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금융 위기와 세계적 경기 냉각의 여파로 중견그룹 간에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 많은 수익을 낸 그룹사들은 국내외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거나 인수·합병(M&A)을 통해 새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 반면 그렇지 못한 그룹사는 보유 자산은 물론이고 주력 계열사를 팔아서라도 그룹 전체의 유동성 확보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알짜 그룹사’로 재평가 받는 그룹사는 바로 KCC다. KCC는 현재 현금성 자산만 1조 원을 넘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지난해 만도와 현대자동차 지분(각각 6300억 원, 2400억 원 규모)을 팔았으며 올 초에는 현대중공업 지분을 매각해 6900억 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이 자금 중 KCC가 투자한 곳은 현재 삼성그룹의 핵심인 삼성에버랜드의 지분을 매입한 데 쓴 7700억 원이 전부다. 관련 업계 등에 따르면 KCC는 1월 중순 기준 약 9000억 원의 현금성 자산과 1조1000억 원의 비핵심 투자 주식을 보유 중이다.

건자재 판매 사업을 하는 KCC는 내장재와 단열재 등 대부분 품목에서 50%를 웃도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확보한 덕분에 건설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매년 2000억 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내왔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새로 들어온 현금이 M&A 등 사업 확장 용도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크리스 박 무디스 연구원은 “새로운 사업 영역에 투자하려는 KCC의 의욕을 감안할 때 유입된 현금을 기존 부채를 줄이는 데 사용하지 않을 것 같다”고 밝혔다.
달라진 경영 환경에 웃고 우는 중견 그룹…KCC·부영, M&A 돌풍의 ‘핵’으로
이랜드월드 영업익 3년간 750% 뛰어

부영과 이랜드도 상황이 좋은 그룹사들이다. 이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빼어난 성장세를 이룬 자신감을 바탕으로 사세 확장 의지로 내보이고 있다.

부영은 국내 최대의 민간 임대 사업자다. 부영은 2008년 38위였던 재계 자산 총액 순위(공기업 제외)가 2011년 4월 23위로 뛰어오르며 30대 그룹 안에 진입해 주목받았다. 이유는 2010년 초 임대주택 자산의 자산 재평가 과정에서 모두 1조1799억 원의 자본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10년 말 연결 순자산은 1조5049억 원으로 전년 대비 7배로 급성장했다. 이에 따라 부영은 지난해 대한전선으로부터 ‘무주리조트’를 인수한 데 이어 최근 쌍용건설 인수전에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이랜드 역시 시가 1000억 원대의 쌍용건설 경영권 지분 인수를 추진하는 동시에 1조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프로야구 명문 구단 ‘LA다저스’의 인수전에 지분 투자 형태로 참여 중이다. 이랜드는 LA다저스 인수전에서는 피터 오말리 전 구단주가 꾸린 컨소시엄에 10~15%(1500억~2000억 원)를 참여하기로 했다.

‘로엠’, ‘더데이’ 등 30여 개의 패션 브랜드를 보유한 이랜드그룹의 지배회사 이랜드월드의 연결 영업이익은 2007년 501억 원에서 2010년 4258억 원으로 금융 위기 이후 3년간 750% 신장했다. 박성수 이랜드그룹 회장은 그룹의 풍부한 현금을 토대로 올 초 사이판의 팜스 리조트와 PIC사이판을 인수하기도 했다.

반면 웅진·STX·동양 등의 중견그룹들은 유동성 확보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월 6일 웅진그룹은 웅진코웨이를 매각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매출 1조7000억 원의 웅진코웨이는 웅진그룹의 주력 계열사다. 웅진그룹이 웅진코웨이 매각이라는 강수를 둔 데는 최근 계열사들의 경영 리스크가 그룹 전체를 위협할 정도로 커졌다는 판단에 따른 고육책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특히 극동건설과 서울상호저축은행 인수는 그룹의 재무구조에 부담이 됐다. 웅진그룹의 지주회사인 웅진홀딩스는 2007년 미국계 사모 펀드 론스타로부터 극동건설을 6600억 원에 인수했고 2010년에는 웅진캐피탈을 통해 총 1100억 원에 서울저축은행과 늘푸른저축은행을 사들였다.

하지만 극동건설은 인수 후 부동산 경기 침체와 글로벌 금융 위기가 겹치면서 ‘밑 빠진 독’이 됐다. 서울저축은행 역시 부실덩어리로 전락했다. 서울저축은행은 2010 회계연도(2011년 6월 기준)까지 2년 연속 1000억 원이 넘는 적자를 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웅진그룹이 핵심 전략 사업으로 육성하는 태양광 분야도 업황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웅진그룹은 웅진코웨이를 매각하면 다른 계열사들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자금난 해소를 위해서는 팔릴 수 있는 기업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며 “외환위기 때인 1998년에도 그룹 내 알짜 기업인 코리아나화장품을 매각해 다른 그룹 계열사들이 재활의 기반을 다졌다”고 설명했다.

STX 역시 자금 확보를 위해 노력 중이다. 이미 국내 신용 평가사들은 저조한 영업 실적 지속과 과중한 차입금 규모 등을 이유로 계열사인 STX팬오션 등급 전망을 하향 조정한 바 있다. 이에 따라 STX팬오션은 2월 7일 이사회에서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발행해 25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하기로 결의했다. 자금 일부는 시설·운영자금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확보해 재무 건전성을 유지할 계획이라고 회사 측은 밝혔다. 또한 STX유럽 자회사인 STX OSV 등 국외 자산 매각 작업을 올해 상반기에 마무리할 방침이다.

동양그룹 역시 현금 확보를 위해 핵심 계열사인 동양생명을 시장에 매물로 내놓았다. 동양그룹은 지주회사 격인 (주)동양이 건설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달라진 경영 환경에 웃고 우는 중견 그룹…KCC·부영, M&A 돌풍의 ‘핵’으로
대한전선 가까스로 위기 넘겨

대한전선은 상황이 더 좋지 않다. 대한전선은 지난해 말 기준 금융권 차입금이 1조7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대한전선은 현재 채권단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맺은 상황이다. 대한전선은 자금난 해소를 위해 지난해부터 선운산골프장·무주리조트 등 자산을 잇달아 매각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하나은행 등 12개 채권은행은 2월 7일 자금난을 겪고 있는 대한전선에 4300억 원 규모의 협조융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1955년 설립된 장수 기업인 대한전선은 협조융자 지원으로 위기를 넘긴 실정이다.

이 밖에 LS·동부·코오롱·효성 등 재계 20위권 안팎 중견그룹들도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사업이 정체를 벗어나지 못해 수익성이 떨어져 자금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LS산전은 영업이익이 전년에 비해 31.8% 급감했고 LS전선은 적자로 돌아섰다. 동부·코오롱·효성그룹도 3년 새 매출이 소폭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거의 정체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홍표 기자 hawl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