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니던 일제강점기 때는 일반 병원은 문지방이 높아 일본 사람과 잘사는 사람들만 이용했고 일반 서민들은 다니지 못했다. 일본말을 모르는 서민들은 주로 한약방에 다녔다. 아버지는 대구 칠성동이라는 서민 동네에서 한약방을 하셨다. 아버지는 신학문을 공부하지 않고 한문만 공부해 한의원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한약방은 비교적 허름하고 초라했다. 지금의 경동시장 한약 재료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한의사는 한의원이라고 불렀다. 우리 집 한약방에는 한약 재료가 가득 있었다. 당시 내가 학교에 가면 내 몸에서 한약 냄새가 난다고 친구들이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 것이 싫었다. 사람들이 아파서 아버지에게 약을 지으러 올 때 현금 대신 산나물이나 버섯 혹은 토종꿀을 약 값으로 대신 주고 갔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산나물이 항상 흔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산나물을 먹기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내 다리에 종기가 났다. 아버지는 그 종기를 곪게 해 침으로 따고 직접 입으로 고름을 빨아서 뱉고 그곳에 고약을 발라 주셨다. 중국의 ‘삼국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다.

옛날 한약방 안의 천장에는 약봉지가 가득 매달려 있었고 벽에는 동양화 한 폭과 한시 족자 몇 개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 동양화를 좋은 그림으로 생각하지 않아 한 번도 자세히 들어다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원근법 화법으로 그린 서양화만이 좋은 그림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그림은 내 소유가 됐지만 그 동양화를 응접실에 걸지 않고 옷을 보관하는 방 벽에 걸어 두었다.
[아! 나의 아버지] 한약방 벽의 동양화
작년 추석 때 국립 박물관에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를 전시한다고 해서 우연히 가봤다. 일본 천리대에서 빌려 온 것으로 두 시간이나 기다려 그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그림을 보니 우리 집에 있는, 아버지가 남긴 동양화와 유사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그 동양화를 상세히 들여다봤다. 비단 천 위에 그린 그림으로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그림 위에 한시(漢詩)가 쓰여 있고 말미에 운제(雲齋)라는 화가의 이름과 붉은 낙관(落款)이 있었다. 즉시 인터넷에서 운제라는 이름을 찾아봤다. 이의양(李義養)이란 이름이 나왔고 호가 운제(雲齋)로서 영조 44년 서기 1768에 난 사람으로 당지 화원이며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까지 갔다 왔다고 기술돼 있었다.

다음 날 서울 시내에 나가 서점에 가서 조선시대 화가 이름을 찾으니 운제라는 화가의 기록이 있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 한약방 벽에 걸려 있었던 그 그림이 영조 때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기쁘고 그런 그림을 갖고 있던 아버지가 한층 더 존경스러웠다. 내가 왜 일찍 이 그림에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 후회스럽다. 지금 나는 이 그림을 어느 기관에 기증할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우리 집의 가보로 남겨둘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구본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