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게 모르게 영화와 드라마에서 연기를 선보여 온 성우들이 많다. 성우 출신 배우도 적지 않다. 연기라는 영역 안에서 성우들은 웬만한 배우들 못지않은 연기력으로 시청자나 관객에게 안정감을 부여한다.

“발음이나 발성, 호흡 등의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기 때문이겠죠? 게다가 성우라는 직업 자체가 원래 목소리보다 연기력이 더 필요한 일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경력 있는 성우들이라면 대부분이 기본 이상의 연기는 하시는 것 같아요.”
[뷰티풀 라이프] 성우 안지환 “뮤지컬 배우 변신? 연기 인생은 지금부터죠”
CF·애니메이션·영화·예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는 스타 성우 안지환 씨가 성우라는 직업을 선망하는 성우 지망생들에게 언제나 ‘녹음기를 버려라’고 충고하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성우가 되고 싶다면 녹음기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거울이에요. 녹음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들어보는 것보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표현력을 키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거든요.”

표현력과 연기력은 그가 대중들은 물론 방송 관계자들에게 사랑받는 성우가 된 비결이기도 하다. 1993년 MBC 공채 11기로 성우 생활을 시작한 그는 지난 20년 동안 ‘무릎팍 도사’,‘결정 맛대맛’,‘TV동물농장’, ‘러브하우스’, ‘위기탈출 넘버원’ 등 각종 예능 프로그램의 내레이션을 도맡는가 하면 외화 더빙 때는 장궈룽, 리롄제, 톰 크루즈 등을 담당하고 각종 CF 및 영화 예고편에서 출중한 목소리 연기를 펼쳐 왔다.

“사실 제 목소리는 다른 훌륭하신 선배들에 비하면 정말 평범한 축에 속하거든요. 그래서 그 ‘평범함을 극복할 수 없을까’ 해서 제 나름대로 방송 프로그램마다 콘셉트를 잡고 각각의 특색에 맞는 개성들을 부여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어요.”

그가 이번 여름 내내 뮤지컬 ‘헤어스프레이’에서 주인공 소녀 트레이시의 엄마인 에드나 역을 맡아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도 20년 넘게 더빙 현장에서 갈고닦은 연기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에드나는 여자 역할이긴 하지만 어떤 무대에서건 남자 배우가 연기하는 게 원칙이다.
[뷰티풀 라이프] 성우 안지환 “뮤지컬 배우 변신? 연기 인생은 지금부터죠”
천연덕스럽고 능청스러운 연기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인 만큼 남다른 연기력이 있어야 한다. 매번 ‘헤어스프레이’의 공연이 결정될 때마다 세간의 관심이 ‘누가 에드나 역을 맡는지’에 쏠리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올해 ‘헤어스프레이’의 에드나 역에는 배우 공형진 씨와 성우 안지환 씨가 발탁돼 화제를 모았다.

“2월에 오디션을 봤어요. 처음에는 단순한 미팅인 줄만 알고 나갔는데, 오디션장이더라고요. 얼떨결에 시키는 대로 피아노 앞에 서서 ‘헤어스프레이’ 속 한 소절을 부르는데 심사를 하던 박칼린 씨가 손으로 엑스 자를 그리시더라고요.(웃음)

”뮤지컬 넘버 외에 평소 좋아하는 노래를 한 곡 불러보라는 요구에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없이 건네주고~’로 시작되는 시절 지난 유행가 한 곡을 뽑았다. 그 뒤 대본을 보며 간단한 연기를 선보이는 것으로 오디션을 모두 마쳤다. “다행히 노래 실력보다 연기 실력이 괜찮았나 봐요. 결국 에드나 역을 맡게 되었죠.”

그로부터 한 달 뒤, 그는 떨리는 마음을 다스리며 뮤지컬 연습장에 발을 디뎠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 데도 스스로 막내를 자처하며 제일 말석에 앉았다. 배역의 중요성이나 인지도를 떠나 첫 무대를 준비하는 초보 배우로서의 마음가짐에서다.

“뮤지컬 연습은 더빙 연습과 다른 점이 많았어요. 우선 절대로 혼자 할 수 없는 연습이었다는 점이 제일 달랐죠.”

성우로서는 대본이 주어지면 언제나 혼자 대본을 달달 외울 정도로 연습해 더빙을 하곤 했다. 누구보다 연습하고 노력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뮤지컬은 달랐다. 아무리 혼자 연습해 가더라도 막상 연습장에서 다른 배우들과 맞춰 보면 번번이 틀리기 일쑤였다. “춤이나 노래도 모두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아, 깨달은 점은 또 있어요. 의외로 제가 스텝을 참 못 밟는 사람이더라고요. 하하하.”



무대 위 외로움 관객들 박수로 채워

처음에는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도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며 즉석에서 돌아 보이는 그의 몸놀림은 그가 뮤지컬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쉬 알 수 있을 정도로 유연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결국 관객의 박수와 환호, 찬사로 모두 보답 받았다.

“사실 연기하면서 기쁘기도 했지만 외로움을 많이 느꼈거든요.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철저히 혼자서 해나가야 하잖아요. 곁에서 지켜봐 주는 동료나 스태프는 있지만 연기하는 건 결국 나 자신이니까요. 마치 우리 인생이 그러하듯이요.”

무대 위에서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 외로움이 더욱 절실히 느껴졌다. “언젠가 한번은 갑자기 노래 가사를 잊어버렸어요.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고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고요. 하필 독창 부분이라 아무도 도와줄 수 없어 혼자 힘으로 겨우 수습하긴 했는데,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해요.”

하지만 연기의 외로움도 공연이 끝난 후 주어지는 관객들의 박수로 모두 채울 수 있었다. 직접 눈앞에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박수를 받는 기분은 성우로서는 맛보기 어려운 경험이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 감동이 너무 커서 공연이 끝나면 허탈감과 상실감이 밀려들 것만 같았어요.” 공연이 끝난 후 한 달이 되어가지만 예상외로 허탈감이나 상실감은 찾아오지 않았다. “왜 그럴까요?(웃음) 저 역시도 스스로 이상하게 느낄 정도로 너무 평온해요. 아마, 공연이 끝나자마자 학기가 시작된 덕분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요즘 1주일에 이틀씩 대학원에 간다. 중앙대 예술대학원에서 연극 전공을 택해 공부하고 있다. 성우로서 또 배우로서 연기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에 공부를 시작했다.

“학위는 상관없어요. 그저 배우고 싶은 마음이 클 뿐이죠. 연극 공부를 마치고 나면 영화 쪽 공부를 더 배우고 싶어요. 제 아이가 현재 고등학생인데요, 연극영화과를 가고 싶어 하는 눈치더라고요. 아마 몇 년 후에는 아이와 함께 공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연극과 영화 외에도 국어 공부와 신문방송학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이처럼 배움에 대한 열망이 큰 이유는 좀 더 좋은 성우, 좀 더 좋은 배우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제 멘토는 성우로서 연기자로서 MC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신 박일 선배님이에요. 그 외에도 김종성·양지운·김도연·박기량 선배님 등 많은 훌륭한 선배님들을 본받으려면 아직 저는 한참 멀었죠.”

성우든, 배우든 결국 대중이 듣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이다. 대중이 찾지 않으면 무대 연기도 목소리 연기도 선보일 수 없다. “이제 겨우 뮤지컬 한 작품을 끝낸 것뿐이잖아요. 제 연기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죠. 다음번엔 어떤 역할을 맡고 싶으냐고요? 남자, 그것도 잘생긴 남자 역할이면 좋겠어요.(웃음)”


김성주 객원기자 helieta@empal.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