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재정 위기 속에서 여러 유럽 가전 업체들이 고전을 겪고 있지만 밀레만은 상류층을 위한 최고 품질의 가전으로 매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독일의 명차 브랜드처럼 전 세계 부유층 사이에 인기가 높은 명품 가전의 비결을 4대 경영자인 마르쿠스 밀레 회장에게 물었다. 지난 7월 31일 독일 북부 인구 9만 명의 작은 도시 귀테슬로에 있는 밀레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유럽 재정 위기 및 글로벌 경기 침체로 명품 가전 시장도 영향을 받을 것 같습니다. 시장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명품 가전 분야는 경기 침체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습니다. 우리 소비자들은 가격보다 품질과 내구성의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매출도 줄지 않았습니다. 다만 2008년 매출이 1.2% 떨어지긴 했지만 판매 부진이 아니라 유로 환율이 높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매년 2% 이상 성장하고 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에서 매출이 다소 줄기는 했지만 아시아 등 다른 나라에서 성장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각 국가의 가전 시장 중 명품 가전의 비중은 5~25%에 달합니다. 오스트리아는 25%로 가장 잘 발달돼 있고 아시아는 5% 정도입니다.
독일 가전 업체 아에게(AEG)는 매각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밀레가 선전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입니까.
밀레는 시장에서 명품 가전만 고집해 왔고 이 부문에 확고한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명품 시장에 초점을 맞춰 기술 개발을 해 온 것이죠. 결국 소비자들은 아무리 비싼 가격이더라도 양질의 제품에는 돈을 지불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다른 가전 업체는 대중 시장과 명품 시장 모두에 접근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고 있습니까.
아시아 시장은 밀레 매출에서 10% 정도를 차지하지만 성장률은 2~3자릿수에 달합니다. 한국 시장이 바로 큰 폭으로 성장하는 시장 중 하나죠. 아시아 시장보다 미국 시장이 조금 더 크고 매출의 75%는 유럽에서 나옵니다. 독일 자동차 제조사 BMW가 명품 자동차로 세계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밀레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국·인도·싱가포르 등 전 세계 50개 국가에 지사를 두고 독립적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생산 기지를 아시아 등 유럽 외의 지역에 둘 계획이 있습니까.
총 13개의 공장 중 9개가 독일에 있고 나머지가 체코 등 외국에 있습니다. 중국에도 작지만 생산 기지가 있죠. 1994년 밀레가 밀레타(Meletta)란 커피머신 회사를 합작으로 만들며 중국에 공장을 세웠습니다.
밀레의 연구·개발(R&D) 규모는 어떻습니까.
매출의 5~7%를 R&D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독립된 R&D센터는 없고 품목에 따라 전 세계의 대학과 공업 연구소 등과 협업을 통해 기술 개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아시아의 대학 연구진을 포함해 전 세계 연구·개발 인력은 약 1000명 수준입니다.
삼성과 LG 등 한국 가전 기업들은 한계에 부닥친 가전 시장을 넘기 위해 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고 있습니다. 밀레도 미래 성장 동력을 마련해야 하는 부담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밀레의 사업 영역은 가전을 벗어나더라도 공장에서 사용하는 식기세척기 등 대형 기계류입니다. 밀레는 ‘집중’을 주요 전략으로 삼고 있습니다. 기존과 전혀 다른 제품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무차입 경영을 하고 있는 가족 기업으로서 수익은 내부적으로 재투자되며 현재 품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가족 경영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일부 있습니다. 밀레는 가족 경영의 장단점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독일의 사회적 평가는 어떠한지요.
가족 경영은 가족 경영진 간에 이해와 신뢰가 형성돼 있다면 매우 효율적인 방식입니다. 하지만 가족 간 분란이 있다면 그만큼 어려운 경영도 없습니다. 자본가와 경영인이 동일하기 때문에 급변하는 시장 상황 속에서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단점은 서로 이해가 잘되지 않으면 오히려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시스템이란 점입니다. 독일에서는 경제 위기를 잘 극복한 중견 가족 기업이 매우 많습니다. 이런 기업들은 장기적인 투자가 가능하다는 강점을 갖고 있습니다. 세대를 이어오면서 투자에 적극적이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가족 기업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긍정적이죠. 경영진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세대를 이으며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밀레공장에 가면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독일과 일본은 장인 정신이 유명합니다. 하지만 최근 일부 일본 기업들이 시장을 읽기보다 기술을 과도하게 집착한 결과 경쟁사에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최고의 기술을 추구하는 기업으로서 이를 어떻게 봅니까.
밀레가 추구하는 것은 차별화된 기술과 내구성입니다. 밀레는 새로운 재료와 기술을 개발해 혁신을 이어 왔어요. 정체된 기술은 곧 시장의 외면을 받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밀레는 시장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혁신과 기술을 통해 시장을 이끌거나 고객의 니즈를 쫓아가고 있습니다. 기술만큼 디자인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밀레 제품의 디자인 특징은 무엇입니까.
밀레 디자인의 핵심은 20년 앞을 내다본다는 것입니다. 밀레 제품은 내구성이 뛰어나 보통 20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매년 바뀌는 트렌드를 적용하는 것을 지양하고 언제나 모던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합니다. 또한 밀레 디자인은 기능을 최적화할 수 있도록 설계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8월 말 베를린 가전 전시회 IFA가 열립니다. 밀레는 지난해에는 스마트 그리드를 선보였는데 이번에 선보일 제품은 어떤 제품입니까.
올해는 스마트 그리드(지능형 전력망)를 업그레이드한 제품을 선보일 것입니다. 좀 더 낮은 전력 비용으로 이용할 수 제품들이죠. 현재 한국 시장에도 스마트 그리드 제품의 출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전력과 협업을 통해 스마트 기능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을 구체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현재 중요합니다.
한국 기업들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밀레가 안정적으로 지난 100년 이상 성장해 왔던 것은 한눈팔지 않고 명품 전략 하나만을 파왔기 때문입니다.
귀테슬로(독일)= 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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