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진화, 세계 공익재단 현장 보고서 ①크누트앤드앨리스 발렌베리재단

글로벌 금융 위기는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핵심은 앞만 보고 달리던 신자유주의를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됐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쟁을 통한 부의 집중 그리고 이에 따라 발생하는 양극화는 새로운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4.0’에 대한 고민을 낳게 했다. 많은 이들은 그 키워드로 ‘공익재단’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공익재단들은 단순한 ‘자선’ 개념에서 벗어나 기업 경영 노하우 도입, 미래와 혁신에 대한 투자 등을 통해 적극적인 사회 변화의 주체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호부터 11회에 걸쳐 세계의 공익재단들을 찾아가 본다.
[발렌베리재단] 스웨덴 경제 움직이는 ‘큰손’ …과학 분야 집중 지원
[발렌베리재단] 스웨덴 경제 움직이는 ‘큰손’ …과학 분야 집중 지원
“20년간 부근을 지나다녔지만 ‘재단’이 여기에 있는지는 오늘에서야 알았네요.” 지난 6월 크누트앤드앨리스 발렌베리재단(이하 발렌베리재단)을 취재하기 위해 스웨덴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취재를 돕기 위해 재단이 있는 아르세날스가탄 4번지 앞에서 만난 교민 박성혜 씨는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8층 높이의 건물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발렌베리재단이 자리 잡은 곳은 오히려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할 만큼 너무도 눈에 띄지 않는 지역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재단이 자리 잡은 건물 옆 작은 공원에 스웨덴인들의 자랑인 ‘라울 발렌베리’의 동상이 서 있었다는 것이다.

라울 발렌베리는 스웨덴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외교관이었던 그는 자신의 지위를 활용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헝가리 유태인을 무려 10만 명이나 구해 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그를 ‘스웨덴의 신들러’라고 부른다. 물론 그 동상 역시 높이 2m가 채 되지 않는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수준의 조형물이다.

오히려 이보다는 동상 맞은편의 여객선 선착장에 모여 있는 관광객들에게 더 눈길이 갈 정도였다. 발트해와 맞닿은 스톡홀름은 도시 전체가 물길로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어 ‘북구의 베니스’라고 불리는 곳이다.

최근 동상의 주인공 라울의 성(姓) ‘발렌베리’는 한국에서 부쩍 친숙해졌다. 이유는 그의 후손들이 속해 있는 발렌베리 가문이 여러 기업을 지배하고 있는 방식이 한국 정부 및 대기업들 사이에서 새로운 지배 구조의 모델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0여 년간 스웨덴 내에서 발렌베리 가문이 지배하는 발렌베리 그룹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발렌베리 그룹은 창업자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1850년대 일으킨 이후 무려 5대에 걸쳐 경영권을 이어가고 있는 그룹이다. 연매출은 2010년 기준 1100억 달러로 스웨덴 국내총생산의 30%를 차지한다.

스웨덴의 대표적 은행인 스칸디나비아엔스킬타은행(SEB)과 일렉트로룩스·에릭슨·사브·ABB 등 스웨덴을 대표하는 간판 기업 19곳을 포함해 100여 개 기업의 지분을 갖고 있다. 발렌베리 재단에 들어서기 위해 문 앞에 서자 또 한 번 ‘잘못 찾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3층에 있는 재단에 들어서기 위해 꼭 타야만 하는 엘리베이터가 영화에서나 보던 1950~1960년대의 구식 엘리베이터여서일 뿐만 아니라 재단의 출입문마저 한국에서는 아파트 방문에나 쓰는 ‘그저 그런 나무 문’이었기 때문이다.
[발렌베리재단] 스웨덴 경제 움직이는 ‘큰손’ …과학 분야 집중 지원
이런 불안감은 다행스럽게도 금방 사라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발렌베리재단의 최고경영자(CEO)인 고란 샌드버그 교수가 직접 문 앞까지 나와 재단 최초의 한국 기자 방문을 반갑게 맞아줬기 때문이다.

채 스무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근무하고 있는 발렌베리재단은 스웨덴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발렌베리 그룹 내에서도 핵심 인물들만 모여 있는 곳이다. 이유는 발렌베리 그룹의 지배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발렌베리 가문의 사람들은 기업의 주식을 직접 소유하지 않는다. 각 기업들의 주식은 지주회사이자 투자회사인 인베스터가 갖고 있다. 그리고 또다시 인베스터의 주식은 발렌베리 가문 소속 4개의 공익재단이 가지고 있다. 발렌베리재단을 포함한 4개의 재단들은 인베스터의 주식 24.6%를 소유하고 있다. 이 중 85%가 크누트앤드앨리스 발렌베리재단의 소유 주식이다.
[발렌베리재단] 스웨덴 경제 움직이는 ‘큰손’ …과학 분야 집중 지원
프로젝트 하나에 1253억 원 쏟아 부어

“절대로(Absolutely) 관여하지 않습니다. 프로젝트를 선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200여 명의 과학자로 구성된 위원회의 몫입니다(고란 샌드버그 박사).” 발렌베리재단의 활동은 크게 두 부문으로 나뉜다. 하나는 앞서 말한 투자 부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공익 활동 부문이다.

