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에 더 이상 신성(神聖)한 것은 없는 모양이다. 마리오 몬티 총리가 이끌고 있는 이탈리아 정부가 그동안 비과세로 운영되던 가톨릭교회 소유 부동산 자산에 비과세 혜택을 없애는 방안을 추진하고 나섰다.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서 연간 20억 유로 규모의 추가 세원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이탈리아 부동산의 20%에 해당하는 10만 채의 상업용 빌딩이 가톨릭교회 소유로 알려져 있다.
伊 정부 재정 위기, 가톨릭교회에 과세하나…연간 20억 유로 증세 효과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이탈리아 정부가 바티칸 교황청을 세금 문제로 공격하고 나섰다”고 보도했다. 과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 시절 교황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의회 제출을 미뤄왔던 교회 소유 부동산 면세 폐지 법안을 이탈리아 정부가 조만간 내놓기로 한 것이다.

현재 이탈리아에는 9000개의 학교, 2300개의 박물관과 도서관, 4700개의 성당과 병원을 비롯해 수만 개의 호텔과 상점, 여행 사무소, 스포츠센터 등이 모두 교회 소유다. 현행 이탈리아법에선 종교 시설에 대해 부동산세가 면제됐다. 이에 따라 교회 소유의 호텔이나 숙박업소는 별도의 예배 공간을 갖췄을 때 부동산세를 내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재정 위기로 곤경에 처하면서 “상업적 용도로 이용되는 모든 부동산에 대해선 부동산세를 물려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졌다. 지난해엔 좌파 성향 활동가들이 바티칸 교황청에 재정 감축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며 개설한 페이스북에 수만 명의 지지자들이 세금 부과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시사 주간지 에스프레소도 ‘신성한 탈세(Holy Tax Evasion)’라는 제목의 기획 기사를 통해 가톨릭교회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탈리아 정부의 이 같은 조치에 호아킨 알무니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경쟁담당 집행위원이 적극 지지 입장을 밝히는 등 외부에서도 정부 지지 의사를 밝혔다.



여론도 ‘세금 부과’ 우세

그동안 이탈리아에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바티칸 교황청을 직접적인 비판 대상으로 삼는 것을 금기시해 왔다. 가톨릭교회 면세 철회 촉구 운동이 대중의 호응을 받으며 확산된 데 이어 정부가 면세 조치 철폐를 추진하고 나선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단 가톨릭교회 측은 공식적인 입장을 내비치지 않고 있다. 안젤로 바그나스코 추기경은 “가톨릭교회 소유 부동산에 대한 부동산세 부과 문제와 관련해 이탈리아 정부와 논의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바티칸도 공식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바티칸 자체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탈리아 정부의 결정이 내려지게 된 점을 부담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가톨릭계 언론인 아베니에르는 이번 조치로 교회가 연간 1억 유로의 세금 부담을 져야 할 것으로 추산했고, 지방교구 연합회인 안치는 6억 유로의 부동산세가 부과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다른 이탈리아 언론들은 최대 연간 20억 유로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면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가톨릭교회가 사회복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정부의 기능을 보완하기 때문에 면세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며 여전히 면세 정책 유지를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끄는 자유국민당(PDL)은 “교회를 벌하려고 하는 것은 가장 취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과 같다”며 면세 유지를 주장하고 있어 정부의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이탈리아는 몬티 총리 취임 3개월 동안 연금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등 긴축안을 성공적으로 추진,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신뢰를 빠르게 되살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동욱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ildon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