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독일의 통일은 유럽통화제도(EMS) 위기를 불러 왔다. 부유한 서독과 가난한 동독의 통일에 따라 독일 정부는 동독의 재건을 위해 막대한 돈을 풀었고 인플레이션 관리를 위해 2년 동안 금리를 열 번이나 올린다. 고금리를 좇는 돈의 특성상 글로벌 자본이 독일에 몰리면서 영국을 포함한 이웃 유럽 국가들이 덩달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금리 인상에 뛰어들었다. 이미 체력이 저하돼 있었던 영국 경제에 고금리는 치명타였고 파운드화의 하락은 불 보듯 뻔했다.
이때부터 피 냄새를 맡은 글로벌 투기 자본 하이에나의 공격이 시작된다. 막대한 자금이 파운드 공매도에 투입됐고 잉글랜드은행은 파운드화 방어에 급급하게 된다. 영국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파운드의 가치를 유지하느라 무진 애를 썼는데 파운드화의 평가 절하를 예견했던 글로벌 투기 자본은 비싼 가격에 파운드화를 대거 매각했다. 결과는 투기 자본의 예상대로 파운드화 폭락과 공매도 대성공이었다. 영국과 이탈리아의 탈퇴로 EMS 시스템은 붕괴될 위기에 처한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97년 말 한국의 원화 가치는 불과 한 달여 사이 100% 가까이 폭락했다. 1997년 초 840원 수준이었던 원·달러 환율이 같은 해 말 한때 달러당 1964원까지 치솟았다. 한국 환란 중에도 틀림없이 글로벌 투기 자본이 공매도를 통해 투기 차익을 챙겼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1992년 파운드화를 공격한 소로스 회장처럼 구체적 내용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금융 시장의 제로섬 메커니즘에 의해 누군가가 이득을 챙기면 누군가는 잃는다. 외환 위기 과정에서 외국인들이 떼돈을 벌었고 한국인들은 그만큼 큰 피해를 본 것이다. 졸지에 수많은 직장인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숱하게 많은 가정이 파괴됐다. 개인·가정·기업·국가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난리를 겪었다. 이와 같이 금융 위기는 한 조직을 졸지에 무너뜨릴 수 있는 킬러 리스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땅에서 외환 위기 사태와 같은 금융 위기의 재발은 막아야 한다.
금융 위기의 악몽은 후환이 크고 뒤끝이 길다. 영국은 1992년 EMS 탈퇴 이후 아직도 유로화를 쓰지 않고 있다. 2016년 영국 국민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도 금융 위기의 아픈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외환 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했다고 하는 한국도 그 과정에서 성장 동력을 상실해 여전히 저성장 국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위기 극복 과정에서 구조 조정의 이름 아래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그에 따른 노동 시장의 왜곡과 부작용이 우리 경제의 지속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금융업은 제조업과 다르다. 고도의 압축 성장 과정에서 한국은 제조업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금융업의 경쟁력은 매우 실망스럽다. 대규모 자본과 함께 국제적 차원에서 고도의 신용 네트워크 구축과 글로벌 금융 노하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제부터라도 금융업 리빌딩에 애써야 마땅하다. 장동한 건국대 국제무역학과 교수·한국보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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