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오늘도 일기를 쓰신다. 매일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하루의 일과를 늘 빼곡히 적으신다. 이렇게 일기를 쓰신 지도 어언 50년. 본가의 창고 한쪽에는 아버지의 일기가 쌓여 있다.

15년 전 내가 스물여덟 살 되던 해에 아내와 함께 본가를 찾았을 때 아버지의 일기를 처음 읽어보았다. 결혼한 직후 찾은 본가에서 아내와 함께 의미 있는 추억을 공유하고 싶었기에 처음으로 아버지가 쓰시는 일기장이 문득 궁금하다고 말씀 드렸다. 흔쾌히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내가 태어나던 날의 일기를 펼쳤다.

나와 아내는 누렇게 빛바랜 일기장이 마냥 신기했다. 일기의 내용을 보니 삼녀를 낳아 기르시던 아버지에게 아들인 나는 하늘이 주신 특별한 선물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나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는 아버지는 일기장에 너무나 수고한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글귀로 한가득 채워 넣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탄생 그 자체로 벅차오르듯 기뻐해 주신 부모님에게 반항하지 않고 착실하게 살아온 것이 천만다행이다.
[아! 나의 아버지] 추억을 기록한 빛바랜 일기장
그날 그렇게 아버지의 일기를 처음 본 후부터 일기장은 마치 내 친구와 같았다. 아버지의 일기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게 직접 해줄 수 없던 이야기들을 그 일기장에 전하고 있었다. 빽빽하게 채워진 일기장을 보면서 아버지가 나를 생각해 주시는 깊은 정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어 마음이 뭉클해졌다.

어렸을 때는 알지 못했다. 항상 부지런하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답답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무언가 빼곡한 글귀로 채워진 그 일기장 또한 답답해 보였기 때문에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집에서도 공무원처럼 움직이셨다. 항상 정리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다.

무뚝뚝할 정도로 강직하셨던 아버지. 어쩌면 창고 한쪽에 수북이 쌓여 있는 아버지의 일기장이야말로 ‘강인한 아버지의 인생에 큰 버팀목이 되어 주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일기장에 써 내려간 글자 하나하나에 아버지 평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다. 가족을 위한 고단한 삶을 헤쳐 나갈 방법에 대해 그리고 당신이 흔들릴 때 자신을 잡아줄 버팀목으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일기장과 함께 보내신 것 같다.

어쩌면 난 아버지를 쏙 빼 닮았다. 매일 일기를 거르지 않고 쓰는 부지런함, 꼼꼼한 성격, 언제 어디에서건 튀지 않고 묵묵히 맡은 일을 해 나가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의 나와 같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나와 가장 많이 닮은 점은 무엇보다 추억을 기록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일기를 통해 추억을 기록하셨고 나는 지금 사진을 통해 추억을 기록한다. 아버지는 일기를 통해 자식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셨고 나는 사진을 통해 자식들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훗날 아이들이 장성했을 때 내가 기록한 사진을 통해 나를 느끼고 또한 내가 준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제 아버지는 어느새 팔십이 넘으셨다. 현재는 퇴직하셨지만, 아버지는 내게 여전히 변하지 않는 큰 산이다. 이십대나 팔십대나 변하지 않는 기개로 항상 자식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그리고 오늘도 변함없이 일기를 쓰신다.


임훈 후지필름 일렉트로닉 이미징 코리아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