발렌베리재단의 공익 활동은 일반적 재단들과 달리 ‘과학’ 분야에 집중된다. 즉 전 세계의 생물학·화학·기초과학 그리고 의·약학 등의 연구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한다.

60억 유로(약 8조3519억 원) 규모의 기금을 가지고 발렌베리재단은 세계의 과학 연구 프로젝트에 매년 1000억 원에서 1500억 원을 쏟아 붓는다. 작년에만 전 세계 25개의 과학 연구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가장 대표적 프로젝트인 휴먼 프로테움 프로젝트에는 최근 몇 년 새 약 9000만 유로(약 1253억 원) 규모의 자금을 투입했다.
[발렌베리재단] 스웨덴 경제 움직이는 ‘큰손’ …과학 분야 집중 지원
인간의 유전자지도를 분석하는 휴먼 프로테움 프로젝트에는 유럽과 미국은 물론 중국·인도·한국의 과학자들까지 참여한다. 물론 이처럼 천문학적인 자금이 집행됨에도 발렌베리재단은 각 프로젝트들에 ‘확실한 결과’ 요구하지 않는다.

발렌베리재단이 결과가 사업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과학 연구에 집중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피터 발렌베리 회장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피터 발렌베리 회장은 발렌베리 그룹의 전 세대 총수로, 현재 그룹을 이끄는 ‘투톱’ 마르쿠스 발렌베리 SEB 회장의 삼촌이자 야콥 발렌베리 인베스터 회장의 아버지다. 샌드버그 박사는 “피터 발렌베리는 과학만이 인간의 삶을 진보시킬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서 “우리가 그동안 도달하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 발렌베리 가문의 책임이라고 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고란 샌드버그 박사 역시 노벨상선정위원회의 회원이고 생물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데, 5년 전 피터 발렌베리가 직접 전화를 걸어 CEO로 영입했다.

발렌베리재단의 활동이 구분돼 있는 만큼 재단 내의 의사결정도 철저하게 이분법으로 나뉘어 있다. 발렌베리재단의 이사진은 아홉 명이다. 이 중 다섯 명이 ‘더 패밀리’, 즉 발렌베리 가문이며 나머지 네 명은 샌드버그 박사를 포함한 외부 인사다. 이 중 CEO인 샌드버그 박사는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과학 프로젝트에 대한 선정 작업을 한다.

선정 작업은 그와 함께 200명의 선정위원회 멤버들이 진행한다. 프로젝트가 선정되면 아홉 명의 이사진이 한자리에 모여 각각의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 자금을 결정한다. 발렌베리 가문의 사람들은 이사회에서 프로젝트에 투자의 규모에 대해 논의할 뿐 선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의 전문성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발렌베리재단의 지금 모습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에 의해 탄생했습니다(고란 샌드버그 박사).” 발렌베리재단 사무실은 어림잡아 265㎡(80여 평) 규모에 불과하다. 로비를 가운데 두고 여남은 개의 방이 빙 둘러 들어서 있다.

각 방의 크기는 23~26㎡(7~8평) 정도. 공동으로 쓰는 회의실과 직원들이 쓰는 사무실 등을 제외하면 모두 5인의 발렌베리 가문 사람들과 고란 샌드버그 박사 그리고 FAM(Foundation Asset Management)의 CEO인 라스 웨덴본 대표가 근무하는 방이다. 그리고 이들을 잇는 로비 한가운데에는 재단의 설립자인 크누트 발렌베리 그리고 그의 아내 앨리스 발렌베리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다.

