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진화, 세계 공익재단 현장 보고서9 자연에너지 재단

일본에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혁명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기존 질서와 통념에 도전하며 자신의 사업을 일궈왔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3대 통신사 스프린트 인수는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 온 정보기술(IT) 혁명의 한 정점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의 혁명은 멈추지 않는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거침없는 탈원전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작년 8월 사재를 털어 설립한 자연에너지 재단은 손 회장이 꿈꾸는 에너지 혁명을 뒷받침하는 브레인 역할을 한다.
[자연에너지 재단] 에너지 혁명 나선 손정의 … 사재 털어 재단 설립
지난 9월 6일 일본 도쿄 관청가인 가스미가세키의 이노 콘퍼런스센터. 홀을 가득 채운 청중들의 박수갈채 속에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연단에 올랐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에 버금가는 탁월한 프레젠테이션 솜씨가 장기인 그다.

“일본 전력 시장의 지역 독점 체제는 해체돼야 합니다. 기존 전력회사의 송전 부문을 발전 부문에서 떼내야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죠. 자연에너지를 포함해 모든 발전기에 동등하고 공정한 기회를 주어져야 해요. 그것만이 일본이 직면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죠.”

긴박함과 경고로 가득 찬 그의 열변은 단숨에 2000명이 넘는 청중을 사로잡았다. 자연에너지 보급을 가로막는 답답한 일본 전력 시장의 낡은 독점 구조가 이날의 타깃이었다. 손 회장은 일본에서 손꼽히는 스타 최고경영자(CEO)다.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오너 경영자인데다 권위에 도전하는 대중적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빈민가에서 차별받는 재일교포 3세로 태어났지만 역경을 딛고 일본 최고 갑부의 자리에 올랐다. 일찌감치 IT 혁명에 눈떠 야후 투자로 큰돈을 벌었고 인터넷 후진국이던 일본에 초고속 통신망과 스마트폰 붐을 불러일으켰다.
[자연에너지 재단] 에너지 혁명 나선 손정의 … 사재 털어 재단 설립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10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2012 글로벌 녹색성장 서밋' 개막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20120510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10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2012 글로벌 녹색성장 서밋' 개막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20120510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던진 충격

그런 그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강경한 탈원전 주창자로 변신했다.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의 비참함에 그는 분노했다. 원자력을 태양광·풍력 등 자연에너지로 대체하는 에너지 전환에 미적대는 정부와 정치권, 기업에 대한 공개적인 질타도 서슴지 않았다.

손 회장은 동일본 대지진 복구에 사재 100억 엔(약 1400억 원)을 쾌척한데 이어 일본 전역에 10개의 태양광발전소를 짓기 위해 800억 엔(약 1조 원)을 투자한다는 야심찬 계획도 내놓았다. 이와 함께 작년 8월에는 그가 추진하는 ‘에너지 혁명’을 뒷받침할 자연에너지 재단을 설립했다.

이날 행사는 자연에너지 재단이 창립 1주년을 기념해 ‘2030년과 그 이후의 미래’를 주제로 연 국제 심포지엄이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관계 인사들이 대거 행사장을 찾았다. 후루카와 모토히키 국가전략담당 장관과 다카하라 이치로 자원에너지청 장관이 발제자로 나섰고 도쿄 전력 개혁에 앞장서고 있는 이노세 나오키 도쿄도 부지사는 마지막 종합 토론을 손 회장과 함께 진행했다.

자연에너지 재단이 주최한 국제 심포지엄은 이번이 세 번째다. 출범 다음 달인 작년 9월 국내외 전문가들이 모인 가운데 자연 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에너지 패러다임의 전환을 선포했고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1주년인 지난 3월에는 ‘리비전 2012-일본의 새로운 에너지 비전’을 주제로 국제 행사를 개최했다.

