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가 시작되는 9월이면 대학가는 또다시 취업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때면 늘 그랬듯이 졸업을 앞둔 예비 사회인들의 인간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새학기가 시작되는 9월이면 대학가는 또다시 취업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때면 늘 그랬듯이 졸업을 앞둔 예비 사회인들의 인간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직업사는 산업사회의 변화 과정과 직업인을 생성하는 속성과 제도가 내재돼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임금근로자가 등장한 시기는 일제강점기 때 부두 노동자인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하의 직업사는 농업인과 수업인을 포함해 일제가 운영하던 일부 공업인이 직업 세계를 차지하던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1920년대 대학생의 취업 실태를 보면 세브란스의전 및 이화여전 졸업생은 대부분 취업했고 연희 및 보성전문대는 65% 정도만 취업했다. 광복을 전후해 남북한 사회의 최고 인기 직업은 관공서 직원과 은행원, 교육인과 언론 종사자, 운송 관련 사업자, 일부 기업 샐러리맨 등을 꼽을 수 있다.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국내 공채 역사는 다시 한 번 6·25전쟁으로 단절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6·25 전란 동안 우리 공채 역사는 일자리 창출이 전무한 가운데 남한 내 44%의 산업 시설이 파괴돼 127만 명의 실업자를 배출했다. 기업이 없으니 채용이 없고 채용이 없으니 직장이 없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6·25전쟁의 복구 사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던 1957년 1월, 삼성물산공사가 국내 기업 최초로 공채 시대를 열었다. 민간 기업 최초의 공채인 만큼 1200여 명이 지원한 가운데 27명만 뽑아 엄청난 취업 경쟁률을 기록했다. 1962년 한국 경제 도약기의 발판을 구축했던 경제 개발 1970년대, 잇단 대기업의 출현은 개발 경제로 가기 위한 정부의 고단수 정책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필기시험과 면접은 당시 사원을 채용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채용 패턴은 1980년대 중반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다. 1980~1990년대는 대기업 공채가 그룹 단위로 이뤄졌다. 기업에 따라 일부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그룹사들이 상·하반기 정기 공채로 대규모 채용을 시도했다.

인턴사원 제도가 국내 사회에 첫 모습을 보인 시기도 1980년대부터였다. 1984년 당시 럭키금성그룹(현 LG)이 국내 기업 최초로 이 제도를 도입한 이후 기존 공채 시험과 함께 한국 채용 제도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 산책] 한국 기업들의 공채 역사
1990년대 한국 공채사는 대변혁을 맞이하는 전환기로 볼 수 있다. 그룹사들이 정기 공채와 함께 1994년에 상시 채용 제도를 도입했으며 삼성은 1995년 ‘열린 채용’을 선언했다.

상시 채용 제도는 공채의 탄력성을 갖게 만들었으며 열린 채용은 학력 철폐를 통한 우수 인재 확보에 박차를 가했다. 1997년의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는 한국 취업 문화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대규모 정기 공채가 사라졌으며 보통형 인재들은 취업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됐다.

2000년대 한국 공채사는 핵심 역량을 지닌 인재 선발에 주력하고 있다. 2002년 삼성의 면접 대변화를 기점으로 대기업들의 면접이 심층 면접으로 돌아섰다. 또한 기업의 세계화, 인재의 국제화에 부응해 외국어 평가 및 글로벌 비즈니스 능력에 인재 선발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최근 들어 대기업들이 인재의 기초 지식과 직무 능력 및 인성 분야에 역점을 두고 종합 평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올가을의 충만한 햇살과 함께 취업 시장에서 풍성한 소식이 들려왔으면 한다.


김홍유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