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기 석교상사 대표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윽한 커피향이 먼저 맞는다. 각종 원두와 드립 기구 등이 회의용 테이블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한쪽 구석에는 로스팅 기계까지 자리하고 있는 풍경이 작은 카페를 연상케 한다. 아닌 게 아니라 회의실은 지난 2월 1일부터 사내 카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이른바 ‘카페 드 맘보’. 카페를 오픈한 이 회사의 대표는 아침마다 회사 알림방에 ‘오늘의 커피’ 메뉴를 올리고 ‘손님’으로 찾아오는 직원들과 하루 2~3차례 커피 타임을 갖는다.

“커피 좋아하세요? 오늘의 커피는 에티오피아 원두 2종과 코스타리카 원두예요. 모두 흔하지 않은 원두죠. 제가 직접 로스팅했고요. 가장 맛있는 커피 물 온도는 섭씨 영상 87도 정도라 끓인 물은 조금 식혀주는 게 좋아요. 그라인딩한 커피를 드립할 때는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먼저 적셔요. 그 과정을 ‘점적’이라고 하는데 그럼 얘들이 가장 좋은 맛을 낼 준비를 하죠.”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끊임없이 ‘전문가급’ 이야기가 쏟아진다. 그에게 커피는 곧 ‘생명체’다. 그러니 세심하고도 정성 가득한 손길은 당연한 얘기다. “오늘 커피는 좀 약하네요. 제가 약간 긴장했나 봐요. 커피는 같은 원두라고 하더라도 매번 다른 맛이 나고, 또 내리는 사람에 따라, 얼마나 공을 들였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참 알면 알수록 신기한 세계죠.”

흥미진진한 대화를 이끌어 가는 이는 석교상사 이민기 대표다. 석교상사는 일본 브리지스톤 스포츠의 골프 브랜드인 투어스테이지의 수입 총판으로, 골프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회사다.
[뷰티풀 라이프] 골프는 ‘비즈니스’…커피·바이크는 ‘생활’
인생을 바꿔 준 두 번의 계기

워낙 커피를 좋아하기는 했다. 남들이 자판기 커피를 마실 때도 커피메이커에 원두커피를 내려 마시던 그였다. 4년 전 본격적으로 커피를 배우게 된 건 아내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바이크를 타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40대 후반을 지나고 있었던 이 대표는 젊을 시절의 그 뜨거운 열정이 식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반문하게 됐다. 뭔가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거울 속의 자신이 무척 낯설게 다가왔다. 거울 속에는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온 찌든 40대 후반의 남자가 서 있었다. 면도기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매일 아침마다 습관처럼 해온 일이 갑자기 싫어졌다. 그렇게 수염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외모가 확 변했다.

가족들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느냐”, “왜 그러느냐”며 걱정했지만 굳건히 버텼다. 한 달이 좀 지났을까. 수염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나니 스스로 꽤 잘 어울리는 것만 같았다. 청바지를 입고 넥타이도 풀어버렸다. 자유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었다. “가둬 뒀던 나를 좀 풀어놓고 싶었어요. 그때 바이크를 시작했죠. 바이크를 광고할 때 ‘자유로움’을 강조하잖아요. 제가 직접 경험해 보니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남성다움이 확 튀어나오더군요.”

당시는 할리데이비슨 공식 수입 대리점이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그가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지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어떤 이는 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바이크를 타면서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았으니 분명 시작한 보람이 있었지만, 문제는 주말마다 혼자 바이크를 타러 나가고 1년에 몇 번은 외국으로 원정까지 가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단국대 평생교육원 바리스타 과정에 등록했어요. 아내도 커피를 좋아했거든요. 아내를 비롯해 그때 함께 배운 동기 20명 중 직접 원두를 골라 로스팅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커피를 공부한 후 ‘이게 진짜 커피’라는 생각이 들면서 확 빠지게 됐죠.”
[뷰티풀 라이프] 골프는 ‘비즈니스’…커피·바이크는 ‘생활’
아침마다 아내와 딸에게 커피 서비스

그 후 이 대표는 매일 아침 아내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아내와 딸을 위해 커피를 만든다. 출장을 가는 날엔 미리 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담아두고 나올 정도다. 바리스타 과정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강사가 ‘이걸 왜 배우느냐’고 질문했을 때 대부분 ‘커피숍 창업’이라고 답했던 것과 달리 그는 “아침마다 아내와 딸에게 커피를 타 주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던 게 현실이 된 셈이다. “그때 박수 세례를 받았죠(웃음). 아내를 따라왔다고 말할 수 없어 그렇게 말한 건데 아마도 그게 제 진심이었던 모양입니다.”

요즘은 바이크보다 커피 쪽으로 인생의 축이 더 기울어져 있다. 커피는 곧 생활이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하루에 대여섯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신다. 가족들과 한 잔, 아침 임원 회의에서 한 잔, 찾아오는 손님 접대와 직원들과의 커피 브레이크 등등. 누군가는 건강을 염려하지만 커피는 단점보다 장점이 많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물론 각성 효과가 있긴 하지만 찾아보니 좋은 점이 더 많더라고요. 이뇨나 배변에도 도움이 되고 항암 효과도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커피를 소재 삼아 이야기를 시작하면 대화가 풍부해진다는 점입니다. 제가 원래 말이 없는 편이었는데 커피를 배우면서 대화를 이끌어가게 됐죠. 커피에 관해서라면 2시간 동안 얘기하는 것도 거뜬해요. 제가 직접 만든 커피를 대접받은 손님들과 직원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라며 너무나 고마워 하니 그 또한 좋지요.”

바이크를 타던 시절엔 바이크 전도사였던 이 대표가 요즘은 만나는 이들에게 커피를 배워보라며 권하는 이유도 커피를 알게 된 후 인생이 풍부해졌기 때문이다. “일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 일의 중요성을 새삼 크게 느껴요. 그런데 일 외에 자기만의 즐거움을 갖고 있으면 비즈니스에서도 더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요. 남들이 다 하는 흔한 것보다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이야기를 걸어올 만한 것이라면 더 좋겠죠.”

재미있는 사실은 골프 용품 회사의 대표인 그가 정작 “골프는 나와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는 것. 그에게 골프는 비즈니스고 커피와 바이크는 ‘생활’인 셈이다. 생활이 즐거워지면서 그는 요즘 일에서도 ‘회춘’의 계기를 맞았다. 최근 전 직원과 함께 한 워크숍에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열정을 불사르는 것을 보면서 일에 대한 욕심이 다시 생겨난 것이다.

“제 나이가 60인데, 열정이 사람을 멋지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전 직원이 힘을 합해 변화를 꾀하고 있으니 올해는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6~7년 전부터 시작한 자선 골프 대회를 비롯해 16년째 해오고 있는 회사 차원의 나눔 활동도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고 싶습니다. 그 나눔이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지 않을까요.”

이 대표는 두 가지 꿈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멋지게 나이 들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고, 또 하나는 딸에게 ‘좋은 아빠였다’는 평을 받는 것이다. 후자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전자만큼은 충분히 들을 자격이 있어 보인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