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도가 오사카를 주목 중이다. 오사카에서 구태 타파의 일본 부활 시그널을 목격해서다. 정확하게는 ‘하시모토 현상(신드롬)’이다. 하시모토 도루는 ‘젊음’의 상징 아이콘이다. 개혁 대상으로 떠오른 늙은 구태·기득권 세력에 당당히 맞서는 인기 절정의 뉴스 메이커다. 차세대 정치 지도자로 급부상하며 열도 사회와 정계를 폭풍 속으로 유도했다. 인기는 상상 초월이다. 광범위한 지지 중 유독 청년 그룹의 응원 목소리가 높다. 정치인 인기 순위에선 단연 1위다. 산케이의 2012년 신년 기획 차기 총리 후보 순위에서 1위(21.4%)를 차지했다. 극우 망언으로 유명한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2위, 9.6%)를 크게 앞섰다. 이상적인 지도자 랭킹에서는 5위에 꼽혔다. 메이지유신 기획자인 사카모토 료마를 비롯해 역사·은퇴 인물을 뺀 현역 중 1위다. 아사히 조사(총리에 어울리는 인물)에서도 2위에 올랐다. 고질적인 정치 혐오가 새로운 신인 발굴로 이어진 결과다. 정치인 중 유일하게 지지율이 뛰는 인물이다.
시대 개혁의 과제를 부여받은 그는 1969년생이다. 노객들이 판치는 일본 정계에선 극히 젊다.지지 근거는 다양하다. 우선 명확한 피아(彼我) 구분이다. 주된 공격 대상은 이미 사다리 위를 독점한 늙은 기성세대다. 이들이 지금의 일본을 망친 원흉이라고 질타한다. ‘신의 직장’이자 ‘철밥통’을 움켜쥔 공무원 사회가 대표적이다. 제대로 된 복지가 안 되는 핵심 장벽이 전달 주체인 공무원의 안일한 세태 대응과 불감증이란 지적이다. 반대로 허점투성이 복지 시스템과 세금 누수에 따른 청년 세대의 상대적 박탈감은 위로 상대다.
이 때문에 기성세대의 상징인 단카이(團塊) 세대에 집중된 그간의 복지 수혜에 메스를 대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노소·빈부 격차 등의 절망감에 좌절하고 정치에 무관심하던 청년 세대를 설득해 낸 원동력이 여기에 있다. 기존 정치도 격파 대상이다. 파벌과 돈으로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지키던 정치 관행에 제동을 건 주역이다. 스스로 집단·배경주의를 중시하는 일본 정계에선 비주류로 기존에 맞서 성공 스토리를 썼다. 강력한 리더십의 주인공답게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으로 일본 정치의 고질병이던 유약한 리더십에 희망의 불씨를 던졌다. ‘철밥통’ 공무원 사회 뒤흔들어
성장 배경과 사회 이력도 세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조건을 두루 갖췄다. 부친은 신분 차별이 여전히 공고한 최하층 천민집단(部落民) 출신에, 그것도 야쿠자로 살아왔다. 부친의 자살 후 모자가정에서 자라나는 동안 가난은 익숙한 친구였다. 그렇다고 좌절은 없었다. 일찍부터 고학하며 명문대(와세다)에 입학했다.
대학 때는 현재 부인과 동거해 일찍 아버지가 됐다. 지금은 7남매 가장으로 더 유명하다. 1994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공중파에 고정 출연하며 전국적인 지명도를 쌓았다. 이때부터 튀는 코멘트와 소탈한 외모 및 자상한 가정사 등이 어울리며 탤런트적인 기질을 일거에 발산했다. 2007년 정치 신인 하시모토는 고향 오사카에 출사표를 던졌고 승리하며 부(府)지사에 당선됐다.
표심은 틀리지 않았다. 공약 실천은 첫날부터 단행됐다. 예산을 삭감(1000억 엔)하기 위해 자신의 월급부터 30% 줄였다. 이 밖에 낭비 방지와 비용 절감 차원의 수많은 개혁 과제에 손을 댔다. 우선 타깃은 공무원이었다. “당신(공무원)들은 파산회사 종업원”이라며 “죽을힘으로 개혁하고 함께 죽자”고 강조했다. 반발은 거셌다. 복지 전달 체계와 관련된 시민단체·노조 등과는 사사건건 부딪쳤고 독재자란 별명까지 얻었다.
