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세계 곡물 시장에 위기 징후가 뚜렷해지면서 2년 전 정부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한국판 카길’ 사업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표적인 농업정책으로 꼽히는 한국판 카길 설립은 2008년과 2010년 곡물가 급등을 경험한 정부가 그 해법으로 내놓은 대안이었다.

세계 곡물 시장을 지배하는 4대 곡물 메이저들의 횡포에 맞서 유사시 독자적으로 곡물을 조달할 수 있는 토종 곡물 기업을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주축이 돼 미국 시카고에 aT그레인이 설립됐다.

하지만 요란한 출범과 대조적으로 이 회사는 빠르게 잊혔다. 미국 곡창지대를 휩쓴 52년 만의 대가뭄으로 곡물 시장이 또 한 번 요동치고 있는 지금 aT그레인에 기대를 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과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국판 카길 사업이 나온 배경을 이해하려면 먼저 취약한 국내 곡물 수급 구조를 들여다봐야 한다. 한국은 연간 5조 원어치 이상 곡물을 수입하는 세계 곡물 시장의 큰손이다. 수입 물량이 옥수수 900만 톤, 밀 300만 톤, 콩 100만 톤 등 매년 1억5000만 톤에 달한다. 세계 5위 규모다. 옥수수만 따지면 세계 3위다. 한국의 곡물 자급률은 26.7%로 물량이 넘치는 쌀(자급률 104%)을 제외한 다른 곡물들의 자급도는 4~5% 수준이다. 옥수수와 밀은 99%, 대두는 91% 수입산을 사용한다.


<YONHAP PHOTO-1284> (FILES) this file picture taken on April 29, 2008  in Karachi shows a Pakistani salesman reading a newspaper at a grocery shop. An international summit on the global food price crisis opened in Rome on June 3, 2008 against a backdrop of riots in some countries and calls for a rethink of agricultural policies. AFP PHOTO/FILES/Asif HASSAN  PHOTO PACKAGE TO GO WITH FAO-SUMMIT STORIES/2008-06-03 21:03:57/
<저작권자 ⓒ 1980-200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FILES) this file picture taken on April 29, 2008 in Karachi shows a Pakistani salesman reading a newspaper at a grocery shop. An international summit on the global food price crisis opened in Rome on June 3, 2008 against a backdrop of riots in some countries and calls for a rethink of agricultural policies. AFP PHOTO/FILES/Asif HASSAN PHOTO PACKAGE TO GO WITH FAO-SUMMIT STORIES/2008-06-03 21:03:57/ <저작권자 ⓒ 1980-200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출발부터 삐걱…엘리베이터 확보 실패

문제는 수입 물량의 대부분을 4대 곡물 메이저와 일본계 종합상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다. 한국에 들여오는 곡물의 56.9%가 카길·아처대니얼스미드랜드(ADM), 루이드뤼파(LCD), 번기 등 곡물 메이저의 손을 거친다. 마루베니·미쓰비시 등 일본 종합상사도 16.0%를 담당한다.

이들은 한국 시장에서 독과점적 지위를 누리면서 가격 상승기나 불안정기에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불러 이익을 챙기는 경향을 보인다. 2003~2008년 곡물 도입 현황을 분석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메이저 업체들은 조사 대상 6년 동안 톤당 평균 179달러에 옥수수를 공급했다. 비메이저 업체의 187달러보다 저렴한 가격이었다.

하지만 곡물 가격이 급등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옥수수 가격이 급등한 2006년 11월에서 2008년 12월까지 메이저의 공급 가격은 톤당 274달러로 비메이저 업체의 253달러보다 21달러나 비쌌다. 밀은 시장 상황과 상관없이 메이저 업체의 가격이 언제나 비메이저보다 비쌌다.
보고서는“곡물 메이저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자회사를 통한 정보 수집, 막강한 로비력, 인공위성을 통한 세계 작황 점검 능력 등을 바탕으로 향후의 가격 및 시장 예측력이 뛰어나 높은 가격대에서 판매해 이익을 극대화한다”고 분석했다.

한국판 카길 사업은 이들의 독과점 구조를 깨자는 데서 출발했다. 곡물 메이저를 거치지 않고 해외 산지에서 직접 물량을 들여와 가격을 낮추고 유사시 안정적인 조달 루트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2010년 민·관 합동으로 태스크포스(TF)가 만들어졌고 구체적인 사업 계획 등을 검토했다. 한국판 카길 사업의 정식 명칭은 ‘국가 곡물 조달 시스템 구축 사업’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민간 기업 중 곡물 구매와 판매 등 핵심적 역할을 맡기로 했던 CJ가 채산성을 맞추기 어렵다며 막판에 불참을 선언한 것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aT가 주도하고 삼성물산(곡물 무역)·STX (해상운송)·한진(육로운송)이 참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2011년 4월 세계 곡물 선물의 80%가 거래되는 미국 시카고에 aT그레인이 사무실을 열었다. 초기 투자금은 450억 원 규모로 aT가 55%, 나머지 3개 민간 기업이 15%씩 지분을 보유하기로 했다.

