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는 커피(coffee)의 음역어

조선 최초의 커피 마니아가 고종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손탁 여사를 통해 처음 커피를 접한 고종은 궁궐에 돌아온 뒤에도 커피를 즐겨 마셨고 덕수궁 내에 아예 정관헌이라는 정자를 지어 손님들과 함께 커피를 나눠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더한층 유명한 커피 에피소드는 김홍륙이 시도한 고종 암살 사건에서 비롯한다.

커피에 강력한 아편을 탔지만 맛과 냄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고종이 커피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위험을 비켜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작가 김탁환은 바로 이 김홍륙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노서아 가비’, 즉 ‘러시아 커피’의 음차를 제목으로 한 재기발랄한 스릴러를 썼다. 영화 ‘가비’는 ‘노서아 가비’의 틀을 가져오되 전체적인 정서를 크게 바꾼 작품이다.

1896년 고종(박희순 분)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대한제국을 준비하던 혼돈의 시기. 러시아 대륙에서 커피와 금괴를 훔치다 러시아군에게 쫓기게 된 일리치(주진모 분)와 따냐(김소연 분)는 조선계 일본인 사다코(유선 분)의 음모로 조선에 파견된다.

따냐는 고종의 곁에서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로, 일리치는 사카모토라는 이름의 일본군 장교로 궁궐에 침투한다. 그들을 조종하는 사다코의 목적은 고종 암살이다. 일명 ‘가비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작전이 시작된 후 매 순간 따냐의 안위를 걱정하는 일리치와 달리 고종과 모종의 정서적 교감을 나누게 된 따냐는 조금씩 달라진다.
[영화] ‘시큼털털함’에 그친 퓨전 시대극 가비
원작의 경쾌한 리듬과 달리 영화 ‘가비’의 기본 정서는 지독한 멜로드라마와 뜨거운 민족주의를 결합하자는 쪽이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의 제목, 즉 커피 자체는 영화상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고종과 일본, 러시아 사이의 숨 막히는 알력 싸움이 냉랭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신문물의 상징인 커피의 향에 대한 찬사들은 녹아들지 못하고 겉돈다. 몇몇의 외국인들의 농간만으로 조선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는 설정 역시 커피의 맛을 망치는 설탕처럼 제대로 녹아들지 못한다.

‘뿌리깊은 나무’처럼 시대물의 모던한 변형으로 눈높이가 한껏 높아진 관객들에게 ‘가비’의 매끄럽지 못한 하이브리드 성향은 성에 차지 않을 것 같다. 차라리 ‘가비’를 한국판 세련된 스파이물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면, 혹은 다소 낡아 보이더라도 진심으로 설득하는 민족주의의 극점을 찍을 수 있었다면 낫지 않았을까. 한국의 근대화가 막 이뤄지기 시작한 시기의 흥미로운 소재를 숙성하기에는 영화의 패기도, 믿음도 부족했다.



마이 백 페이지
감독 야마시타 노부히로
출연 쓰마부키 사토시, 마쓰야마 겐이치, 구쓰나 시오리
[영화] ‘시큼털털함’에 그친 퓨전 시대극 가비
1969년 신입 기자 사와다는 무력 투쟁 조직을 이끄는 대학생 우메야마를 만난 뒤 그를 독점 취재하려고 한다. 어느 날 자위대 병사 살인 사건을 보도하는 TV 뉴스에 우메야마의 아지트에 있던 붉은 헬멧이 등장한다. 전 아사히신문 기자 가와모토 사부로의 논픽션 ‘마이 백 페이지: 어느 60년대 이야기’가 원작이다.


크로니클
감독 조시 트랭크
출연 데인 드한, 알렉스 러셀, 마이클 B 조던
[영화] ‘시큼털털함’에 그친 퓨전 시대극 가비
평범한 고교생 앤드루·맷·스티브는 우연히 발견한 땅굴에 들어간 뒤 초능력이 생겼다는 것을 깨닫는다. 슈퍼 파워를 갖게 된 이들은 온갖 장난을 벌이는데, 이들의 힘은 점점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커져간다. 그러던 중 앤드루가 이상행동을 보이며 점점 공격적으로 변한다.



서약
감독 마이클 수지
출연 레이첼 맥아담스, 채닝 테이텀
[영화] ‘시큼털털함’에 그친 퓨전 시대극 가비
열렬히 사랑하는 부부 페이지와 레오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페이지는 남편을 만나기 전의 기억만 회복한다. 레오는 아내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페이지의 옛 애인 제레미가 나타난다.

김용언 영화 칼럼니스트 plat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