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정치권에서 대기업의 출자 구조에 대해 규제하게 되면 해당 기업들의 적극적인 투자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경제계는 이를 우려하는 바다.” 지난 8월 6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정치권의 순환출자 규제 추진에 맞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위와 같이 반대 입장을 밝혔다.

새누리당 남경필 의원이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기존 순환출자에 대해서도 형성된 가공 의결권을 전면 제한하는 내용의 ‘경제 민주화 3호 법안’을 발의하면서 재계를 중심으로 파란이 일고 있다. 유럽 재정 위기가 장기화되는 상황에 수출을 주력으로 하고 있는 국내 대표 기업들의 경영권이 흔들리면 국내 경제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순환출자 금지 법안에 대한 찬반 논쟁은 다양한 각도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가공 의결권 제한이 그 핵심이다. 순환출자 금지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대주주가 가공 의결권을 통해 적은 지분으로 과도한 경영권을 행사하며 폐해가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순환출자 금지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가공 의결권을 제한하면 국내 대표 대기업들의 의결권이 대폭 축소돼 그룹 해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며 맞서고 있다.

가령 삼성그룹은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보면 2012년 1분기 기준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7.48%)뿐만 아니라 삼성물산과 삼성화재의 지분을 포함해 12% 정도가 순환출자를 통한 의결권이다. 가공 의결권을 산출해 의결권을 제한하면 삼성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분은 5% 남짓으로 줄어들게 돼 경영권 위협이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경영권 보호를 위해 지분을 사들이면 되지만 그때 발생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최근 재벌닷컴에 따르면 삼성그룹을 비롯해 현대자동차·롯데·현대중공업·한진·한화 등 환상형 순환출자 형태의 지배 구조를 가지고 있는 6대 그룹을 분석한 결과 순환출자를 해소하기 위해 총 14조6440억 원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순환출자로 연결돼 있는 계열사 중 최소 비용이 예상되는 회사를 선택해 연결 지분을 대주주가 매입하거나 해당 계열사가 자사주로 매입할 때 발생하는 단순 해소 비용으로, 만약 이들 6개 그룹이 핵심 기업을 지주회사로 전환하면 단순 해소 비용의 배에 가까운 27조6410억 원이 소요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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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출자 해소에 막대한 비용 발생

사실 순환출자 해소 비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경제개혁연구소는 현대차그룹과 삼성그룹 등 순환출자가 존재하는 15개 기업집단의 순환출자 해소에 드는 비용을 9조6000억 원으로 추정하며 순환출자 해소를 위해 매각한 지분 중 지배 주주가 경영권 유지를 위해 반드시 취득해야 하는 지분만을 고려하면 지배 주주의 부담 금액이 더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경제개혁연구소가 추정한 순환출자 해소 비용은 현대차가 6조1665억 원, 현대중공업이 1조5763억 원, 삼성그룹이 1조2185억 원이었다. 이철행 전경련 기업정책팀장은 “지분 매각 시 법인은 차익의 24.2%, 개인 대주주는 차익의 22%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규모는 더 커진다”고 말한다.

온도차는 있지만 순환출자 해소에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 지점에 첫 번째 우려가 있다. 순환출자 해소 및 경영권 방어를 위해 대규모 자본이 소요되면 투자가 위축될 수밖에 없고 결국 국내 기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져 국가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오정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성장률이 3%도 안 될 것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2% 초반밖에 안 될 것 같다”며 “순환출자 해소에 수조 원이 든다는데 지금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투자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전 한국경제연구원장인 김종석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도 순환출자 덕분에 적은 자본으로 더 많은 기업을 설립하고 그 결과 더 많은 일자리와 소득 창출 기회가 만들어진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며 “지금 한국 경제에서 그룹 회장들의 기업 지배력을 축소하고 계열사 숫자를 줄이는 일이 일자리 창출과 투자 및 내수를 희생시켜야 할 정도로 중요하고 시급한 일인가”라고 반문했다.

외국에는 차등 의결권, 포이즌 필 등 경영권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들이 갖춰져 있지만 국내에는 이렇다 할 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있다. 순환출자로 연결된 지분을 해소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그룹 지배력이 약해지면 결국 외국자본의 적대적 기업 인수·합병(M&A)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정근 교수는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 기업에서 외국인이 차지하는 지분 비중이 높은데 경영권 문제까지 발생하면 적대적 M&A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며 “경영권이 외국인 손에 넘어가면 본사가 해외로 넘어가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한국 경제가 뿌리째 뽑힐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철행 팀장은 “순환출자를 해소하려면 경영권 방어를 위한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며 “정부가 퇴로도 열어주지 않고 푸시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M&A 전문 변호사인 이경훈 법무법인 이림 대표 변호사는 “우리나라 상법은 적대적 M&A에 노출됐을 때 공격자가 좀 더 유리한 환경”이라고 전제한 뒤 “재벌이 현재 소유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는 게 사회·경제적으로 바람직한지의 논의를 떠나 단순히 현상적으로만 보면 순환출자 해소가 외국자본에 적대적 M&A의 물꼬를 터줄 여지는 크다”고 말했다.

실제 과거에도 국내 대기업들은 외국 투기자본의 적대적 M&A 공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 2003년 뉴질랜드의 자산운용사 소버린은 SK(주)(현 SK에너지) 지분 14.9%를 사들인 후 경영권을 요구하다가 2년 만에 9000억 원이 넘는 차익을 남기고 철수했고 2006년에도 미국의 대표적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이 KT&G 주식을 매입한 뒤 경영 참여를 요구하다가 배당 등 1500억 원의 수익을 올리고 떠난 바 있다. 그뿐만 아니라 쌍용차·외환은행 등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거치며 외국계 자본에 인수된 기업에는 ‘기술 유출’, ‘먹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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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기업 경영권 방어 수단 없어

재계는 국내뿐만 아니라 도요타·타타· LVMH그룹 등 해외 기업들도 순환출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며 순환출자가 경영권 보호를 위해 국내 법 테두리 안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구조라는 입장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차등 의결권 같은 경영권 보호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자생적 방어 차원에서 만들어진 게 순환출자 구조”라는 의견이다. 기업의 소유 지배 구조에 대한 논의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종석 교수는 “순환출자 금지론자들은 적은 돈으로 왜 경영권을 행사하느냐고 하는데 주식회사의 경영권은 주식에 비례하지 않는다”며 “잭 웰치 전 GE 회장은 GE 주식을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최정욱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원은 “순환출자를 해소하자는 근본적 이유는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골목 상권 침해 등 경제력 집중으로 인한 폐해 때문에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지배 구조 자체가 아니다”고 말했다. 재계가 경제 위기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대해서도 “재계는 항상 경제가 좋지 않다고만 하는데 그러면 언제 하느냐”며 “체질 개선을 통해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순환출자 규제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순환출자를 해소하는 방향에 찬성한다는 입장에서도 지금이 적절한 시기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정재규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연구조정실장은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상황을 봐가면서 진행해야 한다고 본다”며 “순환출자로 인해 상당한 문제점이 있는 건 맞지만 기업들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 기간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순환출자에 대한 논의 자체가 기업들에는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한 성장통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며 그러나 “대선 정국과 연결돼 기업들에는 지나친 부담이 될 수 있으니 좀 더 냉정하게 시간을 갖고 생각해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