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진화, 세계 공익재단 현장 보고서 11 - 공익재단 업그레이드 방안

1회 스웨덴편 쿤츠앤드앨리스 발렌베리 재단
2회 영국편 ① 더바디샵 재단
3회 영국편 ② 로이터 재단
4회 미국편 ① 홀 플래닛 재단
5회 미국편 ②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
6회 독일편 ① BMW 재단
7회 독일편 ② 베텔스만 재단
8회 일본편 ① 도요타 재단
9회 일본편 ② 자연에너지 재단
10회 국내 공익재단 현황
→ 11회 전문가 좌담- 공익재단 업그레이드 방안

한경비즈니스는 지난 8월부터 미국 등 5개 국가의 공익재단을 현지 취재해 소개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로 한계를 드러낸 자본주의의 대안 모색과 관련해 공익재단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취재진이 둘러본 선진국 재단들은 풍부한 재원과 전문적인 인력을 바탕으로 사회 변화를 이끄는 ‘제3의 동력’으로 탄탄하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 공익재단은 극단적 양극화에 직면해 있는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하지만 현실은 척박하다. 질적 수준이 양적 팽창을 따라가지 못한다. 국내 재단 전문가 3인에게 공익재단 업그레이드 방안을 들었다.
‘한국판 재단센터’ 나와야…전문성 제고도 필수
좌담회 참가자
박태규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방대욱 다음세대재단 상임이사
유승권 SPC행복한재단 사무국장


한국도 이제는 공익재단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해외 공익재단 현장 취재 시리즈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이번 기획을 보고 어떤 점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박태규: 미국편에서는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과 홀플래닛 재단을 방문했더군요. 거기도 좋지만 카네기나 록펠러 재단을 갔더라면 미국 재단의 전형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자본주의의 발달과 관련해 재단 이야기를 하려면 미국 재단을 빼놓을 수 없죠. 카네기 재단이나 록펠러 재단은 미국의 몇 대 대통령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왔지요. 미국 대학의 교육제도와 커리큘럼을 바꾸고 공공 도서관을 확충했어요. 녹색혁명도 사실은 1960년대 남미에서 록펠러 재단이 시작했거든요.

방대욱: 해외 재단들은 전문화가 잘돼 있는 것 같아요. 목적 사업이 굉장히 뚜렷하고 그걸 장기간 지속적으로 끌고 나가죠. 한국은 모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바뀌거나 하면 갑자기 중단되는 경우가 많아요. 규모가 큰 재단이나 기업이 출연한 재단들은 중요하다 싶으면 이것저것 백화점식으로 다 손을 대고요. 그 재단만이 갖고 있는 전문성과 특징을 지속적으로 살려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유승권: 재단 일을 하는 실무자 입장에서는 박 교수님 같은 재단 전문가들이 함께 해외 공익재단을 취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재단 홈페이지를 보면 대략 다 알 수 있는 내용도 적지 않고 정말 궁금한 재단 관계자들의 인터뷰는 오히려 짧게 다뤄 아쉬웠습니다. 그들이 재단 사업을 어떻게 기획하고 진행하고 평가하는지 그런 걸 더 알고 싶거든요.
‘한국판 재단센터’ 나와야…전문성 제고도 필수
국내 재단과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유승권: 요즘 새로 만들어진 재단들이 가장 초점을 맞추는 게 당장 진행할 사업 아이템을 찾는 거예요. 설립 정신이나 철학, 원칙에 대한 고민은 대부분 뒷전이죠. 해외 재단들은 거꾸로예요. 철학이나 원칙을 먼저 정하고 할 일을 찾아요. 우리와 사고방식이 다른 거죠. 가장 부러운 것은 많은 재단이 독립적인 공간과 독립적인 인사제도, 독립적인 재정 속에서 전문가들에 의해 사업을 추진한다는 거예요. 국내 재단들은 모기업 본사 사무실 한 칸을 얻어서 기업 오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업이나 기존 사회공헌팀에서 하던 일을 그냥 물려받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번 취재를 하면서 국내에서 재단에 대한 연구나 정보가 굉장히 부족하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꼈습니다.

