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지난 1분기 성과를 토대로 최근 잇달아 발표되는 각국의 수정 전망치를 들여다보면 그 어느 때보다 ‘좀비 국면’을 우려하는 시각이 많아졌다.

‘좀비(zombie)’는 본래 조직 이론에서 나온 용어다. 근로자가 직장에 출근하지만 기업의 목적인 이윤 창출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모든 정책도 정책 당국의 ‘신호(signal)’대로 정책 수용층이 ‘반응(response)’해야 의도했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잘 작동되지 않는다면 위기 극복은 그만큼 지연되고 세계경제는 다시 침체 국면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스티븐 로치 모건스탠리 회장은 이미 오래전에 미국 경제 앞날의 최대 적(敵)으로 ‘좀비 소비자’를 꼽았다. 총수요 항목별 국내총생산(GDP) 기여도에서 민간 소비가 70%를 차지하는 미국 경제 구조상 정책 당국의 의도대로 소비자가 반응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4년 전 금융 위기 이전까지 소비 지향 생활 패턴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미국 소비자들이 좀비 현상을 보이는 것은 ‘디레버리지(deleverage)’ 행위 때문이다.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미국 소비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부채를 축소하고 저축을 늘려 왔다. 헤지 펀드 업체인 시브리즈 파트너스의 더글러스 카스 대표는 미국 국민들의 디레버리지 행위를 스크루(screw), 즉 ‘쥐어짠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미국 경제가 앞으로 일본 경제처럼 ‘5대 함정’에 빠져 ‘잃어버린 10년’에 빠질 것이라는 시각이 대두되고 있는 것도 ‘좀비 소비자’ 우려 때문이다. 5대 함정은 무엇보다 정부의 의도대로 경제 주체들이 반응하지 않아 모든 정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정책의 함정(policy trap)’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 경기 부양 방안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화정책은 ‘유동성의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좀비론 확산되나, 세계경제의 적…‘마라도나 효과’ 절실
이처럼 정책의 함정과 유동성의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 주체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려 소비나 투자를 하지 못하는 ‘빚의 함정(debt trap)’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또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도 최종 목표인 경쟁력 개선 여부와 관계없이 구호만 반복적으로 외치는 ‘구조조정의 함정(structure trap)’에 빠져 있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어떤 나라든 이런 상황에 놓이면 경제 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이 증대돼 예측 기관들은 전망이 또 다른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의 함정(uncertainty trap)’에 빠지게 된다.

일본 경제가 좀비 국면에 처한 지는 오래됐다. 1990년대 이후 거듭된 정책 실패가 가장 큰 요인으로 ‘제로’ 금리와 GDP의 230%에 달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 채무 등이 장기간 좀비 국면을 대변해 주는 후유증이자 상징물이다. 경제 구조적으로 5대 함정에 장기간 빠져 있는 것도 주요 원인이다.

앞으로 일본 경제가 재차 우려되고 있는 좀비 국면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내수 부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수출의 성장 기여도는 1970년대 이후 0.5~0.8% 포인트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데 비해 내수 기여도는 1970년대 3.8% 포인트, 1980년대 4.0% 포인트에서 1991~2008년 중 0.6% 포인트로 급락했다. 그 결과 GDP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89.6%에서 2008년에는 82.5%로 크게 하락했기 때문이다.

최근 하락세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내수 비중은 다른 나라에 비해 여전히 큰 편이어서 내수 확대 없이 좀비 국면에서 탈피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내수 부진이 고용과 임금 불안정성 증대, 인구 고령화 진전 등 당장 해결하기 곤란한 구조적 요인들에 주로 기인하기 때문이다. 재정 여건도 크게 악화돼 1990년대처럼 정부가 민간 수요를 적극적으로 대체해 촉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좀비론 확산되나, 세계경제의 적…‘마라도나 효과’ 절실
일본, 좀비 국면 몰려

이 때문에 간 나오토 정부 조기 하야 이후 들어선 노다 정부는 수출 등을 통해 내수 부진을 보완하고 장기간 침체에 빠진 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엔고 저지책에 나섰다. 취임 이후 엔화를 약세로 돌려놓기 위해 10조 엔 이상의 시장 개입만 하더라도 수차례에 달했다. 하지만 ‘유럽 위기’가 지속되면서 효과를 거두지 못함에 따라 좀비 국면에 몰리고 있다.

모든 위기국들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서면 불가피하게 외부 수혈을 받게 된다. 바로 구제금융이다. 이후 ‘IMF 신탁통치’니 해서 국치(國恥)를 겪지만 이때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구제금융을 받은 대가로 위기 극복 의지를 국제적으로 보여주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리스는 국제금융 시장에서 이미 ‘좀비 위기국’으로 취급당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구제금융을 받았지만 국민들은 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해 고통을 분담하기보다 같은 상황에 처해 금 모으기를 했던 한국 국민과 달리 오히려 금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웃지 못할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모든 경제 현상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이 잘 통용된다. 유럽 국가처럼 무늬만 회원국(bad apples)과 건전한 회원국(good apples)을 ‘통합’이라는 한 바구니에 담아 놓으면 건전한 회원국들도 썩게 된다. 이미 유럽 재정 위기가 장기화됨에 따라 현재 유로 랜드 회원국이라 하더라도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무늬만 회원국’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지금까지 이 무늬만 회원국들을 끌어가는 과정에서 이제는 ‘건전한 회원국’들까지 점염되는 임계 상황을 맞고 있다.

그런 만큼 그리스가 더 이상 고통을 부담하지 않는다면 다른 회원국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유럽 통합에서 탈락시키는 충격요법이다. 조지 소로스 등이 제시하는 ‘투 트랙(two track)’, 즉 ‘건전한 회원국’들은 계속 통합 단계를 밟아가고 차제에 ‘무늬만 회원국’들을 탈락시키는 방안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좀비론 확산되나, 세계경제의 적…‘마라도나 효과’ 절실
우리 경제 내에서도 재계를 중심으로 ‘최근에는 제대로 된 정책이 제때에 나오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다. 앞으로 어떤 대책을 추진하든 간에 의도했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정책 수용층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선거 등을 겨냥해 포퓰리즘적인 정책을 쏟아내다 보면 우리 경제도 ‘좀비 국면’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예측 기관들은 각국이 우려되는 ‘좀비 국면’을 극복하기 위해 현시점에서 ‘마라도나 효과’가 절실하다고 권고한다. ‘마라도나 효과’는 펠레와 함께 월드컵 영웅인 마라도나에 대한 믿음이 강해 수비수가 미래를 예측해 행동하면 다른 쪽에 공간이 생겨 정작 골을 넣기가 쉬었다는 데서 비롯된 용어다.

현시점에서 ‘마라도나 효과’가 절실하다는 것은 각국의 정책 당국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정책 수용층들이 자발적으로 협조한다면 유럽 위기 등과 같은 당면한 현안을 풀 수 있고 세계경기는 회복될 수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