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부탁을 받고 3일 밤낮을 고민했다. 어떻게 써야 누가 되지 않을지, 아니면 내 내면 깊숙이 있는 아버지의 추억 속에서 어떤 단상들이 왜곡, 기억돼 있는 것은 아닌지 많은 상념에 휩싸였다.

그러면서도 어렸을 때부터 현재까지 아버지와 있었던 여러 경험과 기억들을 찾는 나만의 여행을 떠나는 것은 꽤나 의미 있고 즐거운 일이었다. 마치 자기 성찰이랄까. 그분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내 모습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반추해 보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당신 옆모습이 아버님이랑 너무 똑같아” 혹은 “당신은 아버님하고 약속이 있으면 매우 서두르는 경향이 있어”라는 아내의 말처럼 오늘날 나의 외면적 모습이 점점 닮아가는 것만큼이나 아직도 내게 아버지는 약속 시간과 같은 자그마한 기대조차 어기고 싶지 않은 경외의 대상이다.

그 시절 대다수의 아버지들이 그러하듯이 필자의 아버지 역시 살가운 편은 아니었다. 철없던 내가 겉으로 자주 내비치지 않으시던 아버지의 속 깊은 애정을 크게 느끼게 된 것은 첫 번째 대학 입시에 실패했을 때다.

친구들 대부분이 입시에 실패해 오히려 담담했던 나에 비해 자식의 장래를 걱정해 오히려 더 슬퍼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강인하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참모습을 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또 대학을 졸업하고 예상치 못한 사고로 예정돼 있던 학사 장교로서의 군대 입대가 미뤄졌을 때, 내 자신의 막연한 불안만큼 그 이상으로 걱정하셨을 아버지는 그때 오히려 대범하게 내 마음을 다독거려 주셨다. 결혼 준비를 할 때도, 사회생활을 첫 시작할 때도 아버지는 내 곁을 든든히 지켜주셨다.

아버지는 매사에 틀림없는 분이며 자기 관리가 뛰어나신 분이다. 그리고 엄격한 기준과 놀랄만한 이해심을 동시에 갖추신 분이었다. 그 시대의 많은 아버지들처럼 여러 형제의 장남으로서 많은 짐을 지고 살아오신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많이 부족한 나였기에, 때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조그만(?) 실수에 야단맞는 일이 많았고, 그럴 때면 한없이 작아졌지만, 그럼에도 기죽지 않고 자랄 수 있던 것은 그 ‘이해심’ 덕택이었을 것이다.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 집 근처에서 간단히 소주를 기울일 자리가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내가 직장 생활을 해보니 마음에 드는 직장 상사라든지 동료들과 일하는 건 참으로 만나기 힘든 것 같다. 직장 생활이라는 건 대부분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과 맞춰서 일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거다. 따라서 직장 생활에 대한 기대를 그러한 눈높이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며,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 잘해 주도록 노력해라.”
[아! 나의 아버지] 언제나 지치지 않는 내 삶의 표상
이런 말씀 덕택인지 나는 직장 생활을 하는 줄곧 흔히 갖기 쉬운 직장 및 사람들에 대한 불만보다 내 위치에서 내 실력을 키우는 것에 더 힘을 썼던 것 같다.

철없던 학창 시절을 거쳐 사회생활, 직장 생활에서 빛나는 순간과 어려운 순간을 겪으면서 당신이 가르쳐주셨던 촌철살인의 삶의 지혜들이 문득문득 떠올라 삶의 방향타가 되어 준다. 지금도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며 당신의 건강 관리를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운동에 열심이신 모습을 보면, 아직도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신 모습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신다.



신동구 더퍼블릭릴레이션플러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