방대욱: 1994년 삼성복지재단에서 처음 재단 일을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재단에 관해 배운 적도 없고 재단이 뭘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배치 받았죠. 사회에서도 재단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어요. 그나마 예전에는 기업재단협의회가 있어 고충이라도 같이 나눌 수 있었지만 그마저 사라졌죠. 대학에서도 재단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분이 거의 없어요. 공익재단에서 일하거나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어디에서 공부하고 지식을 얻어야 하는지 항상 답답하죠.

유승권: 재단도 중요하지만 재단을 지원하는 인프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해요. 미국과 유럽에서는 재단센터가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한국도 이제는 이런 인프라가 필요해요.

박태규: 미국은 뉴욕에 미국 재단센터가 있고 워싱턴 근교에 미국 재단협의회가 있어요. 재단센터는 보조금을 주는 재단과 이를 받고 싶어 하는 수혜자를 연결해 주는 정보센터 같은 곳이죠. 재단협의회의 탄생 배경은 더 흥미로워요. 1960년대 말 미국 내에서 재단에 대한 공격이 엄청나게 쏟아졌어요. 요즘 말로 하면 ‘재단의 멘붕 시대’였죠.

포퓰리스트 상원의원이 “세금 혜택을 받는 재단들이 돈만 쌓아 놓은 채 투명하지도 않고 책임도 안 지면서 도대체 뭘 하는 거냐”고 포문을 열었어요. 그때 개정 세법에 공익재단은 매년 전체 자산의 5% 이상을 써야 한다는 규정이 들어갔어요. 재단들도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고 느껴 재단협의회를 결성 했지요. 스스로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고 전문 인력을 양성했어요. 정책 연구나 정책 제안도 적극적으로 했고요.

방대욱: 한국 재단 중 상당수가 장학재단이죠. 장학금을 주려면 장학금 수혜자를 구해야 해요. 수많은 재단들이 각자 자기 네트워크로 다 움직이기 때문에 나중에 보면 중복되는 학생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학교도 똑같은 정보를 여기저기 줘야 하니까 피곤하죠. 협의회 같은 데서 조정 역할을 해주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박태규: 미국 재단센터나 재단협의회는 큰 재단들의 보조금을 받아 출발했어요. 일본도 도요타 재단의 지원으로 재단센터가 만들어졌고요. 누군가 맏형 역할을 맡아야 해요. 현실적으로 삼성이 맡아주면 좋은데, 삼성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회 공헌은 바로 이런 인프라를 만드는 것이라고 여러 번 조언했는데 수용을 못하더라고요.
‘한국판 재단센터’ 나와야…전문성 제고도 필수
한국 공익재단의 현주소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방대욱: 요즘 재단을 만들고 싶어 하는 곳이 많아졌어요. 자문 요청도 많이 받는데, 대개 3억~5억 원 정도 규모가 보통이에요. 재단을 만들 수는 있지만 이렇게 되면 설립 후 운영이 참 난감해요. 자산 운용 수익으로는 도저히 운영비나 사업비가 안 나오거든요. 숫자로 보면 재단이 굉장히 많지만 실제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이 얼마 안 되는 이유죠. 규모의 경제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거든요.

유승권: 재단 규모나 영향력에서 사회 변화를 일으킬만한 수준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어요. 자산 규모가 큰 재단들이 사회 변화를 위한 연구도 하고 장기 프로젝트를 발굴해 추진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곳들이 정치적 외풍에 더 영향을 받죠. 이명박 정부 들어 대학생 등록금 문제가 나오면서 한국장학재단이 탄생했고 거기 필요한 재원을 다른 재단들이 지원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아직 갈 길이 먼 거죠.

박태규: 한국은 기업 재단과 개인 재단이 혼재돼 있어요. 물론 기업과 기업주가 함께 출연하는 복합 재단이 새로운 한국적인 모델이 될 수도 있죠. 창업주 가족이 기업 재단 운영에 참여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어요. 얼마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는데, 삼성이 최근 10년 동안 한 일 중에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상징성이 있거든요. 기업주 일가가 참여하면 더 관심을 갖게 되고 더 힘을 받을 수 있어요.