aT그레인은 미국 내 곡물 엘리베이터(생산자로로부터 곡물을 매집한 뒤 건조·저장·분류·운송하는 설비)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를 통해 2011년 콩 5만 톤, 옥수수 5만 톤을 한국으로 직수입하고 2015년부터는 콩 15만 톤, 옥수수 150만 톤, 밀 50만 톤 등 곡물 215만 톤을 안정적으로 조달한다는 청사진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첫 단계부터 어긋났다. 곡물 엘리베이터 확보가 2년째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곡물 메이저들이 현지 엘리베이터를 대부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내 강변 엘리베이터 174개 중 117개(67%), 수출 엘리베이터 58개 중 25개(43%)가 4대 메이저 소유다. 다른 회사들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의 초기 대응 미숙을 지적한다. 산지 엘리베이터를 사겠다고 요란하게 소문을 내는 바람에 매입이 더 힘들어지고 가격도 더 치솟았다는 것이다. 한석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곡물실 연구위원은 “일본도 미국에서 엘리베이터를 확보하는데 10년이 걸렸다”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엘리베이터를 사겠다고 설치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미국 농민들의 반감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를 확보하더라도 미국 농민들이 거기에 곡물을 팔지 않으면 빈껍데기 엘리베이터만 남는다는 설명이다.

작년 말 aT그레인은 현지 곡물회사 인수로 방향을 틀었다. 2015년까지 산지 엘리베이터 10기를 단계적으로 확보한다는 애초 전략을 포기한 것이다. 대신 이미 엘리베이터를 확보하고 있는 현지 곡물회사를 사들이는 좀 더 쉬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현재까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YONHAP PHOTO-0646> Corn plants are seen in a drought-stricken farm field near Evansville, Indiana, July 18, 2012. Oppressive heat and a worsening drought in the U.S. Midwest pushed grain prices near or past records on Wednesday as crops wilted, cities baked and concerns grew about food and fuel price inflation in the world's top food exporter. REUTERS/John Sommers II (UNITED STATES - Tags: AGRICULTURE ENVIRONMENT BUSINESS)/2012-07-19 11:11:24/
<저작권자 ⓒ 1980-201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Corn plants are seen in a drought-stricken farm field near Evansville, Indiana, July 18, 2012. Oppressive heat and a worsening drought in the U.S. Midwest pushed grain prices near or past records on Wednesday as crops wilted, cities baked and concerns grew about food and fuel price inflation in the world's top food exporter. REUTERS/John Sommers II (UNITED STATES - Tags: AGRICULTURE ENVIRONMENT BUSINESS)/2012-07-19 11:11:24/ <저작권자 ⓒ 1980-201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2년 전 떠들썩했던 ‘한국판 카길’ 어떻게 됐나 "올해 도입량 전무…곡물 파동에 무용지물"
STX팬오션은 미국서 독자 사업 순항

지난해 aT그레인은 콩 1만1000 톤을 국내로 도입하는데 그쳤다. 애초 목표치의 11%에 불과한 수치다. 콩과 옥수수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올해 성적표는 더 초라하다. 올해 92만 톤의 곡물을 사들이기로 했지만 지금까지 실제 도입한 물량은 전무한 상태다. 사업 계획을 부실하게 세워 놓고 예산만 낭비한다는 지적이 터져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aT 홍보팀 관계자는 “곡물 회사 인수를 위해 협상을 계속해 왔으나 막판에 결렬돼 새로운 대상을 찾고 있다”며 “인수·합병(M&A) 특성상 진행 상황을 모두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일본을 봐도 곡물 조달 시스템 구축은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애초 정부가 지나치게 의욕만 앞세웠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aT그레인에 참여하고 있는 한 민간 기업 관계자는 “모든 사업을 aT에서 직접 주도하고 있다”며 “정부의 요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을 담그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판 카길 사업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한석호 연구위원은 “해외 산지에서 직접 물량을 들여오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4대 곡물 메이저를 통해 들여오는 것보다 과연 경제적인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말했다. 각종 곡물을 실제로 소비하는 실수요자들의 반응도 또 다른 변수다. 대형 식품 업체들과 사료 업체들은 이미 곡물 메이저들과 오랜 신뢰 관계와 탄탄한 유통 라인을 구축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곡물 조달 시스템이 식량 위기 상황에서 제구실을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심각한 위기 순간에는 대부분의 나라가 수출 금지 조치를 내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어렵게 구축한 현지 유통망도 무용지물이 된다.

표류하는 한국판 카길 사업과 대조적으로 민간 기업의 곡물 비즈니스는 점차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STX팬오션은 지난 9월 미국 워싱턴 주 롱뷰항에 연간 900만 톤을 처리할 수 있는 대규모 곡물 엘리베이터를 준공했다. 곡물 메이저인 번기, 일본 이토추상사와 공동으로 3억 달러를 투자해 저장 설비와 부두, 하역 설비 등을 갖춘 최신식 수출 엘리베이터를 건설한 것이다.

지분율은 번기 51%, 이토추 29%, STX팬오션 20%다. STX그룹 관계자는 “STX팬오션은 아시아 지역 곡물 운송 1위 업체로 곡물 메이저들과 30년 이상 신뢰 관계를 구축해 왔다”며 “곡물 사업을 그룹의 신성장 동력을 키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