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우리 경제의 성장세가 급속히 둔화되고 있다. 대부분의 예측 기관들은 올해 성장률은 2% 중반, 내년에는 3%대 초반으로 내다봤다. 현재 우리 경제 잠재성장률이 3.7%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GDP 갭상으로 올해는 1% 포인트, 내년에도 0.5% 포인트 2년 연속 디플레 갭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자연스럽게 우리 경제의 앞날과 관련해 비관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단기적으로 연착륙과 경착륙 간의 논쟁 속에 갈수록 후자에 무게를 두는 시각이 우세하다. 중·장기적으로 ‘성장의 덫(growth trap)’에 걸릴 것이라는 비관론이 나오고 있다.

‘성장의 덫’은 개발도상국이나 신흥국들이 경제 발전 초기에는 유치 단계의 이점을 누리면서 순조롭게 성장하다가 중진국 수준에 와서는 어느 순간 성장이 장기간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하는 현상을 말한다. 1인당 소득으로 선진국·중진국·후진국으로 분류할 때 한국은 아직까지 중진국으로 분류된다.

역사적으로 ‘성장의 덫’에 빠져 경제 발전 단계가 다시 후퇴했던 국가들은 의외로 많았다. 197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 등과 같은 중남미 국가들은 전형적인 ‘성장의 덫’에 빠져 ‘종속이론’이 탄생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동남아 국가들도 필리핀 등은 ‘성장의 덫’에 빠져 아직까지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정국이 ‘성장의 덫’에 빠지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경험국의 사례를 볼 때 비교적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 네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무엇보다 짧은 기간 안에 성장 단계를 일정 수준 끌어올리는 이른바 압축 성장(reduce growth)을 주도하는 경제 각료들의 사고가 경직적으로 바뀐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YONHAP PHOTO-0502> 수출 감소세…부산항 빨간불 
    (부산=연합뉴스) 조정호 기자 = 지난달 수출이 작년 동월과 비교해 1.8% 감소한 미화 456억6천만 달러를 기록했다. 무역수지는 31억5천만 달러로 8개월 연속 흑자를 유지했지만 수출은 작년 같은 시점과 비교할 때 3개월 연속 줄었다. 2일 부산항 신선대부두에 수출입 화물이 쌓여 있는 가운데 대형 크레인이 화물선을 기다리고 있다.    
    2012.10.2.
    ccho@yna.co.kr/2012-10-02 10:42:53/
<저작권자 ⓒ 1980-201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수출 감소세…부산항 빨간불 (부산=연합뉴스) 조정호 기자 = 지난달 수출이 작년 동월과 비교해 1.8% 감소한 미화 456억6천만 달러를 기록했다. 무역수지는 31억5천만 달러로 8개월 연속 흑자를 유지했지만 수출은 작년 같은 시점과 비교할 때 3개월 연속 줄었다. 2일 부산항 신선대부두에 수출입 화물이 쌓여 있는 가운데 대형 크레인이 화물선을 기다리고 있다. 2012.10.2. ccho@yna.co.kr/2012-10-02 10:42:53/ <저작권자 ⓒ 1980-201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경제 운영 체계도 소득이 일정 수준 도달할 때 임금 상승 등 ‘고(高)비용·저(低)효율 구조로 바뀔 때 시장경제 도입 등을 통한 생산성·효율성 제고에 소홀히 한 것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동일한 맥락이 되겠지만 산업구조 전환도 선진국의 첨단 기술과 인력 도입 등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초기 단계에 성장을 주도했던 주력 산업을 고집한 것도 원인이다.

이론적으로 우리 경제처럼 뒤늦게 경제 발전에 참여한 국가들은 ‘외연적 단계(extensive growth path)’에서 ‘내연적 단계(intensive growth path)’로 이행되는 것이 정형적인 성장 경로다. 전자는 개발 초기에 노동 등 생산요소의 양적인 투입을 통해 성장하는 국면을, 후자는 일정 시점 이후 생산요소와 경제 시스템의 효율성을 높여 성장하는 단계를 말한다.

이미 오래됐지만 우리 경제는 개발 시작 이후 주력 산업이었던 제조업의 생산 여건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우리의 제조업 비중은 30.1%로 한 단계 낮은 브라질 23.4%, 러시아 29.7%, 인도 21.0%보다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현재 서비스산업으로의 경제구조 전환을 서두르고 있지만 과도기에는 제조업이 받쳐줘야 지속 성장이 가능하다.