유승권: 전문성은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죠. 재단 실무자들은 사업 리서치에서부터 프로젝트 발굴·운영·평가까지 수행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춰야 해요. 현재 민간 공익재단들의 급여 수준으로는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요. 기업 재단은 일반 공채로 들어온 직원들이 한 번 거쳐 가는 자리 정도로 생각해요. 당연히 전문성이 낮고 재원 활용의 효용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박태규: 재단은 직접 사업을 하는 ‘사업 재단’과 다른 단체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기부금 조성 재단’으로 나눌 수 있어요. 선진국은 기부금 조성 재단이 많은데 한국은 유독 사업 재단이 압도적이죠. 민간 재단은 자산이 많지 않고 조직도 한계가 있어요. 한정된 인적·물적 자원으로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기부금 조성이에요.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나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곳에 보조금을 주는 거죠. 이런 간접적인 방식은 답답할 때가 많아요. 당장 효과가 눈에 보이지 않고 오랜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걸 참고 기다려야죠. 모두가 사업 재단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경제학자 입장에서 보면 자원 활용 극대화의 실패예요.
‘한국판 재단센터’ 나와야…전문성 제고도 필수
공익재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아직도 적지 않습니다.

방대욱: 언론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요. 많은 언론이 재단들이 잘하는 일은 절대 보도하지 않아요.(웃음) 문제가 하나 터지면 모든 매체가 질타를 쏟아내죠. 공익재단은 어쨌든 공공선을 위해 노력한다는 좋은 뜻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일단 선의의 눈으로 봐줘야 해요. 재단들이 세금 혜택을 받기 때문에 정부에서 당연히 잘 쓰고 있는지 들여다봐야죠. 다만 기본적인 관점이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옥죄기보다 재단들이 더 잘하도록, 더 의욕을 갖도록 하는 쪽이 돼야 해요.

박태규: 과거에는 저도 공익재단에 비판적인 입장이었어요. 그런 쪽으로 논문도 썼고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환경이 바뀌었거든요. 이제는 국세청도 들여다보고 다 공개돼요. 옛날같이 상속세 회피 수단에 불과하다는 부정적인 시각에만 머물러서는 공익재단이 절대로 발전할 수 없어요.

마지막으로 공익재단 활성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정리해 주세요.

박태규: 아직도 한국 사회에는 공익재단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많아요. 매우 걱정할만한 일이죠.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공익재단이 사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우리도 많은 자산이 이미 각종 재단에 들어가 있는데 그것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형국이죠. 재단 활성화를 위해서는 재단에 대한 인식과 제도, 재단 스스로의 노력이 결합돼야 해요. 무엇보다 재단이 나서야죠.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언론과 소통하고 정치인들을 설득해야죠.

방대욱: 한국 사회에서 공익재단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업들이 펼치는 사회 공헌 활동은 아무래도 지속 가능성이나 안정성에서 떨어져요. 하지만 재단은 일단 설립되는 순간 안정성을 갖게 되죠. 보다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요. 재단들 스스로 재단의 목적 사업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지 거시적인 시각도 가져야 해요.

유승권: 공익재단을 포함한 제3섹터가 정부나 기업 부문 수준까지 성장하지 않고는 선진국에 진입할 수 없다는 박 교수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재단에 대한 언론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해요. 해외 재단에 대한 견문록 수준의 기사에 그칠 게 아니라 국내 재단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나 취재가 계속 나와야죠.

재단들도 이제는 당장의 사업 아이템만 걱정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재단을 발전시키고 사회 변화를 이끌 수 있는지 고민해야죠. 최근에는 젊은 인재들이 기업 재단에 많이 들어오고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를 통해 소통하려는 노력도 활발합니다. 희망을 갖게 하는 긍정적인 변화들이죠.


사회·정리=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