세 회장에게 대들고 따질 형편은 아니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미심쩍은 점이 없지 않다.

심온은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체포돼 결국 사사됐다. 세종과 왕비도 아무런 힘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수수방관이었다. 왕비를 폐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판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국구(國舅:임금의 장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이 무고한 일이었다. 참으로 잔혹한 사람이다. 악당 중의 악당이다.

분명 지나친 처사였고 태종의 지나친 의심과 불안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그 정도로 철저하게 후환을 제거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태종을 악당으로 만든 건 적어도 절반은 그의 아버지 태조의 미숙함 때문이다.

태종은 분명 아버지에게는 불충하고 불효한 아들이었고 아들과 며느리에게는 비정하고 냉혹한 아버지요, 시아버지였다. 한마디로 냉혈한이었다. 군주였기에 망정이지 여염에서 보자면 악당 중의 악당이다. 그게 차이점이다. 그러나 태종은 잠재적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데에만 몰두했던 인물이 아니다. 그는 아들 왕의 치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유능한 인재를 양성했고 실제로 그들이 세종에게 큰 힘이 되었다. 바로 맹사성과 황희다.
[인문학 속으로] 욕망과 냉정함, 위험하지만 달콤한 동거
단순하게 하나의 텍스트 속에서 인물을 평가하면 진면목을 찾을 수 없다. 그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건 바로 그를 콘텍스트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태종이 바로 그런 인물이 아닐까. 그리고 그건 단순히 과거에 그치는 게 아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심심치 않게 노출되는 재벌가의 꼴사나운 갈등과 반목을 보라.

그걸 시스템으로 극복한 기업들도 있지만 창업자의 심모원려 결여와 판단력 부재로 몰락한 경우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심지어 가족 관계에서도 고민해 봐야 하는 일이다.


김경집 인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