1917년 설립된 발렌베리재단의 역사는 스웨덴 사회상의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재단의 창립자이자 2대 총수인 크누트 발렌베리는 은행은 물론 제조업까지 진출해 가문의 부를 키웠다. 하지만 1916년 스웨덴 정부에서 금산 분리를 강화하자 은행을 통해 자회사를 지배하던 크누트는 갖고 있던 주식을 옮길 곳을 찾아야 했다. 그게 1916년 설립된 인베스터다.
[발렌베리재단] 스웨덴 경제 움직이는 ‘큰손’ …과학 분야 집중 지원
크누트에게는 또 하나의 고민이 있었다. 바로 앨리스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다는 것. 자신의 부가 당대에 끊어지지 않고 후대까지 이어지기 위해서 한 선택이 바로 발렌베리재단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후대들이 재단을 통해 기업을 ‘소유’하기 힘들더라도 ‘지배’는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또 한 번의 변화는 1938년에 일어난다. 당시 스웨덴은 극심한 노사분규가 있었다. 물론 노동자 층의 타깃은 최대 재벌인 발렌베리 그룹이었다. 그 결과 당시 스웨덴에서는 기업 노동자 정부의 3자 간 ‘노·사·정 대타협’을 체결했다.

이 협약의 핵심 내용은 ‘차등 의결권 제도’를 도입해 오너 일가의 기업 지배권을 인정하되 대신 회사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결과 발렌베리재단의 지배력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차등 의결권 제도로 의결권이 있는 주식은 일반 주식의 최대 1000배(현재는 최대 10배)에 달하는 의결권을 부여받게 됐기 때문이다.

2007년 발렌베리재단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는다. 발렌베리재단 소유의 FAM이란 법인을 신설한 것. FAM의 역할은 재단은 물론 인베스터 및 기타 발렌베리 그룹의 투자 및 경영을 컨트롤하는 것. 즉 FAM을 통해 인적 지배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경제성장을 이끌어낸 주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반기업 정서는 다른 그 어느 나라보다 높다. 재미있는 사실은 발렌베리 가문에 대해 현지 사람들은 ‘존경’까지는 아닐지라도 거부감 같은 것을 전혀 갖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발렌베리재단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유리창 너머로 언뜻 보인 야콥 발렌베리가 커피를 타는 모습에선 오히려 친근함마저 전해져 올 정도였다.

물론 스웨덴에서도 반기업 정서는 있다. 이케아의 창업자이자 세계 4위의 부자 잉그바르 캄프라드처럼 세금을 피하기 위해 국적까지 버린 기업인들에 대해서는 ‘맹공’을 퍼붓는다. 사실 세계인들이 스웨덴 하면 떠올리는 대중 가수 ‘아바(ABBA)’ 역시도 비슷한 평가다. 발렌베리 가문이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럽의 명문가로 평가받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시대의 요구를 거스르지 않으며 변신해 온 그들의 합리적인 모습에 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지배하되 소유하지 않는 경영’의 중심에는 바로 발렌베리재단 같은 공익재단이 있다.



라스 웨덴본 FAM 대표(오른쪽) 미니 인터뷰
[발렌베리재단] 스웨덴 경제 움직이는 ‘큰손’ …과학 분야 집중 지원
라스 웨덴본 FAM 대표는 발렌베리 그룹의 핵심 인물 중 하나다.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FAM의 이사회에는 피터 발렌베리, 마르쿠스 발렌베리, 야콥 발렌베리 등 발렌베리 가문의 수장이 모두 소속돼 있다. 2000년 인베스터의 CFO로 발렌베리 그룹에 합류한 그는 2007년 FAM 설립 당시부터 CEO로 일하고 있다. 웨덴본 대표와의 인터뷰는 원래 예정돼 있지 않았지만 고란 샌드버그 박사의 소개로 갑작스레 이뤄졌다.


FAM은 어떤 회사입니까.

그룹 내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 중 하나입니다. FAM은 그룹 내 각 회사들에 대한 경영 활동을 검토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투자 대상을 물색하는 역할을 합니다.

현재 누가 소속돼 있나요.

모두 다섯 명입니다. 3인 가문 사람들과 저 그리고 CFO인 크리스티안 실데비(사진의 왼쪽) 매니저입니다.

대표님과 실데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가문 사람들의 의사결정을 돕는 겁니다. 이들에게 좋은 기업을 소개하고 경영 활동을 조언하는 것이죠.

향후 어떤 기업에 투자할 예정입니까. 혹은 투자의 특징이 있다면.

결정은 가문 사람들의 몫이라 쉽게 이야기하긴 어렵습니다. 특징은 매우 장기적인 투자를 선호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업이 좋은 기업인가요.

먼저 연구·개발 능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직원들의 인적자원과 경영진의 매니지먼트 능력도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확실한 장기 플랜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삼성전자 등 여러 기업을 둘러보셨더군요. 어떤 느낌이었나요.

역동적이었습니다. 인상 깊었죠.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스웨덴 기업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은 물론 아시아는 세계경제 부활의 핵심이니까요.



스톡홀름(스웨덴)=이홍표 기자 haw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