타협은 없었다. 연일 강공 드라이브를 날렸다. 그로부터 2년 후, 오사카는 흑자로 돌아섰다. 인기가 치솟았다. 지지율은 80%대의 고공행진을 반복했다. 정치권에선 꽤 까다로운 인물이다. 정치 데뷔는 자민·공명당 추천이었지만 2009년 총선에선 민주당을 지지했다. 민주당이 헤매자 2010년엔 스스로 창당에 나섰다. ‘오사카유신회’의 탄생 배경이다. 이후 오사카부(府) 의회선거에 도전해 51%의 의석까지 확보했다.
2011년 이후 하시모토의 행보는 열도 전체를 가시권에 두기 시작했다. 계기는 2011년 11월의 이른바 ‘더블선거(오사카부·오사카시)’ 동시 승리였다. 부지사였던 하시모토가 한 단계 낮춰 도전한 오사카시 시장직과 측근(마쓰이 이치로)의 부지사직 모두에서 이긴 사건이다. 집권 여당과 제1야당이 공동 지원한 단일 후보를 현격한 격차로 물리쳐 ‘오사카의 반란’으로도 불린다. 당시 공약은 파격적이었다. 오사카부와 시를 합친 오사카도(大阪都) 구상 계획이 대표적이다. 행정을 없애 비용 절감, 의사결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일본 핵 보유는 필수’ 지론
시장 취임 후 그의 행보는 한층 탄력을 받는다. 공약대로 개혁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당선 직후 자신의 월급(30%)과 퇴직금(50%)을 삭감했다. “오사카 문제는 전부 오사카 시청에 있다”는 발언에서는 공무원을 ‘세금 갉아먹는 흰개미’로 표현한 평소 지론마저 확인된다. 인원 감축(30%, 1만2000명)과 월급 삭감(1인당 최종 30%)이 구체 목표다. 퇴직 공무원의 낙하산 은신처였던 100여 개의 외곽단체도 폐지 대상에 올랐다.
그의 정치 철학은 보수우익이다. 기존 정당이 우왕좌왕할 정도로 뚜렷한 색깔 구분이 힘든 하시모토지만 우파 세력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가령 부지사 시절 그는 군국주의 부활 저지 차원에서 만든 국가(가미가요) 제창 금지 조례를 바꿔버렸다. “일본인이면 애국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이는 전쟁 원죄 때문에 말을 아끼던 중도파까지 끌어안는 계기가 됐다. 비핵 논리에도 정면 반대다. 주변의 위협에 맞서자면 일본의 핵 보유는 필수라는 지론이다. 조총련계 고등학교에 주던 보조금도 끊어버렸다.
한국으로선 만만치 않은 상대다. “한국에 진 빚은 없다”는 등 외교적 언사 배려는 기대하기 힘들다. 독재가 필요하다는 평소 발언도 뜨거운 감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 이후 ‘하시모토 현상’은 나날이 뜨겁다. 그의 오사카발(發) 개혁론이 가시화될수록 러브콜은 잦아진다. 이를 반영하듯 그의 정당은 중의원 200명 당선을 목표로 중앙 정계 진출을 공식화했다.
하시모토와 오사카
오사카 복지 거품이 하시모토 키워 하시모토의 급부상은 오사카의 복지 거품이 키웠다. 오사카는 복지 천국이다. 생활보호대상자가 전국 최고다. 일본 평균이 100명당 1.6명에 불과한데 오사카는 6명에 달한다(2011년 7월). 복지병(病) 대량 양산 배경이다. 문제는 누수다. 시 예산(일반)의 17%가 생활보호비로 지급되니 재정은 파탄 직전이다. 하시모토가 공무원을 개혁 대상 1순위에 올린 건 복지병 원인 제공자로 이들을 의심해서다.
생활보호대상자의 불법 수령 사건이 그렇다. 비난 여론은 2010년 터졌다. 오사카 체류 자격을 획득한 중국인 48명이 입국 즉시 생활보호를 신청한 사건이 발각됐다. 법적 문제는 없지만 후폭풍은 거셌다. 감춰진 복지 누수가 곳곳에서 밝혀졌다. 그런데도 공무원 숫자는 전국 1위다. 시민 1만 명당 공무원이 51.4명으로 비슷한 덩치의 요코하마보다 4배나 많다. 이후 생활보호제도의 축소 지향형 재검토와 복지 수혜의 명확한 구분은 한층 지지 여론을 획득했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겸임교수(전 게이오대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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