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진화, 세계 공익재단 현장 보고서 ④ 홀 플래닛 재단(Whole Planet Foundation)

재단에 돈이 많아야만 기부 활동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은 규모라도 뚜렷한 철학이 있다면 비용 대비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런 기업 정신을 바탕으로 협력사와 소비자의 동참까지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미국 남부 소도시 오스틴의 홀 플래닛 재단은 그런 이상향에 가까운 롤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홀 플래닛 재단] ‘Do Right’ 기업 철학, 재단으로 이어져
[홀 플래닛 재단] ‘Do Right’ 기업 철학, 재단으로 이어져
미국 최남단 텍사스 주의 도시 오스틴(Austin) 공항에 발을 내딛자 6월임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벌써부터 후끈대기 시작했다. 전날 머물렀던 워싱턴D.C.의 청량한 날씨와 대비돼 햇살이 더욱 강력하게 느껴졌다. 워싱턴D.C.에서 오스틴까지는 국내선으로 3시간 20분에 걸쳐 텍사스 주의 수도 댈러스까지 간 뒤 다시 비행기를 환승해 남쪽으로 1시간 넘게 가야 했다.

홀 플래닛 재단(Whole Planet Foundation, 이하 재단)은 미국의 대형 식품 유통 업체인 홀 푸드 마켓(Whole Foods Market)이 2005년 설립한 재단이다. 재단은 오스틴의 홀 푸드 마켓 본사 건물 내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곳은 1978년 1호점을 낸 가게와 두 블록 거리에 있다.

한국에는 매장이 없기 때문에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홀 푸드 마켓은 미국·캐나다·영국에 325개 이상의 매장을 두고 있는 대형 유통 업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식품을 판매하며 소비자에게 질 좋은 먹거리를 싸게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설립·운영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한때 강남을 중심으로 유기농 식품 매장이 생기기도 했지만 시장 저변이 약하고 가격이 비싸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홀 푸드 마켓은 전 세계 51개국에서의 소싱을 통해 가격을 낮춰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깐깐한 품질관리를 통해 소비자의 신뢰를 얻은 것도 비결이다. 판매되는 제품들은 철저하게 동물 학대를 하지 않은 것이어야 하고 유해 물질이 첨가된 식품은 판매가 엄격하게 금지된다. 닭·돼지·소 등 모든 육류는 살았을 때 ‘우리나 새장 등에 갇혀 있지 않아야 하고 다리를 뻗을 수 있어야 한다’는 규정을 지켜야만 납품이 가능하다.

실제로 홀 푸드 마켓 매장의 치즈 케이크 등에는 ‘새장에서 사육되지 않은 조류에서 낳은 알(Eggs From Cage Free Poultries)’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또한 동식물 생장을 촉진하기 위한 호르몬을 사용하거나 가공식품의 경우 액상과당을 첨가한 제품은 매장에서 판매가 금지되는 등 안전하게 생산된 먹거리를 통해 소비자의 건강까지 생각하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기업 문화는 홀 플래닛 재단을 통한 자선 활동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홀 플래닛 재단] ‘Do Right’ 기업 철학, 재단으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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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마이크로크레디트 통한 간접 지원

후진국일수록 2·3차산업보다는 1차산업이 발달해 있고 농식품 위주의 제품을 소싱하는 회사의 특성 때문에 재단의 자선 활동은 주로 후진국에 맞춰져 있다. 이에 따라 재단의 활동 국가는 홀 푸드 마켓의 구매가 이뤄지는 51개국(재단 활동 국가는 1개가 더 많음)과 동일하다.

지원 방식은 100% 마이크로크레디트(Microcredit)다. 마이크로크레디트는 신용과 담보가 없는 극빈층에게 300달러 이하를 대출해 이를 자본금으로 소규모 가내수공업(Home-based Business)을 시작하도록 자활을 돕는 것을 말한다.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Grameen Bank)이 도입해 성공적인 결과를 낳음으로써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현재 그라민뱅크가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재단은 지원 국가에 그라민뱅크가 있을 때는 그라민뱅크에 펀딩을 제공하고 있다. 그라민뱅크가 없는 국가에는 비슷한 기능의 공익 재단을 지원하고 있고, 그마저도 없으면 설립을 유도하고 있다. 이런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재단 재무국장(Director of Finance)인 제이피 클로나인저(J.P. Kloninger)는 “가장 효율적이고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홀 플래닛 재단] ‘Do Right’ 기업 철학, 재단으로 이어져
마이크로크레디트를 통해 대출받은 극빈층은 이 자본금을 갖고 일할 수 있게 되고 안정적인 소득이 생기게 된다. 또한 빚을 갚기 위해 더욱 더 열심히 일하려는 동기까지 부여하게 된다. 재단 입장에선 대출자들이 다시 빚을 갚기 때문에 기금 규모가 작아도 꾸준한 자선 활동이 가능해지는 장점이 있다. 재단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대출금 회수율은 99%에 이르고 미국 외 지역에서는 96%를 기록하고 있다.