현재 자연에너지 재단은 설립자인 손 회장이 재단 회장을 맡고 탈원전론자로 스웨덴 전력 시장 개편을 주도했던 토마스 코베리에르 전 스웨덴 에너지청 장관이 이사장으로 있다. 손 회장이 사재를 털어 기부한 10억 엔(약 140억 원)이 주된 자금원이다.

오바야시 미카 자연에너지 재단 디렉터는 “출범 초기라 아직은 손 회장의 개인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다”며 “향후 프로젝트 응모를 통해 외부 재단의 보조금을 확보하는 방안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재단 사무실은 도쿄 신도심인 시오도메의 소프트뱅크 본사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 코베리에르 이사장을 포함해 10여 명의 직원이 바쁘게 움직인다. 미카 디렉터는 자연에너지 재단이 출범 후 국제 행사를 활발하게 개최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의 에너지 시장 상황은 해외와 너무 달라요. 일본이 수십 년 뒤처져 있다는 위기감이 크죠. 올해 발전차액제도가 일본에 처음 도입됐는데, 해외에서는 벌써 20년 이상 된 제도거든요. 일본 내 벌어지는 자연에너지 논쟁은 국제 기준으로 보면 어이없는 내용도 많아요. 기후변동이 가짜라거나 자연에너지는 불안정하다는 왜곡된 주장들이 아직도 통용되거든요.”

자연에너지 재단과 소프트뱅크의 관계는 미묘하다. 미카 디렉터는 “소프트뱅크와 재단 활동은 별개”라고 선을 그었다. 자연에너지 재단은 지난 2월 공익재단 정식 인정을 받았다. 2009년 개정된 관계법에 따르면 공익재단은 특정 기업을 위해 활동할 수 없도록 금지돼 있다. 미카 디렉터는 “손 회장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손 회장의 뜻을 존중해 자연에너지 보급이라는 공익을 위해 활동한다”고 말했다.
[자연에너지 재단] 에너지 혁명 나선 손정의 … 사재 털어 재단 설립
슈퍼 그리드로 아시아 공동 번영 추구

손 회장과 재단이 최근 관심을 기울이는 핵심 이슈는 일본 전력 시장 개편과 아시아 슈퍼 그리드 구축이다. 일본은 도쿄전력·간사이전력 등 9개 전력 회사가 오키나와를 제외한 전국을 분할해 지역 독점 체제로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이들은 발전소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송전망까지 소유하고 있다. 전력 발전에서부터 송배전, 판매까지 한국전력이 전담하던 2001년 전력 산업 구조 개편 이전의 한국 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문제는 기존 전력 회사들이 송전망을 장악하고 있어 새로 시장에 참여하는 소규모 자연에너지 발전 사업자들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데 있다. 자연에너지 발전 사업자들은 발전 시장에서는 기존 전력 회사들과 경쟁 관계이면서 자사가 생산한 전력을 소비자들에게 보내 판매하려면 이들이 통제하는 송전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손 회장과 자연에너지 재단이 제시한 해법은 9개 전력 회사의 발전 부문과 송전 부문을 분할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 전역을 연결하는 중립적인 송전망을 구축할 수 있다.

