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흰색이지!”
이제 아빠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한 마리의 흰색 백조를 보여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흰 색깔의 백조를 많이 보여주면 줄수록 ‘백조는 희다’는 명제의 신빙성은 더욱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흰 백조를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백조가 희다’는 명제는 과학적으로 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한 마리의 검은 백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비로소 그 주장이 옳다는 게 확정됩니다.
그런데 호주에 가면 검은 백조, 즉 블랙 스완이 버젓이 존재합니다. 아이 아빠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보다 쉽게 진리에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요. 자, 여러분이 찾지 못한 블랙 스완은 무엇입니까.
‘내일도 해가 뜰까?’를 고민하거나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태양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떴다고 해서 미래에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귀납법의 오류에 속고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매일 아침 해는 뜬다’는 명제처럼 단단한 진리도 부정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다른 것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가 어떤 방향을 가리킨다고 해서 그 방향이 무조건 옳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지입니다. 자기만족과 자만심에 빠져선 안 되는 이유
진리의 발견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트라이 앤드 에러(Try and Error)를 통해서만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아니 진리를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모든 주장은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을 때 역설적으로 진리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리더가 자기만족과 자만심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말을 했냐고요? 바로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칼 포퍼입니다.
1902년 유대계 변호사의 아들로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포퍼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뉴질랜드에서 연구하다가 영국 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에서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나치 시절 그는 외가 쪽 친척 16명이나 홀로코스트로 죽는 핍박을 경험했는데요. ‘게르만 민족이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독선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나치, 그 광기에 희생당한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평생 한을 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명한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란 책을 통해 플라톤에게 집중 포문을 엽니다. 그런데 하필 왜 플라톤이냐고요? 그것은 “영원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플라톤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며 나아가 ‘나는 항상 옳다. 나는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죠. “사람들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더 큰 무지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열린 사회’를 지향한다는 포퍼는 아이로니컬하게도 학문적 토론에 있어서만큼은 조금의 양보도 없고 성격도 불같이 급했습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포퍼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열린’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고 비꼬기도 했습니다.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 그는 누구보다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말입니다.
포퍼에게는 대단히 유명한 제자가 있습니다. 바로 투자의 천재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입니다. 조지 소로스는 스승의 철학을 따라 독재사회, 특히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그가 자유를 신장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포퍼의 가르침에 기인할 것입니다.
“우리 회사에는 대단히 자랑스러운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제품을 개발한 분이 지금 현재 부사장님입니다. 기술계에서는 전설로 통하지요.” 회사 소개 때 이런 내용을 자랑하거나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지요. 그 자랑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분’이 그 회사에 ‘살아 있는 전설’로 있는 한 다른 방식의 기술 혁신이 그 회사에서 일어나는 것은 대단히 힘들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나를 비판하라’고 부하들에게 다그칠 수 있는 리더가 있는 곳만이 진정으로 열린 조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비판하려고 할 때 조심하고 움츠러들게 마련입니다. 공개적인 비판을 가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더더군다나 상대방이 자신의 상관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죠. 리더가 모두를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마치고 질문할 것이나 이의가 있으면 말해 보라고 합니다. 이렇게 기회를 주는 자신에 대해 매우 흡족해 합니다. 예상대로 모두들 조용합니다.
“없지? 그럼 끝!” 그리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면 “그때 말하라고 했잖아. 이제 와서 그 얘기를 하면 시간이 너무 늦잖아”라고 화를 내지요. 이런 리더는 지금 누구 때문에 일이 이렇게 뒤늦게 처리되고 어긋나게 됐는지 끝내 이유를 모를 것입니다.
진리는 반증을 통해 증명된다
모두가 보스의 눈치만 살피는 조직은 닫힌 조직입니다. 닫힌 조직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찬란했던 과거만 있을 뿐이지요. 그 어느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있는 특권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부하들에게 보여주는 리더는 자신감 있는 리더입니다. “내가 항상 옳았다”고 과거형으로 변명하는 리더는 비겁한 리더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쟁이를 찾아가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떨 때는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경기를 예측하는 것보다 점쟁이의 말이 더 잘 맞아 놀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의심이 듭니다.
‘왜 점쟁이의 말은 절대로 틀리지 않을까’하는 생각 말입니다. 참 말을 잘도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절대로 틀리지 않는 말은 과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 그 말은 진리일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틀릴 수 있는 길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때 과학적 진리가 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점쟁이가 말하는 것처럼 아무런 반박이 불가능하도록 부하들과 소통하는 상사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통이 아니라 불통입니다. 상사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하도록 하면 부하들은 숨 막혀 죽고 맙니다. 아니 결국 그 조직은 죽어버리고 맙니다. 수없는 실패 끝에 전구 발명에 성공한 에디슨은 실패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전구를 만들 수 없는 방법을 또 하나 배웠다.” 긍정적 사고의 극치지요.
그런데 이 긍정적 사고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는 태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과거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죠. ‘실패로부터 배워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원래 진리라는 것 자체가 반증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누가 먼저 블랙 스완을 발견하느냐는 게임입니다. 열린 조직만이 블랙 스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잘못을 과감하게 지적해 다오”라고 외치는 리더의 열린 소통만이 열린 조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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