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마케팅 회사 JWT는 국가별로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불안을 느끼고 어떤 내용의 불안에 시달리는지 조사해 발표한다. 이 불안지수(Anxiety Index)에 따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한결같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국가 경제나 물가와 같은 경제 관련 불안이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많은 선진국들이 불황의 늪에 빠지면서 세계적으로 불안의 수준 자체가 높아졌다. 체감 수준을 따지면 경제 상황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불안도 결코 낮지 않다.

시장조사 전문 기관 엠브레인트렌드모니터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계 살림이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고 응답한 사람들의 비중은 2001년 54.9%에서 2011년 48.2%로 낮아졌고 다음 해에는 경제가 올해보다 좋아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들 역시 2001년 45.1%에서 2011년 29.1%로 줄어들었다.

불황기에는 일반적으로 소비가 줄어든다. 하지만 실물 경기보다 소비 심리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향후 경기의 향방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다. 경제에 대한 비관적 전망, 불안이 높아진다는 것은 소비가 위축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의미다.
[불황 이기는 마케팅] 불안한 소비 심리에 대처하는 법 "무조건적 가격 인하가 정답 아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지출 정당화

따라서 불황기에 소비 진작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소비에서 느끼는 다양한 불안 요소를 실질적·심리적으로 제거해 줄 필요가 있다. 불황이라고 소비 욕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앞으로 불어 닥칠지 모를 재무 위기가 소비를 하지 말아야 할 명분을 더 크게 만드는 것이다.

불황기 사람들을 소비하게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지출 정당화다. 소비를 정당화하기 위해 더 많은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렴한 가격도 소비를 정당화할 수 있지만 더 정확히는 가격 대비 가치다. 제즈 프램턴(Jez Frampton) 인터브랜드 사장은 “고객들은 수입이 줄어드는 시기에 거래의 대가로 돌려받을 것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다”고 말했다. 기업은 기존과 다른 새로운 차원의 효용을 강조하는 것이 구매의 명분을 더해주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불황기에 가장 많이 눈에 띄면서도 조심해야 하는 전략은 가격 전략이다. 불황기에는 무조건 싼 제품을 선호할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실제로 소비자들은 여전히 다양한 가치를 고려한다. 금융 위기 이후 경제 불안 심리가 높아진 미국에서는 소비의 각 분야에서 더 싼 제품, 브랜드를 찾는 트레이딩 다운(Trading down)이 확산됐다.

반면 미국 못지않게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은 멕시코는 트레이딩 다운이 훨씬 낮았고, 특히 교육 분야의 지출은 줄지 않았다고 한다. 멕시코에서는 신뢰할만한 브랜드가 많지 않아 저가 상품을 구매했다가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더 크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비자는 종종 가격으로 그 상품의 가치를 판단한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생각하고 비싸면 가치도 높을 것이라고 직관적으로 생각한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고가의 와인은 저가로, 저가의 와인은 고가로 가격을 바꿔 알려주고 테스트를 실시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피험자 전원이 사전에 비싸다고 정보를 받은 와인이 더 맛있는 와인이라고 응답했다. 이처럼 불황기라고 무조건 가격을 내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미국의 호텔 사업가이자 강연가인 칩 콜리(Chip Conley)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불확실성×무력감’이라는 방정식으로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불황기 소비자들이 느끼는 불안도 상황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거나 예상되는 손실을 최소화해 줌으로써 경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세계적인 불황의 여파로 기업들이 내놓는 다양한 전략들을 활용하면 소비 불안이라는 감정도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하다.

구매에 따른 손실 가능성을 줄여주기 위한 다양한 전략 가운데 하나가 최대 손실을 보장하는 것이다. 고객이 미래에 불안을 느낄 때는 고가의 제품이나 장기간 상환이 필요한 상품에 대한 지출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높은 실업률과 언젠가 장기 실직이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장기 지출 계획은 주저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소비 심리에 대응해 실직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안심시켜 주는 전략을 펼친 마케팅 사례도 있다.