아시아 전체를 연결하는 광대한 아시아 슈퍼 그리드 구상은 이러한 일본 슈퍼 그리드의 연장선이다. 시간대와 기후·에너지 자원이 다른 아시아 여러 나라를 해저 케이블로 연결해 자유롭게 전력을 사고팔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손 회장은 “아시아 슈퍼 그리드가 완성되면 몽골 사막의 막대한 풍력 자원으로 생산한 값싼 전기를 아시아인 전체가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몽골에 부는 바람을 모두 전력으로 바꿀 수 있다면 연간 8100테라와트(TWh)가 된다. 일본의 연간 소비 전력의 8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코베리에르 이사장은 “유럽의 경험으로 볼 때 아시아 슈퍼 그리드는 시간문제일 뿐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며 “그것이 가져다줄 경제적 이득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토마스 코베리에르 자연에너지 재단 이사장
“아시아 슈퍼 그리드 혜택 엄청나 … 실현은 시간문제”
[자연에너지 재단] 에너지 혁명 나선 손정의 … 사재 털어 재단 설립
토마스 코베리에르(51) 자연에너지 재단 이사장은 스웨덴 에너지청 장관을 지낸 물리학자다. 지난해 8월 재단이 설립되면서 초대 이사장으로 초빙됐다. 코베리에르 이사장은 “전력 시장 개편과 에너지 전환에 성공한 스웨덴의 경험이 일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재단 설립 후 첫 번째 역점 사업으로 선택한 것은 일본 전력 시장의 구조 개편이다. 전력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 전력 회사들의 독점 구조를 깨지 않으면 재생에너지 산업이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없다는 판단이다. 도쿄 시오도메 소프트뱅크 본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자연에너지 재단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사장을 맡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스웨덴은 재생에너지를 발전시키는데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유럽연합(EU)의 2020년 목표를 스웨덴은 올해 이미 도달했지요. 전체 에너지 소비의 49%를 재생에너지가 담당해요. 전력은 70%, 자동차 연료는 10%가 재생에너지죠. 스웨덴의 경험이 일본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일본에 자주 방문한 편이고 재생에너지 쪽에 아는 친구도 많아요. 그중 한 명이 스웨덴에 찾아와 재단 설립에 대해 말해줬고 기회가 생겼죠.

원자력에 대한 의존이 불가피하지 않습니까.

지난 3월쯤 일본 TV와 인터뷰를 하는데 ‘언제 일본이 원전 없이 살 수 있느냐’고 물어요. ‘바로 오늘’이라고 답했어요. 실제로 일본은 한때 원전 가동을 전면 중단하지 않았습니까. 전등은 여전히 환하게 들어왔어요. 기술적·경제적 측면에서 원전 폐기의 어려움들이 과장되곤 하죠. 원자력에 투자한 회사들은 경쟁을 두려워해요. 새로운 재생에너지 사업자들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전력 시장을 개방 경쟁 체제로 바꾸면 많은 변화가 생길 거예요.

현재 일본 전력 시장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일본에서 가장 시급한 개혁 중 하나가 발전 사업자들이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는 중립적인 국가적 송전망을 만드는 겁니다. 지금은 기존 전력사들이 송전망을 통제하고 있거든요.

‘아시아 슈퍼 그리드’ 구축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아시아 각국의 전력망을 하나로 연결하는 아시아 슈퍼 그리드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죠. 모든 나라가 발전 비용을 낮춰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어요. 고립된 전력 체계를 연결하는 데 대한 투자는 항상, 거듭 강조하지만 항상 큰 이득을 줍니다. 유럽의 경험이 이를 입증하죠. 게다가 기술 발전으로 지난 10년간 해저 케이블 가격이 크게 떨어졌어요.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다는 걸 잘 알아요. 그런 갈등을 부추겨 이득을 보려는 정치 세력이 있다는 것도요. 하지만 갈등의 대가는 매우 비싸죠. 아시아 나라들이 협력을 강화해 얻을 수 있는 혜택은 그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섬이나 원유의 가치보다 훨씬 큽니다. 슈퍼 그리드 실현에는 각국 정치 지도자와 정부의 지혜, 의지가 필수죠. 경제적 이득이 엄청나기 때문에 실현은 시간문제라고 봐요.

유럽은 어떻습니까.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렀지만 과거 적국들과도 전력선이 다 연결돼 있어요. 스웨덴만 해도 해저 케이블이 핀란드·폴란드·독일·덴마크로 연결돼 있죠. 전력 여유분이나 비용이 저렴한 풍력 또는 수력발전으로 얻은 전기를 수출하고 필요할 때는 수입도 하죠. 아시아도 비용 절감과 경쟁력 제고, 경제적 성장의 놀라운 혜택을 경험할 겁니다.

도쿄(일본)=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