제조업 환경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것은 낮은 출산율로 생산가능인구, 특히 청년층들이 감소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한국은 ‘루이스 전환점’에 도달한 지 오래됐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외국인 인력에 의해 부분적으로 보완되고 있지만 인력 수요와 공급 간의 불일치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만성적인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노동력에 이어 생산에 필요한 자본도 저축률 하락 등으로 갈수록 성장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저축률이 하락하는 요인으로 정치권의 포퓰리즘적인 사회 보장 지출 확대, 가계는 사회 안전망 강화에 따른 예비적 동기의 저축 필요성 감소와 소비 여건 개선 등이 지적되고 있다.
한국 경제 ‘성장의 덫’에 빠지나? 주력 산업 위기…정부 정책 신뢰도 하락
한국 경제 ‘성장의 덫’에 빠지나? 주력 산업 위기…정부 정책 신뢰도 하락
정부 의도대로 경제 주체들 반응하지 않아

대외적으로도 우리의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높아진 국제 위상에 맞게 내수 시장이 발전되지 않음에 따라 통상 마찰을 빚고 있다. 기업 간 불균형이 심화된 상황에서 특정 기업이 세계 최고의 반열 위에 올라간 것에 따른 착시 현상까지 겹치면서 한국 기업들이 주요 교역국으로부터 통상 마찰의 표적이 되고 있는 점도 우리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가 장기간 침체 국면에 빠져들 때 겪었던 고질적인 5대 함정이 우리 경제 내부에서 나타나면서 ‘일본화(Japanization)’에 대한 우려도 가세되고 있다. 5대 함정은 무엇보다 정부의 의도대로 경제 주체들이 반응하지 않아 모든 정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정책 함정(policy trap)’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 경기 부양 방안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화정책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정책과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 주체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려 소비나 투자를 하지 못하는 ‘빚의 함정(debt trap)’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도 최종 목표인 경쟁력 개선 여부와 관계없이 구호만 반복적으로 외치는 ‘구조조정 함정(structure trap)’에 빠져 있는 점도 동일한 맥락에서 나오는 우려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경제 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이 증대돼 예측 기관들의 전망이 또 다른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 함정(uncertainty trap)’에 빠지게 된다.

최근 우리 경제의 움직임을 보면 5대 함정과 이에 따른 ‘일본화’에 대한 우려가 충분히 나올 만한 상황이다. 정책 당국이나 정책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신뢰가 종전만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준금리는 이미 적정 수준 밑으로 떨어졌다. 유동성 조절 정책도 최근처럼 통화승수·통화유통속도와 같은 경제 활력 지표가 떨어진 상황에서는 앞으로 추가적으로 돈을 공급한다고 하더라도 경기 회복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갈수록 공감대를 얻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나라 살림과 국민들의 빚은 위험수위에 도달했기 때문에 경제 주체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여전히 높다. 이 때문에 국내 예측 기관들은 직전 전망치의 잉크가 채 굳기도 전에 또 다른 전망치를 내놓기에 바쁘고 최소한 6개월 원칙을 지켰던 전망 시점도 2개월로 단축됐다.

앞으로 우리 경제가 성장률 둔화와 함께 제기되는 ‘성장의 덫’의 우려를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독자적인 방안이 많다고 하더라도 금융 위기 이후 세계경제를 이끌어 가는 국가들의 성장 동인을 반드시 감안해야 한다. 대외 환경에 의존하는 우리로서는 새로운 성장 전략을 마련한다고 하더라도 글로벌 추세에 맞지 않으면 곧바로 한계에 부닥치기 때문이다.

글로벌 추세는 갈수록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새로운 성장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모든 경제 주체들이 동참하는 ‘프로보노 퍼블리코(pro bono publico)’ 정신을 발휘하는 가운데, 특히 정치권과 정책 당국의 ‘마라도나 효과’가 절실하다.




<용어 설명>
GDP 갭은…
경기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각국의 중앙은행 총재를 가장 많이 활용한다. 실제성장률에서 잠재성장률을 뺀 것으로, 플러스일 때는 ‘인플레 갭’, 마이너스일 때는 ‘디플레 갭’이라고 한다.



루이스 전환점은…
루이스 전환점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서 루이스가 제기한 개념으로, 개발도상국에서 농촌 잉여노동력이 고갈되면 임금이 급등해 성장세가 둔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통화승수는…
통화승수는 돈의 총량을 의미하는 통화량을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통화(고성능 화폐: high-powered money)로 나눈 수치다. 통화승수는 그 나라 국민들의 현금 보유 성향과 예금 은행에 대한 지급준비율 등에 의해 결정된다. 현금 보유 성향과 지급준비율이 작을수록 통화승수는 커진다.



통화유통속도는…
통화유통속도는 일정 기간 동안 한 단위의 통화가 거래를 위해 사용된 횟수를 말한다. 통화유통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돈이 잘 유통되지 않아 그 나라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