현대자동차는 금융 위기의 여파로 미국 내 경제 불안과 실업에 대한 불안이 높아지자 구입 후 1년 안에 구매자가 실직하면 차량 반환을 허용해 줬다. 현대차는 당시 대부분의 북미 자동차 업체들이 25~50%의 매출 감소를 경험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2.6%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이 전략은 영국 소재 마케팅 회사 JWT 인터내셔널이 꼽은 불황기 최고의 마케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스페인 최대 통신사 텔레포니카(Telefonica)도 고객이 실직하면 한 달에 최대 20유로까지 통신비의 50%를 환급해 주는 캠페인을 펼쳤다. 이스라엘 보험사 AIG는 고객이 실직하면 고객의 주택 담보대출금을 1년간 상환해 주는 보험 상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신뢰’와 ‘안심’ 마케팅 전략

또 제품을 구입한 뒤 ‘가격이 더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더 싸게 파는 곳이 있지 않을까’ 불안한 고객들의 심리를 파악해 독특한 가격 보증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업들도 있다. 온라인 여행사 오르비츠(Orbitz)는 고객이 자사나 혹은 타사 사이트에서 동일 상품에 대해 더 저렴한 구입가를 발견하면 그 차액만큼 변상해 주는 제도를 운영했다. 의류 브랜드 갭(Gap)은 상품을 구입한 뒤 45일 이내에 가격이 떨어지면 스프라이즈 카드(Sprize Card)라는 고객 카드에 차액을 포인트로 적립해 주기도 했다.

이와 유사하게 국내에서도 현대아이파크몰이 세일 기간 직전에 정가로 물건을 산 고객에게 전화나 문자 서비스를 통해 정보를 주어 세일가를 적용 받게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전략들은 고객이 구매를 잘못 선택하지 않도록 실질적으로 보장해 주거나 혹은 최소한 고객의 불안을 공감하고 신뢰를 구축하는 효과가 있다.

세 번째로 소비자들이 자신의 소비 활동을 더 현명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 소비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 소매 유통에서 금융 위기 이후 다시 부활한 예약 구매(Layaway) 제도다. 예약 구매 제도는 미국 대공황 시절 생겨나 크게 범용된 구매법으로 물건을 예약하고 잔금을 다 냈을 때 물건을 가져가는 방식이다.

물건부터 가져간 후 물건 값을 나중에 완불하는 신용카드 구매와 정반대 개념이다. 예약 구매 제도나 신용 구매 모두 물건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지출을 하기 어려울 때 요긴한 제도다. 그런데 신용카드 활성화로 사라졌던 예약 구매 제도가 미국 소비자들이 신용카드 사용을 다시금 빚으로 인식해 구매가 줄자 소매 유통 업체들 사이에서 부활하게 된 것이다.

미국 소매 유통 업체들은 ‘지금 쇼핑하고 나중에 지불하자(Shop Now, Pay Later)’는 문구를 내걸며 구매를 장려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시어즈(Sears)는 구입가의 15~20%만 계약금으로 지불해 구매하고 잔금은 장기간에 걸쳐 나눠 갚도록 해준다. 온라인 스토어들 또한 예약 구매 물결에 동참해 아예 이레이어웨이닷컴(eLayaway.com)이라는 인터넷 쇼핑 사이트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렇게 소비 불안 요소를 실질적으로 차단해 주는 전략 외에 심리적으로 자신감을 북돋아 주거나 소비자에게 더 많은 통제권을 부여함으로써 무기력함을 극복하게 하는 것도 불황기 불안 심리에 대처하는 효과적 방법이다. 향수 마케팅과 리메이크도 사람들이 가장 잘 아는 것, 익숙한 것을 되살려 심리적 불안과 스트레스를 치유해 준다.

마지막으로 불황기일수록 신뢰가 중요하다. 불신이 팽배한 소비 환경에서는 기업이 전개하는 어떤 캠페인이나 정보도 상술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쇼핑을 저렴한 가격과 편리한 가격 비교 때문에 이용하지만 정작 가장 최저 가격을 제시하는 사이트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고객은 10%밖에 안 된다고 한다.

대부분의 고객은 익숙하고 신뢰가 가는 사이트에 더 많은 프리미엄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또 기업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실제 가치조차 폄훼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노후에 대한 불안을 느끼지만 정작 금융권에서 제공하는 금융 상품을 통해 노후 준비를 하는 고객들의 비중은 높지 않다. 당장의 여유 자금 문제도 있지만 신뢰의 문제도 크다.

사람들이 향후 경기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면서도 여전히 전문 기관을 통한 투자보다 직접투자를 선호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기업들은 고객들에게 그다지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에델만이 매년 조사하는 국가 신뢰도 지표의 2012년 결과는 조사 시작 이후 최하점을 기록했다.

불황기에는 단순한 긴축과 저가 추구만이 진리는 아니다. 기업이 소비자의 불안 심리를 이해하고 신뢰로 다가가면 소비자들도 현명한 판단으로 소비의 빗장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정지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