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둘째 아이가 친구들과 5박 6일 동안 자전거로 제주도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말을 불쑥 꺼냈다. 뜬금없는 말에 곧바로 안 된다고 반대했다. 그런데도 둘째는 완강했다. 친구들과 추억도 쌓을 겸 이번 기회에 꼭 자전거로 제주도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처음의 단호했던 거절과 달리 나는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만에 결국 여행을 승낙했다.

자식 이길 부모 없다더니 여행 가는 것 하나를 놓고도 자식과의 한판 싸움에서 보기 좋게 판정패를 당했다. 그럴 바엔 처음부터 화끈하게 승낙해 버렸으면 후한 점수라도 받았을 텐데 명분과 실리를 다 잃은 셈이다.

어느새 성인이 된 아이들을 보면서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단상들이 떠오른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아버지들이 그러한 것처럼 필자의 아버지 역시 과묵한 성품을 지닌 분이다. 말보다 그저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주는 분이시다. 예전엔 그런 아버지가 몹시 어렵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자식에게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아버지들을 보면 부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요즘 나는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매력이자 자식 사랑의 본보기였다는 것을 가슴으로 절감한다. 아버지는 내가 하고 싶다는 것이 있으면 반대하지 않으셨다. 그저 많이 생각하고 결정했느냐고 물으실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거기에 필요한 정신적·물질적 후원을 묵묵히 해주실 뿐이었다.

처음에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놔두시는 아버지가 한편으론 좋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무심해 보여 싫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그런 아버지의 행동 속에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당신의 인생관이 담겨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것은 어떤 결정이든지 자신이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그 결과에 스스로 책임을 지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셨다.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지시하기보다 시행착오를 겪는 자식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스스로 배우고 깨우치도록 하셨던 것이다.
[아! 나의 아버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가르침
고등학교 시절 적성에 맞지 않는 이과에 갔다가 보기 좋게 대학 입시에 낙방하고 재수를 하면서 문과로 바꾸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이제 와서 바꾸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높으니 안 된다고 반대하기보다 내 선택을 존중하고 후원해 주셨다. 아버지 혼자의 월급으로 4남매를 대학에 보내는 빠듯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염치없이 대학원에 가겠다는 아들의 결정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아버지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 학자가 아닌 다른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내게 보여주셨던 무한한 사랑은 사사건건 아이들의 결정에 개입하려고 드는 내게 또 하나의 가르침을 주신다.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게 하는 것이 훌륭한 자녀 교육임을….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 거실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쓰인 서예 작품이 걸려 있다. 그 액자를 볼 때마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헤아리고 이해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아버지가 떠오른다. 큰 나무 밑에서는 작은 나무들이 자랄 수 없다. 하지만 큰 사람 밑에서는 작은 나무들이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 아버지는 내게 큰 나무셨다. 나도 아이에게 큰 나무가 될 수 있을까?

정균승 군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