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흔히 가을을 일컬어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한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좋은 계절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그 속뜻이나 유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 ‘한서(漢書)’에 나오는 이 구절은 북방의 흉노족이 봄부터 여름까지 초원에서 마음껏 키운 말들이 살이 찌면 변방을 쳐들어와 식량과 가축을 노략질해 간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실 가을에 대한 낭만과는 아주 동떨어진 뜻이다.

중국 당나라의 시성(詩聖) 두보의 할아버지인 두심언(杜審言)의 시에도 그런 구절이 엿보인다. ‘가을 하늘이 높으니 변방의 말이 살찌는구나(秋高塞馬肥).’ 북방 변경의 중국인들이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가을만 되면 전쟁에 대비해야 했던 절박한 심정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건 비단 흉노의 침입에 대비해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누가 전쟁을 일으키건 백성의 호응이 없으면 지속하거나 승리하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이치다. 그러니 한창 농사일로 바쁜 봄과 여름에 병사(兵事)를 일으키는 건 자칫 민심을 잃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말이 살찌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아무리 전쟁을 하고 싶어도 혹은 해야만 할 때에도 먼저 헤아려야 하는 건 백성들의 삶에 대한 배려다. 그게 ‘민심은 천심’의 바탕이다. 설령 억지로 혹은 강압으로 봄이나 여름에 강제로 징집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고 승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승리에 취해 민심의 분노를 살피지 못하면 언제든 그 정권은 붕괴될 수 있다.

민심을 거스르는 권력은 그래서 속 빈 강정이다. 아랫사람들을 잘 헤아리고 배려해야 한다. 자기 부하 직원들에게 마음대로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상사에게는 아무도 충성하지 않는다. 누구나 윗자리에 앉으면 아랫사람들 배려하기가 어렵다.

아래에 있을 때는 자기가 윗자리에 앉으면 어찌어찌 하겠다고 호언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오르면 또다시 층층시하 받들어야 할 윗사람들이 즐비하고 책임져야 할 일 또한 만만치 않기에 제 앞가림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아랫사람을 채근하고 몰아댈 수밖에 없다고 변명한다. 그런 점은 분명 있을 것이다. 모든 자리마다 그 몫의 일이 있고 보는 눈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지만 기본적인 것은 분명하다. 아래의 충성과 협력이 없으면 어떠한 영웅호걸도, 뛰어난 최고경영자(CEO)도 원하는 바를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자신의 성공은 그것을 떠받쳐준 아랫사람들의 노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걸 잊고 오로지 자신의 재능과 노력에 의해 그 자리에 올랐다고 자부하는 교만이 자신도 조직도 망가뜨리는 일을 어렵지 않게 본다. 가끔은 입장을 바꿔 일을 헤아려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흔히 말하는 화합과 소통의 리더십이다.

아랫사람들이 열심히 일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그들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주는 게 바로 지도자의 몫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살찐 말을 타고 쳐들어 오는 적도 두렵지 않을 수 있다.

모든 방편을 마련했고 살림도 넉넉해졌으니 자신의 몫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싸울 수 있으니 사기가 충천하고 필승의 의지가 넘친다. 아무리 좋은 실적을 올려도 정당한 대가를 분배하지 않거나 걸핏하면 손실의 책임을 떠넘기는 기업이나 조직에 충성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문학 속으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진짜 의미
고용이 불안한 상태에서 눈치껏 충성을 보일지는 모르지만 신뢰와 애정으로 자신의 일에 충실할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전쟁이든 경쟁이든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 소수의 사람들만 결과를 떠안는 것도 아니다.

위기는 모두에게 똑같이 오는 것처럼 책임과 분배도 공정하고 너그러워야 한다. 이른바 상박하후(上薄下厚)도 그런 개념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위에서는 감싸고 배려하고 아래에서는 믿고 충실할 수 있을 때 어떤 위기가 닥쳐도 이겨낼 수 있다. 그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며 가을의 낭만을 떠들기 전에 어떻게 해서 위기에 대응하고 조직을 다듬어 그것을 이겨냈는지 돌아봐야 한다.

한비자는 나라가 망하는 징조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 법을 소홀히 하고 음모와 계략에만 힘쓰며 국내 정치는 어지럽게 두면서 외세에만 의지한다면 그 나라는 망한다. 법은 약자를 강자의 횡포에서 보호해 줄 가장 기본적인 규범이다. 그런데 모범을 보여야 할 자들이 법을 농락하고 능멸한다면 신뢰도 충성도 사라진다. 그걸 두려워해야 한다. 기업이라고 다르지 않다. 신상필벌과 인사 체계가 자의적이면 기회를 봐서 튈 준비만 하게 된다.

둘째, 군주가 누각이나 연못을 좋아해 대형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고를 탕진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아무리 긍정적인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4대강을 그렇게 무식한 속도와 비용으로 해결해야 했을까. 환경과 생태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런 문제에 입도 뻥끗하지 못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기업이 성장하면 제 집부터 근사하고 뻐근하게 짓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셋째, 군주가 고집이 센 성격으로 간언은 듣지 않고 승부에 집착해 제멋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그 고집과 아집을 카리스마로 착각하는 자들이 많다. 어제 결정 다르고 오늘 명령 다른 경영자도 마찬가지다. 소통하지 않는 지도자는 조직 전체를 망가뜨린다.

넷째, 다른 나라와의 동맹만 믿고 이웃 적을 가볍게 생각해 행동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미국에 올인해 중국을 홀대한 MB 정부의 외교정책에 따끔한 말일 게다. 어설픈 독도행도 그렇고…. 선린은 내 힘의 바탕에서 오는 것이지 남의 힘에 휘둘리는 게 아니다. 예전 대농그룹이 페레그린으로부터 미도파를 방어해 줄 백기사로 믿었다가 그룹 전체가 쓰러진 걸 보면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위기에 대비하라. 그리고 배려하라

천고마비가 그저 하늘 높고 식욕이 당기는 가을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말만은 아니다. 마음껏 풀을 뜯어먹고 자란 말들을 잘 훈련시켜 가을걷이를 서둘러 끝내 놓고 벼르던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상황을 압축한 말일 수 있다.

그걸 잘 읽어낼 수 있으면 그에 대한 대비도 마련할 수 있지만 그저 좋은 계절 묘사하는 뜻으로만 받아들이면 자칫 큰 화를 당할 수 있다. 그러니까 천고마비는 유비무환과 짝을 이루는 말도 될 수 있고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과 짝이 될 수도 있는 말이다.

이 고사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워야 한다. 하나는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상대의 자산은 때론 내게 위협이 될 잠재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꼼꼼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
[인문학 속으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진짜 의미
또 다른 하나는 배려다. 한창 농사일에 매달려야 할 때 군사를 일으키는 건 큰 민폐다. 짓던 농사를 팽개쳐야 하는 백성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한 지도자는 성공하지 못한다. 민심을 얻지 못하고 천하의 일을 도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배려함으로써 마음을 함께 얻어야 지도자가 원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다.

고사성어(故事成語)라는 게 가끔은 당초의 뜻과 달리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천고마비라는 말에서 전쟁의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이제 없다. 그러나 충분한 대비와 아랫사람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없는 조직은 언제든지 전쟁의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걸 새겨볼 필요가 있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