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1937년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그리고 그 당시 할아버지가 집안을 살피지 않아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가장 역할을 하셨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아버지는 대학까지 고학으로 졸업하셨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공인회계사 자격을 취득, 얼마 전까지도 사회생활을 하셨다. 이러한 일생을 살아오신 아버지의 존재는 내게 어려서는 사랑의, 청소년기에는 반항의, 중년인 지금에는 존경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우리 집은 산동네에 살았다. 어느 눈 오는 겨울날 아버지는 널빤지를 가지고 썰매를 만들어 형과 나를 태우고 산동네를 끌고 오르락내리락 하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끌어주는 조그만 썰매 위에 형과 붙어 앉아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던 그 당시를 회상하면 지금도 가족 간의 사랑을 느낀다. 지금도 그 동네 앞을 지나다닐 때면 아버지가 집 마당에서 썰매를 만드시던 모습이 생각나곤 한다.

청소년기를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반항의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고생하면서 자수성가한 아버지들이 그러하듯이 고집이 무척 강한 분이다. 중학교 시절 강남이 발전하면서 주위의 친구들이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모두 강남으로 이사 가기를 희망했지만 아버지는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이 좋다면서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 결과 부모님은 40년째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다.

아마도 부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집에 사실 것 같다. 이러한 아버지의 고집과 나의 사춘기는 맞물리면서 잦은 충돌이 있었다. 아버지는 스스로 이 정도로 성공했는데 우리 형제가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기대에 못 미치는 것에 대해 불평하셨다. 더 나아가 자식에게 경제적·정신적으로 헌신하는 당신에게 반항하며 곰살맞지 않은 우리 형제에게 서운해 하셨다.

마흔을 훌쩍 넘어서면서부터 내가 느끼는 것은 사회생활은 고달프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불안감은 증가하며 이로 인해 주변의 인간관계도 젊은 시절과 달리 메마르기 십상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는 가끔 아버지가 걸어 오셨을 지난날을 상상해 본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나는 상당히 유복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년이 된 아들은 이러한 풍요로운 환경이 아버지의 헌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요즈음 느끼고 있다. 중년이 된 후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애정만이 아닌 존경을 수반하는 감정으로 바뀌었다.
[아! 나의 아버지] 사랑, 반항, 그리고 존경의 대상
[아! 나의 아버지] 사랑, 반항, 그리고 존경의 대상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가 2007년 패혈증을 크게 앓고 나신 후 사회생활에서 은퇴하셨다. 지금은 방송통신대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 아버지 나이에 중국어를 쓰실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고사 기간에는 밤을 새우며 공부하신다. 이러한 적극적이며 도전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내가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올해부터 자문업이라는 개인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는지도 모른다.

두려움보다 칠순 노인도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데 사십 중년이 못할 게 뭐 있냐는 생각에서다. 이제 마흔이 된 아들은 고집불통의 칠순 노인이 된 아버지에게 쑥스러워 직접 해보지 못하는 말이었지만 이 이야기하고 싶다. 아들로서 사랑한다고 남자로서 존경한다고….

홍진표 V&S투자자문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