재단의 지원 대상은 100% 여성이라는 것도 특징이다. 이에 대해 클로나인저 국장은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여성은 대출을 받을 방법이 없을 때가 많고 또한 여성은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고 남성들처럼 음주·흡연·도박 같은 나쁜 버릇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재단 지원 대상 중 미국 내 여성 비율은 100%, 미국 외 지역은 90%에 이른다. 클로나인저 국장은 “특별한 경우엔 예외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여성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홀 플래닛 재단] ‘Do Right’ 기업 철학, 재단으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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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업체·기업·소비자 모두 인식 공유해

자선 활동은 직접 지원이 아닌 간접 지원을 하는 만큼 재단 규모는 단출하다. 재단 직원은 총 9명으로 본사 정직원이 6명이고 세계 각국을 관장하는 지역책(Rigonal Director) 3명은 계약직이다. 이 밖에 인턴 직원 2~3명을 두고 있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별도의 사무실을 두지 않고 홀 푸드 마켓 본사의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땅값이 비싼 뉴욕과 같은 대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재단의 사용 공간은 널찍한 편이다.

재단 운영 비용은 전부 모기업인 홀 푸드 마켓이 부담하고 있다. 인건비를 비롯한 비용 및 업무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2005년 설립 이후 지금(2012년 5월 6일)까지 이렇게 모기업이 간접 지원한 금액은 총 48억 원(423만 달러)에 달한다. 모기업의 현금성 기부 또한 63억 원(552만 달러)에 이른다. 홀 푸드 마켓 직원들 또한 1달러 또는 5달러 식으로 의사를 밝히면 월급 공제로 기부를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고객들의 순수 기부다. 비정기적으로 고객 기부(Fund Raising) 행사를 여는데, 올해 3월 한 달간의 행사에서 63억 원(550만 달러)의 기금이 모였다. 이런 비정기적 행사에서 모금한 금액은 설립 이후 지금까지 총 178억 원(1553만 달러)이다. 그러나 이 행사는 1년에 딱 한 달 정도만 진행한다. “고객은 음식을 사러 온 것이지 기부하러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 클로나인저 국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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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기부 행사가 아니더라도 고객들은 홀 푸드 마켓의 제품을 구입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부할 수 있도록 비즈니스 모델이 구축돼 있다. 제품 포장에 WFM(홀 푸드 마켓) 로고가 인쇄된 제품은 구매 시 일정 금액이 재단에 기부되고 있다. 예를 들어 ‘네이처 패스(Nature Path)’라는 제품은 1통 판매 시 공급사가 1달러를 기부한다. 홀 푸드 마켓 전용 패키지를 만들어 파는 것도 있는데, ‘알레그로 커피(Allegro Coffee)’는 WFM 에디션 판매 시 30센트를 기부한다. 이렇게 기업·협력사·소비자들로부터 다양한 방식을 통해 재단이 설립 이후 지금까지 조성한 펀딩 액수는 총 344억 원(2995만 달러)이다.

고객에게 올바르지 않은 먹거리는 제공하지 않는다는 홀 푸드 마켓의 비즈니스 모델은 공급사와 고객들 모두가 동의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좋은 제품을 공급하더라도 소비자가 외면하면 소용이 없고 공급사 또한 다양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홀 플래닛 재단의 성공 비결은 기업의 노력과 함께 협력업체·소비자가 ‘올바른 것(do right)’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닐까.
[홀 플래닛 재단] ‘Do Right’ 기업 철학, 재단으로 이어져
제이피 클로나인저 재무국장

취재진을 반갑게 맞은 클로나인저 재무국장의 명함에는 ‘J.P. Kloninger’라고 써 있었다. 사내에서는 ‘제이피’로 불린다. 농업공학 학사, 경제학 석사를 받은 뒤 델과 HP 등에서 근무했던 그는 현재 재단 내 살림을 책임지고 있지만 농업공학 전공을 살려 식품 재료의 해외 커넥션을 파악해 재단 활동 가능 국가를 찾는 것도 그의 주요한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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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의 활동은 100% 마이크로크레디트입니까.

재단은 수혜자에게 직접 빌려주지 않고 그라민뱅크와 같은 단체에 펀딩만 합니다. 그라민뱅크보다 더 많은 나라, 많은 지역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라민뱅크가 없는 곳은 그와 유사한 활동을 하는 단체를 지원합니다.

홀 푸드 마켓 매장을 한국에 오픈할 계획은 없습니까. 아니면 재단만이라도?

홀 푸드 마켓 진출 계획은 없습니다. 재단과 관련해서는 홀 푸드 마켓과 비즈니스가 있어야 지원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김치가 있나 해서 찾아봤는데, 마침 3~4개월 전에 한국에서 생산된 라이신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아마 방콕에 있는 아시아 지역책이 언젠가 지원할 단체를 찾아내지 않을까요.

아래층(홀 푸드 마켓) 매장에서 본 치즈 케이크에 붙은 ‘새장에서 키우지 않은 닭에서 나온 계란(Eggs From Cage Free Poultries)’ 스티커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생산 과정에서 올바르지(do right) 않은 것은 판매하지 않습니다. 액상과당이 들어간 가공식품은 팔지 않고 동물 학대나 호르몬으로 키운 육류도 판매하지 않습니다. 미국 정부 기준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데, 이것만 감시하는 직원도 있습니다.

한경비즈니스에 재단 소개 기사가 나간 뒤 한국에서 기부를 요청하는 전화가 쏟아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국어를)이해는 못하겠지만 괜찮을(OK) 겁니다.


오스틴(미국)=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